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나의 소중한 친구였던 롤라 모지스(Lola Mozes)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10년 전 그의 이야기를 썼다.
출처: Unsplash, Karsten Winegeart
브루클린, 뉴욕 —
롤라 모지스의 어린 시절은 1939년 가을, 폴란드의 한 작은 다리 위에서 끝이 났다. 그는 아홉 살이었다. 말이 끄는 마차에 앉아 있었고, 등에는 가족의 은제 안식일 촛대가 담긴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그때 롤라는 독일군의 폭격이 지나간 참혹한 흔적을 보았다. 사람들의 시신, 배가 갈라진 채 고통 속에서 헐떡이며 벌떡 일어서려 애쓰는 말들의 모습은 어린 그를 눈물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어머니 헬레나 레비츠(Helena Rewitz, 결혼 전 성은 슈비머)는 공포에 질린 아이를 품에 안았다. 어머니는 이후 유대인 게토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도 마치 수호천사처럼 딸 곁을 지켰다.
나는 지난 금요일 브루클린에서 롤라 모지스의 식탁 앞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작고 아담한 체구에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흰 금빛 후프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웃음은 부드럽고 전염성이 있었으며, 장난기 어린 유머 감각과 섬세한 얼굴선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의 매력과 따뜻함은 소녀 같고, 약간은 요조숙녀다운 기품이 섞여 있었다.
“나는 위대한 거짓말쟁이예요.” 롤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겪은 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어요. 그것이 나를 괴롭혀요. 머릿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돼요.”
롤라는 폴란드 남서부의 도시 카토비체에 있는 가족의 작은 식료품점 옆집에서 자랐다. 집안에서 쓰는 언어는 독일어였고, 학교에서는 폴란드어를 배웠다. 부모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면 주로 이디시어를 썼다. 그의 가족은 안식일을 지키고 유대교 명절에는 회당에 갔지만, 생활 방식은 세속적인 유대인들이었다.
아버지 에밀(Emil)은 아침에 목욕을 하며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곤 했고, 외출할 때는 독일산 양복과 스패츠(신사용 장식 덧신)를 신었다. 그들은 도시의 노동자 계층 지역에 살았다. 동네의 가톨릭 아이들은 그를 “그리스도를 죽인 자”라며 놀렸고, 한 번은 오빠 오스카(Oskar)를 전차에서 밀어내 구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도 이후 다가올 공포를 준비시켜주지는 못했다. 부모가 라디오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들으며 얼굴을 찡그릴 때만이, 어렴풋이 어두운 미래가 스쳐 지나갔다.
다리 위의 피비린내 나는 광경은 이후 6년간 이어질 대규모 학살과 극심한 결핍의 도가니를 예고한 것이었다. 롤라에게 인형놀이, 스케이트, 수영, 아버지 가게에서 사탕을 고르던 시간은 잔혹한 생존 투쟁으로 바뀌었다. 게토에서 만난 술 취한 SS 장교 — 희생자들의 피로 신발이 더럽혀졌다고 투덜거리며 어린 롤라를 무릎에 앉히던 자, 심지어 벽에 갓난아이들을 내던지던 그 괴물 — 는 마치 중세의 악몽 속 괴물처럼 그의 앞에 나타났다. 죽음과 생명의 동심원들이 그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번져갔다. 부모의 치열한 사랑조차 무장한 권력자들의 살의 앞에서는 종종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가족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1941년, 롤라의 가족은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폴란드 남부 라바 강가의 보흐니아 게토로 몰려들었다. 게토는 높은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고, A구역과 B구역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A구역에는 독일군을 위해 구두, 속옷, 군복, 장갑, 양말 등 각종 물품을 만드는 공장과 작업장에서 일하는 약 2,000명의 유대인들이 살았다. 반면 B구역에는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노인과 병자도 많았다. 그들은 극심한 가난과 영양실조 속에 살았다. 많은 유대인들은 가진 것을 조금씩 모아 공동 부엌을 꾸렸다. 독일군은 밤마다 남자들 — 남편과 아버지들 — 을 여자들과 떼어놓았다. 롤라와 가족은 전쟁 전에는 부유했던 이모의 큰 목조 주택에서 함께 살았다. 그 집은 게토 경계 안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이 우리에게 집에 있으라고 했어요.” 롤라는 말했다.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창문 틈으로 내다보니, 소금 광산에서 일하던 젊고 건장한 남자들이 행진하고 있었어요. 열 번째나 다섯 번째 되는 남자마다 총에 맞아 쓰러졌죠. 아침이 되자 이상한 냄새가 났어요. 속이 울렁거렸죠. 커튼 사이로 다시 내다보니 시신을 실은 마차들이 지나가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옷이 벗겨져 있었고, 도랑에는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어요. 그다음 날 우리는 다시 일하러 나갔어요. 12시간 교대 근무였죠. 새벽 근무를 나설 땐 아직 어두웠어요. 비가 오던 날이었죠. 친구와 함께 걸어가며 빵을 들고 있었는데, 그만 땅에 떨어뜨렸어요. 친구가 ‘피 속에 떨어졌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그 말을 너무 웃기다고 생각해서 깔깔 웃었죠. 빵을 주워서 집에 가져왔고, 일을 마친 뒤 그걸 먹었어요. 버리기엔 너무 귀했거든요.”
