자유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독창적인 비판은 좌파와 우파의 추종자를 확보했다. 자본주의가 인류 번영의 조건을 어떻게 훼손했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은 사회주의자들의 진지한 관심을 받을 만하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출처: 위키미디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정치계 인사들이 그의 통찰력을 인정할 만큼 지성과 깊이를 겸비한 희귀한 지식인이다. 많은 정치적 우파의 중요한 지식인들도 그를 인정한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법관 임명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헌법적 원천주의의 창시자 로버트 보크(Robert Bork)는 매킨타이어가 "도덕 철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제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반증한다고 평가했다. 저명한 보수주의 작가 패트릭 데닌(Patrick Deneen)은 그의 에세이집 <미국을 보존할 것인가?: 현재의 불만에 관한 에세이>에서, 매킨타이어가 "우리가 새로운 암흑기의 문턱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 것에 동의하며, 이는 "자유주의의 종말"과 "자유주의 이후의 희망적인 미래로의 전환"을 통해서만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매킨타이어를 자유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그의 비난을 중심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철학이 말하는 인간의 번영과 미덕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수준에서 더 나은 욕망이나 삶의 방식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유주의 철학까지 이어지는 전형적인 우파적 쇠퇴와 몰락의 이야기를 매킨타이어가 제공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보수적인 해석들은 매킨타이어의 작품 속 자본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비난과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지속적인 감상을 일관된 흐름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파 해석가들은 보통 매킨타이어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 두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취한다. 이들은 둘 다 거부하거나, 자유주의는 거부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지지를 지속하는 매킨타이어의 입장을 따른다. 사실, 매킨타이어가 자본주의를 비판한 것은 그가 미덕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긍정적으로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진보적 자유주의, 즉 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근대성의 핵심 성과를 보존하면서도 그 유해한 부분 대부분을 거부함으로써 매킨타이어의 비판에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킨타이어와 마르크스
정치학자 이안 샤피로(Ian Shapiro)는 1970년대 말과 80년대에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눈을 돌리기 전까지 매킨타이어를 "상당히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는 매킨타이어의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특이한 성격과 그가 마르크스와 단절하지 않았던 방식을 간과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그 원자론적 허무주의에 대한 비판적 거부,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평등주의 공동체와 사회적 연대의 재건을 강조한 매킨타이어의 작업에는 연속성이 있다.
이러한 독특한 선입견은 매킨타이어의 초기 소논문인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1968)에서 볼 수 있다. 이 논문은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거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매킨타이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과학적 관점에서 종교를 단순히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는 유물론적 거부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강조한다. 대신 그들은 종교가 소외되고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 사는 수십억 명의 '사회적 필요'에 부응하기 때문에 유물론적, 과학적 합리주의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식했다. 종교를 영구적으로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종교가 내세나 다가올 세상에 투영한 정의롭고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젊은 매킨타이어는 마르크스주의가 우리 사회 희망의 이론적, 실천적 수단으로서 기독교 전통의 장점을 계승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1960년대 신좌파의 혁명적 열망이 70년대 반동적 후퇴로 이어지면서 이러한 초기의 낙관론은 시들기 시작했다. 매킨타이어의 보다 특유의 신랄한 면모는 그의 짧은 저서 <마르쿠제(Marcuse, 1970)>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이 책은 제목이 된 철학자에 대한 통렬하고 (때로는 불공평한) 평가인 동시에 당시의 과도한 낙관주의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매킨타이어는 당시의 비판 이론이 다가올 막연한 유토피아에 대한 부풀려진 희망을 투영하는 것과 그 유토피아를 실현할 '혁명적 세력'이 과연 그 일을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비관론 사이에서 흔들렸다고 주장한다.
매킨타이어는 마르크스와 다른 신(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이 "인간의 본성은 무한히 가변적"이라는 상상과 "다수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지각하거나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엘리트주의'를 비판한다. 따라서 소수는 자신의 필요를 대변해야 하며, 이 적극적인 소수가 수동적인 다수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능동적 소수"는 비판적 이론가들로 구성되며, 마르쿠제가 "노동자 계급" 대신 이들로 간주한 것이다. 마르쿠제는 노동자 계급이 일차원적 사고와 대중문화에 속아 넘어가 더 이상 "허위 의식"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겼다.
