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시민이 광장의 '불빛'들에게, 우리 서로에게

2025 신년기획 [무지갯빛 '연대', 다시 쓰는 '우리'] ④

 

지난달 2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미국 정부는 '남성'과 '여성', 단 두 가지의 '성별'만을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취임 직후 발령한 행정명령들은 여권 신청서에 남성 혹은 여성이 아닌 '제 3의 성'으로 성별을 표기할 수 있는 선택지를 없애버렸다.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은 폐기되고, 트랜스젠더 청소년에 대한 의료 지원 시스템과 성소수자 청소년에 대한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도 부서질 위기에 놓였다. 

트럼프와 트럼프의 당선을 가능하게 한 세력들은 트랜스젠더 인권이 여성의 인권을 위협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한국 사회에서도 '트럼프식 논리'가 힘을 키우려 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구호를 빌려 내건 '탄핵 반대' 집회 참여자들만이 아니다. 윤석열 퇴진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광장의 안과 밖에서도, 트랜스젠더와 여성을, 이주민과 선주민을, 시민과 조직운동을 가르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여러 정체성을 용기 있게 드러내며 '퇴진 광장'에 선 이들의 평등을 향하는 요구가 민주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의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그 소란한 광장 한 복판에 다만 자신으로 존재하는 이들이 있다. 날 선 의문들 사이에서도 절망보다는 희망을 감각하고, 서로 다른 이들이 우리로서 함께 만드는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트랜스여성, 논바이너리, 노동자, 활동가, 시민, 광장의 불빛, 동료, 타인, 무엇인 동시에 다른 무엇인, 세 명의 트랜스젠더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에서 활동하는 박한희 변호사, 디자인 노동자이자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의 이안 활동가,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앤 위원장을 만났다. 각각의 인터뷰를 모아 하나의 글로 전한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여성 등 다양한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이 광장에 함께 하고 있다. 투쟁의 공간에, 우리 일과 삶의 현장에 성소수자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지만, 지금의 광장에서처럼 많은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자신의 여러 정체성을 수많은 타인들 앞에 밝히며 거리에 나선 것은 새로운 흐름인 것 같다. 지금의 광장에서 무엇을 감각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런 흐름이 가능했을까. 

한희 그동안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여러 억압들이 계속 이어져 왔는데, 그럼에도 당사자들이 갖는 인권의식은 크게 높아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럼에도 더 이상은 숨지 않고 드러내겠다는 의지들이 크다고 느껴져요. 최근에 좋은 흐름이 있었던 것들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작년에 대법원에서 동성 배우자가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됐잖아요. 그 사건이 당사자들한테 꽤 큰 변화로 다가왔어요. 사실 한국은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오래 성소수자 운동을 했던 분들조차 아, 이거 쉽지 않을 건데, 한국은 앞으로 10년에서 20년은 기다려야 되지 않겠냐는 전망이 많았죠. 그런데 변화가 이루어진 거죠. 

그런 변화를 광장에서도 이어가기 위해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 행동에서도 '무지개존'을 만들었고,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을 구성해서 광장에 무지개 깃발을 함께 띄우자고 했어요. 그런 노력은 어떤 신호를 주고자 했던 거예요. 광장에 나오고 싶은 성소수자들이, 혹시라도 광장에서 누군가 나의 정체성을 이유로 나를 꺼리지는 않을까,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할 수 있잖아요. 무지개존 안에서 당신은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실제 광장에 나와보니 무지개존을 넘어서 광장 전체가 혐오의 분위기가 아니라 환대의 분위기이고, 어느 곳을 보아도 무지개 깃발이 있는 상황이 된 거죠. 박근혜 퇴진 광장에서 실망을 경험했던 사람들도, 그때와는 다르구나,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이안 지금 광장의 변화들은 성소수자를 비롯해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이 여러 의제에서 쌓아온 투쟁의 역사가 함께 연결되고 쌓인 결과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혐오 정치에 기댄 윤석열 정권과 극우 세력에 맞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감각도 있는 것 같고요. 