롤라에게는 게토 B구역에 살던 다정한 소년 친구가 있었다. 그는 신문 조각을 잘라 작은 책을 만들어 그에게 빌려주곤 했다. 그 책은 7세기 랍비 사바타이 체비(Sabbatai Zevi) — 자신이 유대인의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마을에서 마을로 다니며 구원을 약속했던 인물 — 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자기 집으로 데려갔어요.” 롤라는 말했다. “오두막처럼 보였어요. 바닥엔 헝겊이 깔려 있었고, 더럽고 냄새가 지독했죠. 늙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는 정말 착한 아이였어요. 내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데서 살 수 있지?’라고 말했더니, 그는 너무 창피해했어요. 그 얼굴을 평생 잊지 못해요. 전에 그가 우리 이모의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각 가족이 방 하나씩 있었고, 집은 깨끗했고 난로도 있어서 따뜻했죠.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요. B구역 사람들은 (수용소로 가는) 첫 번째 이송 대상이었거든요.”
롤라의 아버지는 톱밥으로 가득 찬 나무 헛간 안에 작은 지하 은신처를 만들었다. 1942년 강제 이송이 시작되자 가족은 그 은신처로 숨어들었다. 몸을 웅크리고 간신히 함께 있을 만큼의 공간뿐이었다. 독일군과 그들의 개들이 헛간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면 숨조차 죽인 채 기다려야 했다. 밤이 되면 아버지는 몰래 밖으로 나가 음식을 구했다.
유대인들은 경비의 감시 없이는 게토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독일군은 그들을 다섯 명씩 줄 세워 공장으로 데려가 일을 시켰다. 점령지 폴란드의 총독 한스 프랑크(Hans Frank) 는 게토 밖에서 발견된 유대인은 즉시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게토 안의 약 2,000명이 총살당했고, 대부분은 질병이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전쟁이 끝난 뒤, 보흐니아 게토에 있던 1만5천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90명뿐이었다.
롤라의 아버지와 오빠는 독일 사무실 청소 일을 했다. 롤라와 어머니는 플로리스 거리의 붉은 벽돌 건물 안에서 독일군을 위한 양말을 짰다.
“러시아 전선에서 온 양말이 우리에게 도착했어요.” 그가 말했다. “공장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세탁되어 있었어요. 밑부분이 잘려 있었고, 윗부분만 남아 있었죠. 우리는 거기서부터 아래로 짜 내려가 새 양말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가끔 양말 속에서 피, 발가락, 살점이 나왔어요. 그걸 보고 독일군이 어딘가에서 얼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았죠.”
어느 날, 뜨개질 공장의 유대인 감독관이 그에게 남성용 장갑 한 켤레를 떠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회색 양털을 건넸다. 몇 주 후, 고위 나치 장교들이 공장을 방문했다. 그중에는 총독 한스 프랑크(Hans Frank)도 있었다. 감독관은 롤라를 그에게 소개했다.
“그는 그 장갑을 끼고 있었어요.” 롤라는 기억했다. “내 손을 잡고 흔들었죠.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이 장갑 덕분에 손이 아주 따뜻하구나. 꼭 맞아. 고맙다.’ 그날 저녁, 아버지가 일에서 돌아왔어요. 웃음이 가득했죠. 사람들이 모두 그의 손을 잡고 축하했다고 했어요. ‘프랑크가 당신 딸의 손을 잡았으니, 이제 유대인들이 구원받을 거요’라고들 했대요. 우리는 우리가 그들을 만족시킨다면 살려줄 거라고 믿었죠.”