매킨타이어의 글에서 마르크스적인 표현을 읽으면, 좌파 지식인들과 그들의 무기력한 급진주의에 실망해 보수주의로 전향하는 익숙한 흐름을 따르는 급진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매킨타이어가 더 강력하고 노동계급 중심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그리워하며 한탄하는 것에 가깝다. 그는 "꽃의 힘, 히피 하위 문화의 언어, 영혼 문화의 언어, 그리고 네 글자 단어"를 "소부르주아 보헤미아"의 여러 형태로 경멸한다.
1960년대 급진주의를 부르주아 낭만주의와 소비주의적 개인주의의 표현일 뿐이라는 매킨타이어의 우울한 거부는 그의 초기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 사려 깊고 논쟁적으로 과장된 측면이 있다. 신좌파에 대한 비관론은 자본주의의 불의에 포괄적으로 도전하는 데 실패한 당시 사회 운동의 실패를 고려할 때 선견지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킨타이어는 시민권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운동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고, 출세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누리려는 개인주의적 욕망보다 더 높은 이상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것이 분명하다.
매킨타이어의 사상은 1980년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덕의 상실(After Virtue)』이 출판되면서 급격히 변화했다. 이 책의 핵심은 근대성을 깊이 사색한 끝에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이마누엘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이, 불합리에 대한 인간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합리주의적 시도라고 주장한다. 이 프로젝트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아퀴나스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자연에 내재하거나 신이 부여한 더 높은 목적이 있다는 믿음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히 말하자면, 매킨타이어는 전근대적 도덕 개념에 대한 특정 현대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반대의 실제적인 힘을 인정한다.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목적론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현대 과학 이론의 시계를 되돌릴 수는 없다. 이러한 뉘앙스는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도덕적 틀을 반박할 필요 없이 그 기반이 되는 형이상학을 거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데닌(Deneen)과 같은 포스트자유주의자들은 종종 무시한다.
『덕의 상실』의 매킨타이어에게 더 중요한 것은 계몽주의 자유주의자들이 열렬히 파괴한 것을 대신해 도덕적으로 안정된 어떤 것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미 신흥 자본주의의 관습에 깊은 영향을 받은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원자화된 개인이 자기 이익과 자기 선택적 목표를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데 도덕성의 근거를 두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칸트의 정언명령론에서 공리주의, 자유주의적 자연권 교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띠었다고 매킨타이어는 주장했다.
그러나 매킨타이어에게 이러한 모든 자유주의적 구성은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을 세우는 데 실패하고 결국 감정주의라는 같은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도덕성 자체는 주관적 취향의 표현에 불과하며, 도덕적 관점을 선택하는 것은 아마존에서 상품을 클릭하는 소비자의 선택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실제로 매킨타이어는 도덕적 담론 자체가 시장 언어의 무덤덤한 평면성으로 인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적 금욕의 삶을, 어떤 사람들은 쾌락주의적 성적 포기의 삶을, 또 어떤 사람들은 부르주아적 평범함의 삶을 '선호'할 수 있다. 자유주의 사회는 이러한 모든 도덕적 관점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자본가들은 이러한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기꺼이 고용하여 성경과 포르노를 생산했다.
『덕의 상실』에서 매킨타이어는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세계관에 대한 복잡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대안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 대안은 특정한 전통과 관행에 의해 가능해진 인간의 탁월성 추구로 이해되는 미덕의 함양에 기반한 도덕적 틀이다. 이러한 전통적 관행은 특정 커뮤니티 내의 삶의 방식에 의해 확립되며 사교 클럽에서 하키 팀, 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관에서 지원한다.