저희 동료가 광장 초기에 집회에서 '5천만 커밍아웃'을 해버렸는데(웃음) 그 발언도 지금의 흐름을 촉진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 동료에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물었더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지는 것보다, 내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망가져 가는 것이 더 무섭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더 많이 모이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함께 싸워야 한다고 답했어요. 그런 마음들이 현장에 있었던, 또 그 자리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인 많은 분들께 닿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윤석열 정권과 국민의 힘은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기대어 성장해 온 극우 세력과 깊게 관계 맺고 있죠. 그들이 함께 너무나 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고요. 저는 이번에 광장에 나서는 성소수자 중에는 저항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절박한 마음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더는 박근혜 탄핵 이후처럼 '나중에'라는 말로 미루어지지 않고, 윤석열 퇴진과 함께 차별받고 억압받아 온 소수자들의 삶을 바꾸는 광장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람들이 크다고 느껴지고요. 

한희 확실히 박근혜 탄핵 때의 경험이 교훈이 된 것 같아요. 당시에 시민들의 힘으로, 노동・시민사회의 힘으로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정권을 만들었지만, 그 정권이 과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정말로 노력하는 정권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광장의 많은 요구들이 소위 '적폐청산', '검수완박'으로 다 빨려 들어갔죠. 광장에 나섰던 시민들도 크게 실망했고, 여러 사회운동 내에서도 문제의식이 있었고요. 

윤석열 정권을 거치면서 인권이 더욱 후퇴되는 일들이 많았죠. 페미니즘 검열이라든지. 딥페이크 성폭력이라든지. 변희수 하사 등 성소수자분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일이나, 이주민과 장애인 등 계속 소수자들이 배제당하는 숱한 일들이 있었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광장의 초창기부터 사람들이 더 다양한 목소리를 내왔다고 생각해요. 이런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정말 달라야 한다, 이제는 정말 소수자가 포함되고,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평등과 인권에 관한 의제들을 전면 내세워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들이 있었어요.  

저는 그만큼 이미 우리 사회와 시민들이 평등에 대한 감각이 굉장히 높아진 것 같아요. 제도가 못 따라가고 있을 뿐이죠. 차별금지법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70%가 넘는 지지가 확인되는 것처럼요. 차별과 혐오가 문제이고, 우리가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감각 자체가 이미 쌓여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지금 계엄이라는 위기사태 속에서 함께 모이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요. 

그런 요구들이 자라난 상황 속에서 퇴진 집회를 주최하는 비상행동에서도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서로서로 뒷받침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큰 집회에서 평등약속을 내건 일은 없었죠. 2016년에도 여러 문제의식과 제기가 있었지만, 이렇게 약속문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광장의 시민들과 함께 읽고, 그런 과정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 같아요. 

운동 내의 요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광장에 나온 사람들을 봤을 때 무시할 수 없게 된 거죠. 가령 비상행동 내에서 몇몇 단체들이 성소수자 의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는데, 당위만 있고, 광장에서 실제로 그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없었다면 어려웠겠죠. 그런데 실제로 광장에 수 많은 성소수자 당사자와 앨라이들이 자리했고 목소리를 냈잖아요. 그것을 보면서, 성소수자 의제를 더 이상 빼서는 안 되겠구나, 정말 중요한 세력이고 흐름이구나, 성소수자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여성들이 광장을 넓히는 큰 힘이라는 것을 조직운동에서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대중과 운동이 지금 새롭게 만나는 과정인 것 같고, 이것을 어떻게 이어 나갈까,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광장을 열어왔는데, 앞으로도 어떻게 평등의 광장을 이어갈 수 있을까, 고민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퇴진 광장에 '희망을 만드는 법' 동료들과 함께한 박한희 변호사.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

광장에 나선 무지갯빛 시민들은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환대를 경험하고 새로운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시민들 사이를 가르는 날 선 이야기들도 들려왔다. 광장에 함께하고 있는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은 이 흐름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을까. 