1년 전, 롤라는 우연히 프랑크의 사진을 보았다. 그제야 알았다. 전쟁 후 그가 뉘른베르크에서 연합군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그는 처형 직전에 자신의 죄를 참회한, 드문 나치 중 한 명이었다.
그 사진과 소식은 롤라에게 충격이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울었어요.” 그가 말했다. “왜 그런지 몰라요. 나에게 아버지처럼 미소 짓고 손을 잡고 고마워하던 그 사람을, 교수대에 매달린 시신으로 연결할 수가 없었어요.”
게토 안에서 롤라의 부모는 오빠 오스카(두 살 반 연상)가 랍비에게 공부를 배우게 했다.
“오빠는 그 랍비 덕분에 아주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어요.” 롤라가 말했다.
“그땐 14살쯤이었죠. 성경에 ‘자선을 베풀라’고 쓰여 있다며 누구에게나 친절했어요. 엄마가 감자를 좀 얻어 와서 껍질을 벗기며 ‘퇴근하면 감자를 삶을 거야’라고 하셨죠. 그런데 가끔 집에 돌아오면 감자가 사라졌어요. 오빠가 가난한 가족에게 나눠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먹을 게 없었죠. 하루는 오빠가 나무신을 신고 왔어요. ‘신발은 어디 있니?’ 하고 물었더니, 맨발인 사람에게 줬다고 했어요. 오빠는 그렇게 변했어요. 수도승 같았어요.”
한 번은 대규모 강제 이송이 벌어지던 중, 톱밥 더미 밑에 숨어 있던 롤라가 오빠 쪽으로 기어갔다. “우리는 대화를 나눴어요.” 롤라가 말했다. “처음으로 진짜 이야기를 했죠. 오빠가 빵 한 조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가 말했어요. ‘난 배고프지 않아.’”
롤라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눈물이 흘렀다.
“그건 정말 힘들어요.” 그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빵 조각을 나에게 줬어요. 껍질 부분이었어요. 우리는 양떼처럼 순순히 죽지 않았어요. 살았어요. 은신처를 빠져나올 때 오빠가 옷을 입는 걸 봤어요. 배가 굶주림으로 부풀어 있었죠.”
1943년, 공장과 작업장은 모두 문을 닫았다. 게토의 넓은 구역이 비워졌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처형되었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밤마다 은신처를 빠져나와, 텅 빈 거리와 버려진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찾았다. 도시는 유령 마을 같았다. 게토의 울타리는 다시 세워지고 있었고, 비워진 구역은 비유대인들에게 넘기기 위해 안쪽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과 이모의 네 식구, 그리고 사촌 두 명을 데리고 게토의 버려진 지역 지하실로 옮기기로 했다. 그는 어두워지면 다섯 명씩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먼저 롤라, 어머니, 이모, 어린 사촌을 데려다 놓고, 아들과 조카들을 데리러 다시 나갔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롤라가 말했다. “유대인 경찰에게 붙잡혔대요. 그날은 초막절이었어요. 엄마와 이모는 지하실에서 초를 켰어요. 우리는 더 깊은 지하실을 찾아 들어갔어요. 그 집 다락에는 한 정통파 유대인이 숨어 있었어요. 그가 우리를 찾아왔죠.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갈 거라고 했어요.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조금은 위로가 되었어요. 사촌과 나는 밤에 몰래 나가 채소밭을 파헤쳐 먹을 것을 찾았어요. 우물도 있었지만, 물을 길으면 소리가 났어요. 위험했죠. 개 짖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느 아침, 담장을 막대기로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렸어요.” 그가 말했다. “엄마는 몸을 굽혔어요. 알고 있었죠. 사람들이 총살당하고 있었어요. 다락의 남자가 손짓으로 총 쏘는 흉내를 냈어요. 그다음에 노래 소리가 들렸어요. ‘셰마 이스라엘(Shema Yisrael)’이었어요.”
그는 유대인의 기도문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셰마 이스라엘을 히브리어로 낮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길지어다.”
“그때 200명쯤이 함께 ‘셰마 이스라엘’을 부르고 있었어요. 그들 중에는 아버지와 오빠도 있었죠. 모두 죽음으로 가고 있었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때는 총성이 아버지와 오빠, 사촌들을 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곧 총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엄마는 나를 꽉 껴안았어요.”