하지만 매킨타이어는 자유주의적 근대성에 맞서 전통적인 관행과 제도를 옹호할 때, 이를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처럼 전제적 충성심의 문제로 보수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전통에는 현상 유지에 비판적인, 심지어 급진적인 주장도 포함된다. 결국 마르크스주의 자체도 계몽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자기 비판으로 등장했다. 매킨타이어는 "보수적인 정치 이론가들"이 전통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며, "버크적 전통은 항상 죽어 있거나 죽어간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태도는 『덕의 상실』에서 양면성을 띤다. 한편으로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가 그 핵심에 "매우 낙관적"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의 생산력 발전이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선진 자본주의의 도덕적 빈곤이 사실이라면 미래를 위한 이러한 자원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1980년대에 매킨타이어는 마르크스주의의 낙관적인 의지가 자본주의가 유발하는 소외와 이기주의가 민주적 사회주의로 나아가기보다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더 합리적인 비관주의와 충돌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가 제거된 마르크스주의도 결국 "우리 문화의 다른 모든 정치적 전통"처럼 지쳐 버렸다. 매킨타이어는 마르크스주의가 도덕적 문제에 직면할 때, 결국 공리주의나 칸트주의 같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도덕 철학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실천과 공동체에 기반한 미덕 윤리를 긍정적으로 지지하는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와 비판 이론적 고갈에 대한 건설적인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매킨타이어 자신도 깨닫게 되었듯이, 진보적 프로젝트는 마르크스에 의존하지 않고는 근대성에 대한 이러한 재고를 달성할 수 없다. 그의 최신 주요 저서인 『근대성의 갈등 속의 윤리((Ethics in the Conflict of Modernity, 2016)』에서 매킨타이어는 자유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자신의 핵심적인 반론을 보다 측정된 용어로 다시 제시한다. 거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를 종합한 마르크스이긴 하지만 현대 세계의 고난을 이해하는 데 '핵심 자료'를 제공하는 인물로서 마르크스로 돌아간다.
매킨타이어는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도덕적 사고와 담론에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특정 생산 방식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제와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이 초역사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불행과 사회적 붕괴를 초래한 시스템의 과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실패가 시장에 충분히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문제를 끝없이 설명한다.
반자유주의인가, 반자본주의인가?
그의 저서 『정치철학: 그것이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에서 로널드 베이너(Ronald Beiner)는 매킨타이어의 "고결한 고대에서 부패한 근대로 이어지는 매우 야심찬 메타 내러티브"를 칭찬하면서도 "보수주의와 급진주의의 문제적 혼합"을 비판한다. 베이너는 매킨타이어가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이점에 충분히 민감하지 못한 반면, 그 자리에 일종의 지역주의 외에는 제안할 것이 거의 없으며, 우리는 특정한 긴밀한 공동체의 도덕적 삶을 재건하고 인류의 선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전통적인 관행과 제도를 복원하거나 재창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적 목적이 단지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를 거짓된 철학으로 비난하는 것이라면, 마르크스주의와 토마스주의의 이 융합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대 경험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의심스러운지를 보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정치 철학을 찾고 있다면, 매킨타이어의 보수주의와 급진주의의 융합은 상당히 더 의문스럽게 보인다.
나는 매킨타이어의 글에서 진정한 보수주의적 요소가 많다고 확신하지 않는니다. 그가 근대성을 많이 보존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나, 우파 사상의 반평등주의적 핵심에 어떤 식으로든 헌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러나 나는 베이너의 의견에 동의하는데, 매킨타이어가 근대성의 문제를 심오하게 진단하는 부분은 종종 그가 제시하는 긍정적 도덕 개념보다 더 설득력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보존할 가치가 있는 자유주의의 도덕적 핵심을 고도 자본주의의 이념적 범주와 지나치게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매킨타이어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면적으로는 평등주의적 정치 이념에 헌신한다고 하지만, 심각한 재정적, 교육적 불평등이 심각한 정치적 불평등을 초래한다"고 『근대성의 갈등 속의 윤리』에서 쓴 내용은 분명 옳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에서 존 롤스에 이르는 평등주의 자유주의자들 또한 이 점에서 매킨타이어와 동의할 것이며, 자유주의의 "평등주의적 정치 이념"과 자본에 의해 왜곡된 현실 세계 사이의 큰 간극을 지적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해답은 자유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덕적 원칙을 실제로 실현하는 데 있다.
인간 번영을 위한 철학
하지만 자유주의에는 또 다른 흐름이 있다. 진보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이 자유주의는 삶의 최고의 목표가 각자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슬픈 생각을 오래 전부터 거부해왔다. 예를 들어 밀, 롤스, 샹탈 무페와 같은 사상가들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관대한 재분배와 직장 민주주의와 결합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대와 상호 존중의 원칙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는 공동체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공동체와 발전의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보호하고 확대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래야만 '공동체'가 개인을 지배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 자체가 소외의 원인이 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전통적 권위에 의한 개인 지배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매킨타이어와 같은 저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이며, 아마도 그의 동시대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핵심 자유주의적 권리를 옹호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다른 면에서 보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과 매킨타이어주의자들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개념을 옹호했는데, 이 원칙은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할 때, 인간은 자신의 실현된 능력(선천적이든 훈련된 것이든)을 발휘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며, 이러한 즐거움은 그 능력이 더 많이 실현될수록 또는 그 복잡성이 더 클수록 증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롤스는 이 근거를 바탕으로 정의로운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킬 동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그는 매킨타이어와 같은 입장에 있었으며, 자본주의가 대부분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방식에 대해 한탄했다.