혐오와 차별의 언어라는 것은 사실 자신이 겪는 위협에 대한 공포심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들이 이해가 가는 면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실 누군가를 위협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들 역시 위협을 겪고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들이거든요.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젠더론 안 사요' 라는 플로우가 있었잖아요. 그걸 지켜보면서 무척 우울해져서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내 존재가 잘못된 것이고 내가 살아있는 게 저 사람들에게는 민폐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누구도 존재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서로가 실제로 만나보고 이야기해 보면, 성소수자라고 해서, 트랜스젠더라고 해서 다 똑같은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광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가 혐오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고,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한희 남태령 후에 한남동 철야 집회에서 트랜스젠더 당사자분이 발언했을 때도 온라인에 악플들이 있었어요. 오프라인에서도 몇 분이 왜 여기까지 와서 성소수자 이야기를 해야 하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탄핵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정체성이며 혐오며 그런 이야기를 왜 하냐 이런 이야기도 있었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이야기들이 지금 주류의 목소리가 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한 추세인 것 같아요. 당연히 사람이 수십만이 모이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누군가는 성소수자 의제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때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긴 할 텐데, 그게 지금 광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만큼 지금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다양성과 평등, 그리고 이제는 서로 함께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계속해서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성소수자 이야기가 왜 나와야 하냐고 묻는 목소리가 광장의 주류가 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퇴진 집회의 주최 측도 광장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그런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들을 검열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가지 않고, 다양한 의제들을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온라인 공간에서는 마치, 아 역시 또 똑같구나, 역시 성소수자는 여기서도 배척받겠구나, 페미니스트는 배척받겠구나, 여성이라고, 장애인이라고, 성소수자라고 서로 갈라치기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의 광장은 그런 분위기가 주도하거나, 성소수자를 여전히 오면 안 된다고 배척하는 공간이 아닌 것 같아요. 계속해서 당사자들, 활동가들,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발언하고, 자신을 드러내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동기를 잃지 않고, 광장에 한 번 나와봤으면 좋겠어요. 겁이 날 수도 있지만 한번 나와보고, 함께 얘기해 보면 그래도 변화의 바람이 있다고 느낄 거로 생각해요. 그러면서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는 또 하나 당사자들만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게 되게 또 중요한 것 같아요. 앨라이들이 확대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광장에서는 성소수자,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분들도, 나이가 있으신 분들도,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분들도 한결같이 성소수자와 여성, 이주민, 장애인들, 사회적 소수자들이 함께 평등하게 살아가자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내가 이성애자든 중년의 남성이든 소위 권력을 누르는 시스헤테로 남성이든 어쨌든 이 평등의 언어를 같이 배우는 감각들 그게 쌓이고 있다는 것들을 함께 경험하고 감각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트랜스젠더가 여성에게 위협이 된다는 주장들이 트위터 등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퍼지기도 했다. 트랜스젠더 인권과 여성의 인권이 충돌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광장 안과 밖에서 의문을 키워가는 듯하다. 

한희 페미니즘은 성별을 이유로 누군가를 규정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고 생각해요. 성별에 따라 어떤 고정관념을 요구하고 속성을 붙이고 낙인을 찍는 것에 대해서요. 그런 문제들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논리와 거의 완전히 같아요. 물론 몇 가지 더 구체적인 의제로 들어가면 조금씩 부딪치거나 여러 가지 고민해야 하는 점들이 있겠지만 혐오의 근본 원리 똑같거든요. 성별에 따른 낙인과 차별, 배제를 없애자는 요구를 트랜스젠더 인권을 고민하는 이들도 함께하고 있어요. 

저는 같은 억압에 대해서 고민하고 맞서는 방향이나 길은 다를 수 있지만, 결국 목표는 같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저는 함께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 인권이 달성되면 트랜스젠더 인권은 후퇴하고, 트랜스젠더 인권이 달성되면 여성 인권이 후퇴하고, 이런 식으로 고민해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국 억압의 기재가 같기 때문에, 여성 인권이 성장한다면 트랜스젠더 인권도 성장한다고 생각하고, 만약 트랜스젠더 인권이 성장했는데 여성 인권은 후퇴했다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거죠. 여성 해방이 되지 않았는데 트랜스젠더만 해방되었다면 그것은 무언가 뒤틀린 사회가 만들어 진 거예요. 그런 사회가 어떤 건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실패죠. 트랜스젠더 운동에서도 실패예요. 저는 트랜스젠더 운동이 그런 고민을 갖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목표가 같다는 것들을 더 많이 함께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안 트랜스젠더 중에도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맞서 함께 투쟁하고,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에 대해서 공감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 인권과 여성 해방을 위해서 함께 싸우는 트랜스 여성, 트랜스 남성들이 존재하고, 트랜스젠더이면서 페미니스트로서 이분법적 성별 규범과 그로 인한 차별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는 많은 분이 있고요. 