롤라는 1981년에 네 자녀에게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이것이 내 이야기의 핵심이야. 나는 내 아이들이 죄책감이나 후회 없이, 마치 양처럼 도살당한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수치심 없이 건강하게 자라고 번성하길 바라. ‘엘리 엘리(Eli Eli)’나 ‘아베 마리아(Ave Maria)’ 같은 어떤 노래도 내 아버지, 오빠, 사촌들, 그리고 수백 명이 총살장으로 끌려가며 불렀던 그 노래를 능가하지 못할 거야. 그것은 가장 강렬하고, 가장 용감하며, 가장 승리의 찬가였지. 그들의 목소리는 양처럼 떨리지 않았어. 그들의 목소리는 악을 넘어서는 승리를 이야기했단다. 타인의 피를 묻히지 않은 채, 인간으로서 당당히 죽음으로 맞서며.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 되어 주님을 찬양했어. 그 속에는 이미 주님과 하나가 된 듯한 위엄이 깃들어 있었지.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듯했어 —‘셰마 이스라엘, 들으라, 오 이스라엘이여, 내가 너희를 고통에서 이끌어 내리니, 너희는 다시 번성하리라.’ 이것이 내가 받은 메시지였어. 그 노래는 아버지가 나를 위해 불러준 거야. 나는 번성했고, 내 아이들도 그러하길 바라.
내 사랑하는, 소중한 아이들아. 너희가 매일 부딪히는 문제들 — 그것을 해결하려 그렇게 애쓰는 너희의 고뇌는 조상들의 경이로운 과거 앞에서는 보잘것없다고 들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란다. 인생은 고난과 기쁨, 슬픔과 완전한 행복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러나 다른 이를 상처 입히는 비열함으로 너희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는 한, 너희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렴. 너희의 삶은 이미 떠나간 이들의 연장선 위에 있어. 그리고 이제 그들은 불멸이 되었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마. 그들은 평화롭게 떠났어. 미래, 곧 너희의 현재를 희망하며. 아버지의 장엄한 찬가는 너희와 너희 자손을 위한 것이기도 했어. 모든 사랑을 담아, 너희 엄마가.”
독일군은 롤라, 그의 어머니, 이모, 사촌을 지하실에서 찾아냈다. 그들은 체포되었고, 은신은 사형에 해당했기에 총살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롤라를 품에 안고 말했다. “우린 이제 에덴동산으로 가는 거야. 이미 떠난 가족들을 만나러.” 그러나 그들은 기적적으로 살았다. 게토의 잔해를 정리하기 위해 남겨진 마지막 100명의 유대인 노동반에 배정된 것이다. 어머니는 세탁소에서 일하다가 아들 오스카의 셔츠를 발견했다. 그것은 생명이 끊긴 그의 몸에서 잘려나온 것으로 보였다. 그 무렵 게토의 지휘관 요제프 뮐러(Josef Müller)는 유대인 애인을 두고 있었다 — 이것은 게토 지휘관과 수용소 간수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었다. 남은 유대인들은 그를 ‘마타 하리(Mata Hari)’ 라고 불렀다.
“마타 하리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키가 크고 우아했죠.” 롤라가 말했다. “세련된 옷차림에 화장도 했어요. 남편과, 나와 같은 나이의 딸이 있었죠. 그는 나를 부려먹었어요. 나는 그의 방을 청소해야 했어요.”
이후 롤라와 어머니는 플라슈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은 크라쿠프 남쪽 교외에 있었고, 잔혹한 SS 장교 아몬 괴트(Amon Göth) 가 지휘했다. 그는 죄수들을 단순한 ‘오락’ 삼아 총으로 쏘아 죽였으며, 1993년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에서 묘사된 바로 그 인물이다. 괴트는 전쟁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롤라와 그의 어머니는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유대인 묘지를 파내는 일에 동원되었다. 묘비들은 도로를 포장하거나 화장실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플라슈프에서 두 달을 보낸 뒤, 그들은 피온키 근처 숲 속에 숨겨진 군수 공장으로 보내져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롤라는 탈출을 시도한 네다섯 명의 유대인이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을 강제로 보아야 했다. 어머니는 롤라가 그 처참한 광경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해 행렬의 맨 앞자리에 서서 대신 그것을 보았다.