롤스와 같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과 나, 그리고 매킨타이어 사이의 핵심적인 의견 차이는 사회 정의가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틀에서 비롯된다. 롤스주의자(또는 나의 경우 롤스주의-마르크스주의자)는 사회를 자유롭고 평등한 이성적 개인들의 공동체로 이해하며, 각자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좋은지 정의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우하겠다는 다짐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제도(집단적 소유까지 포함)를 정당화한다고 믿는다. 반면,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추상적인 도덕 원칙이 인간 본성에 대한 빈약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으며,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도덕적 틀을 지지하며, 좋은 삶에 대한 객관적 해답은 특정 공동체와 그 전통 및 관습에 뿌리를 두고 성찰을 통해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선의 회복
이러한 관점이 지나치게 극단으로 흐를 경우, 나는 이것이 개인이 성공적으로 번영하는 데 필요한 요소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매킨타이어가 모든 인간이 공통된 물질적, 사회적 필요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상대적 추상화를 거부하며, 이러한 필요가 부정당하는 것이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실현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공간, 즉 존 스튜어트 밀의 말 처럼 본연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성장하는 '살아있는 나무'가 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조잡한 원자론적 개인주의가 아니다. 밀, 롤스, 그리고 다른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이러한 개별화 프로젝트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며 올바른 종류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마르크스주의 인본주의 프로젝트의 핵심이기도 하다. 특히 마르크스가 자본 3권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능력의 발전'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며, 개인들이 타인과 협력해 다방면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그 이상이다.
매킨타이어 자신도 『근대성의 갈등 속의 윤리』를 쓸 무렵에는 개별적 성격과 표현 양식의 다양성을 더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던 것 같다. 이 책에서 그는 번성하는 전통과 자기 성찰에 대한 헌신이 사람들이 다양한 종류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고 찬양하는데, 여기에는 성스러운 사제부터 D. H. 로렌스와 같은 보헤미안 작가까지 포함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일어나려면 신자유주의 경제를 거부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자유주의에 대한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공동선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진전
매킨타이어가 자유주의 전통에서 진정으로 진전한 부분은 "공유자원(common goods)"에 대한 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공유자원은 단순히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제공하는 공공재, 즉 우리가 각자 개인으로서 누리는 공원이나 학교 같은 것이 아니다. 공유자원은 사람들이 함께 추구해야만 하는 재화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되거나 특정 사회적 관행에 참여할 때만 누릴 수 있는 재화이다.
예를 들어, 가족은 각 구성원의 성공에 기쁨을 느끼는데, 이는 단순히 서로의 성공으로 개인적으로 혜택을 보기 때문만이 아니다(예: 부모가 직장에서 연봉을 올려 더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자녀에게 줄 수 있어서 자녀가 고마워하는 것). 오히려, 각 구성원은 가족이 잘 되는 것을 자신의 행복의 원천으로 인식한다. 매킨타이어는 체스와 같은 사회적 관행도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체스의 공동선은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고, 그에 대해 성찰하며, 공동체가 정의한 규범 내에서 탁월함을 위해 노력하는 지속적인 역사적 전통을 통해 실현된다. 종교 공동체도 구성원의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축하하며 신성한 유대를 재확인하는 기쁨을 누린다.
매킨타이어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모든 활동을 자기 이익 추구로 환원시킴으로써 이러한 공유자원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파괴한다고 주장하며, 자유주의적 도덕 철학이 애초에 이러한 재화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그가 역사적으로 옳은지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자유주의 철학도 공유자원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가 미덕, 공동체, 사회적 연대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과 이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이 우리 시대의 시급한 도덕적 과제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철학적, 실천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킨타이어를 읽어야 한다.
[출처] The Left Should Take Alasdair MacIntyre Seriously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
맷 맥매너스(Matt McManus)는 미시간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강사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