저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 해방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성별이라는 체계 역시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죠. 여성을, 트랜스젠더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적 성별 체계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맞서는 과정에서 우리가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광장 안과 밖에 페미니스트 동지 중에는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분들도 계신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분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함께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거세고, 여성에 대한 억압과 구체적인 폭력들도 여전히 심각한 상황에서, 트랜스젠더라는 존재가 여성의 어떤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인권이라는 것이 어떤 정해진 총량을 쪼개서 나누어 갖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각각 분명히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결국 이 불평등한 세상이 만들어낸 같은 억압을 겪는 이들 사이의 커다란 연대를 통해서 모두의 인권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인권과 트랜스젠더 인권이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함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성중립 화장실 등을 두고 트랜스젠더가 여성의 공간을 빼앗고 여성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들도 나왔다. 

한희 무척 오래 논쟁을 이어온 주제인 것 같아요. 숙명여대 사건(트랜스젠더 여성 합격자가 입학 반대 움직임으로 입학을 취소했던 일)도 그렇고 변희수 하사 때도 그런 논쟁이 있었죠. 논리적으로 팩트 체크를 많이 했었는데 항상 조금 한계를 느끼는 것 같아요. 팩트를 체크하는 접근들은 정말 너무 많이 해왔어요. 계속 기사들도 계속 나오기도 했었고요. 성중립 화장실 운영이 성범죄를 높이지 않는다는 외국의 사례들이라든가, 통계적으로 이건 관계가 없다는 사실들, 안전의 문제라는 게 그렇게 분리와 격리나 누군가에게 한정된 공간을 주는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 안전은 모두의 공간을 활성화해서 함께 익힐 수 있는 방식들을 필요하다는 것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항상 이런 이야기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껴요.  

저는 오히려 좋은 사례를 좀 더 드러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에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이 연대 투쟁 현장에 성중립 화장실을 운영했고, 꼰벤뚜알 수도원에서도 성중립 화장실을 운영했었죠. '모두의 화장실' 하면 항상 여러 이야기가 붙잖아요. 저는 백 마디 말보다 실제로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어서 함께 써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비행기 화장실이나, 우리가 사는 집의 화장실 등 이미 우리가 경험한 '모두의 화장실'이 있어요. 그런데 무언가 낯설고 '별거'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실제로 성중립 화장실이 어떤 것인지 보고, 그곳에서 용변을 해보고, 타인을 마주하고 관계되는 경험을 했을 때 그냥 화장실이구나, 이렇게 이해가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런 사례들이 이번에 만들어진 것 같고, 그게 성소수자 단체가 주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사자 단체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에서, 수도원에서 앨라이로써,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해서 결정을 내린 거잖아요. 이런 사례들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앤 위원장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나,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는 광장에서 소수자 인권과 평등을 왜 요구하냐는 말들도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몸집을 키웠다. 

한희 평등이라는 언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요. 기계적인 평등을 떠올릴 수 있겠죠. 너와 내가 다 개성도 없이 똑같다는 식의. 저는 우리는 다 다를 수 있지만 함께 뭔가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감각을 가지는 게 평등이라고 생각해요. 그러한 평등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요. 

윤석열이 가장 잘못한 건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려고 했다는 것이고, 서로 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맞서서 광장에 나와 윤석열 퇴진을 외치고 있잖아요. 결국은 파괴된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요구이고요. 우리는 적어도 특정 집단이 왕으로서 군림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 집단을 하위 계급으로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끼리도 언젠가는 대화할 수 있고, 지금은 틀어질 수 있지만, 다시 만날 수 있고, 서로 배워갈 수 있다는, 그런 기대를 갖지 않으면은 사회가 성립하지 않죠. 서로 저쪽은 도저히 상종 못 할 집단들이라고 해버리면은 서로 내전 하다 끝나버리겠죠.  

저는 평등과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가 파괴되지 않을 거란 믿음인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그렇게 파괴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지키게 하는 어떤 약속인 것 같아요. 우리는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 대화할 수 있고, 우리는 평등하기에 서로를 파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그런 약속이라고 생각해요. 