“그들은 침착하고 의연했어요.” 롤라는 처형된 이들에 대해 말했다. “그들의 손은 등 뒤로 묶여 있었어요. 그들이 죽기 전에 무언가를 말했지만, 기억나지 않아요. 우리는 교수형을 보라고 명령받았어요. 고개를 돌릴 수 없었죠. 바라보는 동안,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죽음인지 알 수 있었어요 — 정말로 생명이 몸에서 짜내지듯 빠져나가는 게 보였어요. 얼굴은 보라색, 붉은색으로 변하고, 거의 부풀어 오르며, 매달린 몸은 마지막 저항처럼 경련했죠. 그 남자 중 한 사람의 아내는 임신한 배를 안고 교수대 곁에 서 있었어요. 독일군은 그 시체들을 일주일 내내 전시했어요.”
결국 롤라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다. 기차로의 여정은 사흘이 걸렸다. 그는 어머니, 이모, 사촌과 함께 기차에서 비틀거리며 내린 뒤, 물을 마시기 위해 도랑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수년 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를 다시 찾아가 그 도랑을 찾았다. 롤라는 말했다. 수용소가 더 이상 여위어 뼈만 남은 시신들, 악취, 공포, 총격, 개 짖는 소리, 구타, 화장터의 연기, 간수들의 고함, 사람들로 가득 찬 막사, 그리고 악취 나는 넘쳐흐르는 화장실들로 가득 차 있지 않은 지금의 모습은, 그곳의 현실을 결코 전달하지 못한다고. “그곳은 갈아엎고, 밭을 만들어야 해요.”
“기차에서 내렸을 때 나는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는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를 회상했다. “어머니는 나를 놀라게 했어요. 마치 유령을 보는 것 같았죠. 얼굴이 핼쑥했고, 눈은 크고 둥글었어요.”
그들은 머리카락이 밀리고 DDT가 뿌려진 뒤 문신을 새기고, C 구역에 격리되었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난쟁이들의 한 무리를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롤라가 말했다. “나는 그들과 놀고 싶었어요. 인형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틀이나 사흘쯤 지나자 그들은 모두 사라졌어요.”
그와 어머니는 약 8개월 동안 비르케나우에서 일했다. 어느 날 그들은 옷이 모두 벗겨진 채, 다른 여성들과 함께 가스실로 몰려 들어갔다. 그러나 처형은 갑자기 취소되었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직전, 롤라는 마지막 빵 한 조각을 달라고 어머니에게 애원했다. “나는 ‘배고픈 채로 죽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어요.” 그가 회상했다. “엄마가 말했죠. ‘우리가 나올 때, 네가 나에게 배고프다고 말할 거야.’ 나는 ‘상관없어요’라고 했어요. 그러자 엄마는 나에게 빵을 주셨어요. 우리가 가스실에서 살아서 나왔을 때,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거 봐, 내가 뭐랬어.’” 그 후 여성들은 비행기 문이 밀폐되도록 사용하는 고무 천을 꼬아 끈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다.
“두 명의 경비병이 그 끈의 양쪽 끝을 잡아당겼어요. 끈이 끊어지면, 일하던 사람은 맞았어요. 자주. 죽을 때까지.” 그가 말했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점령지 폴란드로 진격해 오자 나치 경비병들은 화장터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폭파하겠다고 말하고, 약 6만 명의 수감자들에게 눈 덮인 길을 따라 35마일 떨어진 화물열차 집결지까지 행군하라고 명령했다. 그 행군 중 1만 5천 명이 죽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롤라의 이모와 사촌은 시체 더미 밑에 숨어 있었다. 롤라와 어머니는 행군에 나서기 직전, 막사 안에서 순무를 발견하고 배불리 먹었다. 그 순무 때문에 어머니는 설사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옷의 한 조각을 찢어 나에게 주며 아주 부끄러운 듯 물으셨어요. ‘좀 씻겨줄 수 있겠니?’ 그때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수용소를 폭파할 거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떠나야 한다고. 나는 행군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우리는 밤새 걸었어요. 우리 고향 카토비체를 지나면서 불빛을 봤어요.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어지럽다고 하셨어요. 조금만 설탕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눈을 주워먹을 수도 없었어요. 몸을 굽히면 그들은 쏘았으니까요. 길 양쪽에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눈을 조금만 달라고 하셨어요. 나는 재빨리 몸을 굽혀 눈을 집었어요. 주변의 여자들이 잠시 어머니를 부축해 주었어요. 그들은 함께 걸었지만, 곧 어머니는 더 이상 걷지 못했어요. 나무 한 그루 아래에 누워서 말씀하셨어요. ‘어서 가. 어쩌면 너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그때 독일군 한 명이 나타났어요. 나는 그와 싸웠어요. ‘당신도 어머니가 있잖아요. 어머니가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알잖아요. 조금만 쉬게 해 주세요. 그러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미소를 지었어요. 나는 그 기이한 미소를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무언가가 그를 즐겁게 한 듯했어요. 