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이른바 ‘주류’ 경제학, 즉 오늘날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유일한 형태의 경제학이 자본주의의 현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주류’ 경제학이 현재의 형태뿐 아니라 앞으로 어떤 새로운 형태를 취하더라도 자본주의의 현실을 포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렵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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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산이든 여러 개인의 집단적 행동이 필요하다. 부족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멧돼지를 사냥하는 경우든, 현대 자본주의 공장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는 경우든,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하며, 이 계획의 실현에는 집단적 행동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집단적 행동에는 규율이 필요하다. 과거 대부분의 생산양식에서는 이 규율이 직접적인 강제를 통해 부과되었다. 함께 일하던 노예들 가운데 일부가 일을 게을리해 함께하던 일이 중단되면, 그 노예들은 노예 소유주의 대리인에게 물리적 처벌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봉건제에서도 영주의 토지에서 일하던 농노들이 수확 과정에서 계획에 따른 행동을 하지 않아 작물 일부가 망가지면, 뒤처졌다고 지목된 농노들은 매질을 당했다.
요컨대 생산에는 계획에 따른 집단적 행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생산수단이 공동 소유가 아닌 사회, 다시 말해 소유자와 노동자가 구분되어 있고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집단적 행동 계획에 따를 동기를 갖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들을 따르게 할 어떤 강제 수단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계급으로 분열한 사회임에도 노골적인 강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자본가들이 때때로 물리적 강제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 체제의 일반적인 작동 방식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노동 규율은 어떻게 유지되며, 노동자들은 어떻게 집단적 행동 계획에 따르게 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한 답은 폴란드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미하우 카레츠키(Michał Kalecki)가 말한 ‘해고의 위협’(threat of the sack)이다. 일을 게을리한다고 판단되어 집단적인 행동 계획을 어지럽히는 사람은 바로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즉 그 사람은 체제 내부에서의 지위를 잃고 체제 바깥으로 밀려난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생산에 필수적인 노동 규율을 강제하기 위해 반드시 ‘안’과 ‘밖’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노예를 굶기거나 농노를 때리는 것과 같은 노골적 물리적 강제는 없지만, 그에 상응하는 암묵적 강제가 노동자들에게 부과된다. 이 암묵적 강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암묵적 강제가 작동하려면, 체제 ‘바깥’에 삶의 조건이 극도로 열악한 공간이 존재해야 하며, 자본주의 체제 안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그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전체는 두 영역, 즉 ‘안쪽’ 영역과 ‘바깥쪽’ 영역으로 구성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이 ‘바깥’ 영역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로서 ‘산업예비군’(reserve army of labour)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오직 마르크스주의 뿐이다.
심지어 많은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조차 이 점을 충분히 보지 못한다. 그들은 산업예비군을 자본주의에서 실질임금이 역사적으로 규정된 생계 수준에 묶여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요소로만 본다. 즉, 리카도 체계에서 맬서스 인구론이 수행했던 역할과 동일한 역할로만 이해한다. 리카도에 따르면, 맬서스는 임금이 생계 수준을 웃돌면 노동자들이 빠르게 번식해 노동 공급이 늘어나고, 그 결과 임금이 다시 생계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인류에 대한 악의적 왜곡’이라며 맬서스 이론을 거부했고, 대신 실질임금을 생계 수준에 묶어두는 산업예비군 개념을 제시했다고 흔히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를 불완전하게 읽은 것이다. 산업예비군이 실질임금을 역사적으로 주어진 생계 수준으로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역할은 아니다. 산업예비군이 없다면 자본주의에서 노동 규율은 유지될 수 없고,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현대의 ‘주류’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시장이 자유롭게 작동하기만 하면 모든 ‘생산요소’가 완전고용되는 자기완결적 체제로 본다.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케인스주의 전통 같은 비주류 전통조차도, 국가가 시장을 보완하면 자본주의라는 자기완결적 체제 안에서 모든 생산요소의 완전고용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현재 존재하는 비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의 정통·비정통 전통 모두는 자본주의의 ‘안쪽’만 볼 뿐, ‘바깥쪽’을 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들은 대규모의 실업자·불완전취업자·위장실업자가 존재하는 ‘바깥’ 영역이 왜 필수적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바로 이 영역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공포가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규율에 대한 복종을 주입하며, 이것이 자본주의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과 그 비주류 비판 이론들조차 이 ‘바깥’ 영역의 필연성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생산을 그 자체로 분석하지 않고 교환의 연장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이들의 초점은 시장이 매개하는 교환 과정에 있으며, 분석은 거기서 멈춘다. 자본가가 시장에서 원자재와 노동력을 구매한 뒤 공장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따라서 이들의 분석은 모든 생산이 장인 생산이고, 각 장인이 자기 노동만 사용하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의 세계를 벗어나 실제 자본주의 경제를 다룰 경우, 주류 경제학은 물론 케인스주의처럼 통찰력 있는 비판 이론들조차 명백히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생산과 실질임금 억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가격수용자(price-taker, 협상력이 없는 존재)로 남도록 만드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즉, 실질임금이 잠식되고 있음에도 더 높은 명목임금을 요구하고 관철할 힘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 산업예비군이 사라지거나 크게 줄어든다고 해서 체제가 즉각 붕괴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체제의 작동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는 곧 자본주의 아래에서 완전고용의 지속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국가의 ‘유효수요 관리’를 통해 자본주의가 완전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케인스주의적 발상은, 비자발적 실업의 유일한 원인을 총수요 부족으로 본 데서 비롯된 환상이다.
이 주장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다. 전후 시기에 실제로 시행된 케인스주의 정책은 1968년을 전후해 선진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서 명목임금 폭등을 초래했고, 이는 저실업 상태가 노동자들의 가격수용자 지위를 무너뜨렸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폭발로 이어졌다. 1차 상품 가격 상승이 이를 더 부추겼고, 이 인플레이션은 결국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종식되었다. 그들은 케인스주의적 수요 관리를 폐기하고 대규모 실업을 재창출했다.
자본주의에서 완전고용 유지가 불가능하다면, 복지국가의 유지 역시 불가능하다. 복지국가는 산업예비군의 삶의 고통을 완화하고, 해고라는 처벌의 강도를 낮춘다. 이는 자본주의 내부의 노동 규율을 약화하고, 동시에 노동자의 교섭력을 높여 가격수용자 역할을 무너뜨린다. 이런 제도는 한동안 유지될 수는 있지만, 자본가들은 언제나 이를 약화하려 할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는 ‘자본주의가 변했는가’, 약탈적 체제에서 복지 자본주의로 성격이 바뀌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활발했고,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강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노동자들의 처지를 다시 악화시켰고, 이는 체제 내부에 이미 내재해 있던 경향이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개혁’해 더 ‘인간적인’ 체제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더 인간적인 사회는 오직 자본주의를 넘어,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소유되는 체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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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