차별금지법에 대해 반대하고 혐오를 선동하는 분들은 항상, 이 법이 무언가를 틀어막고 통제하고 말도 못 하게 하고, 처벌하고, 심지어 여대를 없애버릴 거라 이야기들을 해요. 차별금지법의 핵심은 구제 조치나 제재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국가가 평등을 위해서 고민하고 예산을 투자하고 캠페인을 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차별은 좋고 평등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고, 평등은 당연히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통의 감각이 있을 텐데,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가 진짜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죠. 국가가 평등에 대한 책임을 지고 노력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만드는 것이 차별금지법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평등은 결국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법이 제정되고 시행된다고 해서 누구를 잡아 가두고 처벌하고 이렇게 될 건 아니에요. 함께 계속 평등에 관해 토론하고 실현해 나가는 과정들을 만들어 나가는 거죠. 

이제 핵심은 이 광장을 제도가 어떻게 받아들일까의 문제인 것 같아요. 결국 정당 정치가 계속 남아있는 한 정당이 광장을 흡수해서 그것을 제도화하는 방식으로 가게 될 수 있는데, 이번에는 고민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민주당도 광장에 나선 이들이 단순히 민주당이 좋아서, 이재명이 좋아서 여기에 나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 평등을 파괴했던 윤석열에 대한 비판으로 나왔던 거고, 이 사람들은 무조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평등을 다시 실현하지 않으면 언제고 비판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탄핵당하면 끝,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갑시다, 그렇게 되면 문재인 정권 때부터의 과오들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겠죠. 그런 일이 없도록 정말 이제 광장이 요구했던 그 평등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의 최소한이 차별금지법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평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고, 최소한의 장치로 합의할 수 있고, 공통의 의지를 담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차별금지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정말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 다시 핑계를 대면서 다음 총선 어쩌고 이런 이야기 하지 말고. 그런 고민이 듭니다. 

윤석열 퇴진과 함께 모두의 평등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 날 선 의문들을 사이에서 서로 다른 타인들이 어떻게 우리로서 함께 연대하고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광장 안과 밖의 서로에게 어떤 마음들을 전할 수 있을까.  

이안 '우리' 안에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죠. 예전엔 알지 못했고 이름도 없던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단지 낯설고 잘 모른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겠다는 마음들이 분명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가장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연대란 거기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위해 한 곳에 모여 깃발을 흔들고 구호를 외쳤던 순간을 기억해요. 그 기억들이 그날로 끝이 아니라 앞으로도 시민으로서 민주적인 권리를 지켜내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퀴어 분이 현장에서 큰 응원과 용기를 얻었다고 전해 들었어요. 그것이 단지 광장에서 그치지 않고 오늘을, 또 내일을 살아갈 힘이 되길 바라고, 나 외의 다른 동료 시민들을 지키고 연대하는 힘이 되길 바라요. 

한희 저는 미래를 알 수는 없고 또 성공을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다시 문재인 시대의 실패와 같은 감각을 마주할 수도 있겠죠. 저는 그런데 분명히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그때의 경험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도록 두지 않을 것 같아요. 제 개인에게 있어서도요. 사실 만 명 앞에서 커밍아웃하는 경험을 솔직히 누가 해보겠어요(웃음). 만 명의 사람 중 저를 아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부모님의 친구분도 있을지 모르고, 누군가 보고 너 뭐야, 이런 식의 반응을 할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그렇게 많은 이들 앞에서 내가 성소수자라고 밝혔을 때, 박수를 받았던 경험을 가진 적어도 그 몇 명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 그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나눈 사람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저는 우리가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그냥 흩어지지 않고, 그런 경험과 이야기들을 모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희망을 함께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중국 동포의 자녀이고, 여성이고, 이주민이고, 장애인인 시민들이 광장에서 이야기하고 이들이 티브이에서만 보던 어떤 이질적인 존재나 나와 너무나 다른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감각할 수 있는 경험을 지금 광장이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농민들, 투쟁하는 노동자들, 민주노총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과격하게 맨날 파이프 들고 싸우는 아저씨들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우리와 함께 싸우는 든든한 이들이라는 감각이 생겼잖아요. 이 감각들을 함께 기억하고 키우고 나누어 가면 좋겠어요. 