그때 이미 그의 권총은 꺼내져 있었죠. 병사들이 나를 때리고 밀어냈어요. 그는 어머니를 쐈어요. 나는 다시 길 위에 있었어요. 어느 순간 내 작은 자루가 떨어졌어요. 나는 그것을 주웠어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넌 자루는 주웠지만, 어머니는 주워 오지 못했구나.’ 수년이 지나, 어머니의 죽음 장면을 다시 떠올릴 때면 그 나무 아래에 누워 팔을 약간 벌리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롤라는 화물열차 집결지에 도착했고, 열린 짐칸에 실렸다. 그는 독일 북부의 여성 수용소 라벤스브뤼크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다시 기차를 타고 말호프 수용소로 보내졌다. 연합군이 말호프 근처로 다가오자, 독일군은 수용소를 폐쇄했다. 곧 롤라는 또다시 행군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다 경비병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들판에 부풀어 시커멓게 변한 병사들의 시체들을 기억했다. 어느 아침, 그와 다른 수감자들은 민간인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수용소 지휘관을 보았다. 전쟁은 끝났다.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 어딘가, 우리 행성에서 발산된 빛이 닿기까지 수십 년이 걸리는 은하와 별들 사이 어딘가에 한 소녀의 가느다란 영상이 떠다니고 있다. 폴란드 카토비체 마을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던 소녀의 모습, 폭격당한 다리 근처에서 공포에 질려 어머니 품에 안긴 소녀의 모습, 톱밥더미 속에 오빠와 함께 숨으며 빵 한 조각을 건네받는 소녀의 모습, 폴란드 총독이던 나치의 손을 잡는 소녀의 모습, 그리고 지하실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죽음을 앞둔 남녀들이 “셰마 이스라엘”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 소녀의 모습. 그리고 또 있다. 권총을 꺼낸 독일군 병사에게 “당신도 어머니가 있잖아요.”라고 말하던 그 소녀의 모습. “나는 하나님과 천국을 믿어요.”
롤라가 말했다. “세상을 떠난 남편, 그리고 부모님과 이야기하죠. 그 믿음이 나를 벽이나 허공과 대화하지 않게 구해줘요.”
나는 이 이야기를 독일인은 나쁘고 유대인은 선하다고 말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든 인간의 마음을 가로지른다. 비극적으로도, 인간이 희생자가 되듯 쉽게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전쟁이 남긴 가장 냉혹한 교훈이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생존자이기도 했던 프리모 레비 같은 홀로코스트의 위대한 작가들이 바로 그것을 이해했다. 결국 유대인 게토 경찰(Jüdische Ghetto-Polizei), 유대인 카포(Kapos), 유덴라트(Judenräte), 손더코만도(Sonderkommandos), 그리고 블록엘테스테(Blockälteste)들이 있었고, 그들의 협력은 게토와 죽음의 수용소가 계속 가동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SS의 도덕적 타락에 스스로 몸을 내맡긴 이들은 결국 자신을 잃었다.
나는 이 글을, 홀로코스트 이후 선함이 승리했다고 말하기 위해 쓴 것도 아니다. 나치가 1200만 명을, 그중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비극적이며 부조리한 생명의 낭비였다. 이 글을 쓴 이유는 단 하나 — 부모의 치열하고 보호적인 사랑이 증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 사랑은 악을 이겨낼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롤라는 스페인에서 한 젊은 독일 남성을 만났다. “그는 어쩌면 군인이었을지도 몰라요.” 그가 말했다. 그는 롤라에게 전쟁 중의 경험을 물었다. 롤라는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작별 인사로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시간과 빛이 공간 속에서 구부러지고 뒤틀리며, 어쩌면 알려진 물리 법칙조차 거스르는 그곳 어딘가에서, 딸과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싸운 한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전히 미세한 빛의 입자 속에 존재한다. 그들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내어주었다. 정신적·육체적 상처로 깊이 새겨진 그, 롤라는 내 앞에서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자신의 수용소 문신 번호, A-14989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생존자와 결혼하여 자신의 네 아이를 낳고, 사랑하고, 돌보며 키웠다. 에밀 레비츠와 헬레나 레비츠는 적어도 이 브루클린의 작은 집 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출처] "You Have a Mother"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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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로, 15년 동안 뉴욕타임스의 해외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중동 지국장과 발칸 지국장을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