같은 정체성을 중심으로 뭉쳐서 자기 해방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이 요즘의 어떤 트렌드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저는 저마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억압들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억압들이 사실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틀에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틀은 소수의 무위도식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아닐지 생각하고요. 우리가 서로가 겪는 억압의 연결고리들을 함께 고민하고, 그것에 맞서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시국선언 현장에서 이안 활동가.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

우리가 된 서로는 윤석열 퇴진과 함께 어떤 사회를 꿈꾸고 구현할 수 있을까. 

한희 저는 혐오를 방치했기 때문에 결국 윤석열 같은 괴물이 만들어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윤석열 하나를 없애는 것이 정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석열을 만든 건 결국 쌓이고 쌓인 혐오와 배제예요. 전광훈을 비롯한 극우 세력이 반동성애, 이주민 혐오를 선동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만들어온 결과물이 윤석열 정권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회복은 사실 극우 집단에 맞선 어떤 대처가 돼야 한다고 봐요. 

유럽에서도 미국의 트럼프도, 항상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흐름이 그렇게 시작되잖아요. 저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소수자를 배제하는, 그것을 양식으로 삼는 어떤 정치집단을 더 이상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과 정치권이 다 느꼈으면 좋겠어요. 

일단은 부서진 것들을 다시 세워야  것 같아요. 너무 많은 것들이 부서진 것 같아요. 인권위원회가 저는 대표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인권위를 비롯한 그동안에 망가졌던 기구들과 제도들을 다시 회복하는게 필요하고요. 

그런데 그 회복이라는 것이 윤석열 이전에 문재인 정권 때의 수준을 다시 회복시키자, 그런 것이면 절대로 안 될 것 같아요. 무엇을 실패해 왔는가를 잘 분석해야겠죠. 문재인 정권 때에도 사실 혐오 정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차별금지법도 만들지 못했죠. 

우리가 윤석열 퇴진과 함께 무너진 것들을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다시 세운다고 한다면, 그때와는 달라야 할 것 같아요. 

민주주의에서도 우리 헌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평등과 존엄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실현할 수 있는 제도는 무엇인가를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고민할 수 있었으면 해요. 그것을 정당인 몇 명에게, 정당에, 새로운 대통령에게 맡겨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과 민주주의에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 끝없이 들리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요. 지금의 광장이 윤석열을 퇴진시키고 나서, 우리 성공했어요 하고 다 집으로 가서 우리는 그럼 이제 다시 각자 일을 하고, 새로운 대통령이 사회를 바꿔주길 기다립시다, 이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우리가 계속 광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을 사람들이 계속 가져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요.  

이안 구체적인 제도적 변화로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먼저 떠올라요. 혼인 평등을 위한 법 제도 개선도요. 그런 명시적인 부분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어떤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는지 마음에서 그려보면, 지금 우리 광장의 모습 같은 것을 계속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곳곳에서 시민들이 계속 서로의 삶에 관심을 두고 크고 작은 광장을 만들고 서로의 투쟁에 연대를 하는 모습들이 그려져요. 어떤 집단의, 좁은 범위와 경계들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함께 계속 서로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루뭉술한 말일 수 있지만, 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친절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이들이 마음의 여유를, 물질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바라요. 서로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 단순히 받아들여지냐 마냐가 아니라, 더 좋은 결론을 위해서 같이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고요. 

새로운 한 해, 고민과 바람이 있다면 무엇일까. 

이안 작년부터 동료들과 트랜스젠더 친화적인 환경을 만드는 캠페인 프로젝트를 해왔어요. 성 해방을 위한 아름다운 공간들을 만들어가기 위해 고민하는 한 해가 될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는데, 퀴어로써 항상 새로운 공간을 찾을 때마다 여러 기대와 불안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작년에 밴드를 결성해서 연습하다, 바로 어제 해체를 했어요. 다시 멤버를 모아서 올해 안에 데뷔하고 싶어요. 그리고 너무나 많은 이들을 억압하고 있는 이 사회의 틀을 공부하고, 그에 맞서 연대할 힘들을 모아가는 과정에 힘을 보태고 싶어요.  

한희 제 동료들도 그렇고, 정말 애쓰는 사람이 많거든요. 함께 그냥 웃으면서 축하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다 같이, 아! 우리가 해냈다! 라는 감각을 갖고, 아! 우리가 있어서 해냈다! 라는 감각을 갖고, 함께 파티하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정말 하루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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