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다'던 양경수 위원장의 말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친자본 보수정당 민주당으로 길을 내겠다는 것이었습니까?
부끄럽고 참담합니다. 반드시 양 위원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민주노총이 끝내 공식 "지지 후보 없이" 대선 투표일을 맞이하게 됐다. 진보정당 후보를 지지하며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노력해온 지난 30년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다. 조직 안과 밖에서는 공히 현 사태를 양경수 위원장을 비롯한 '진보당계 주류' 집행부 등이 '대선 방침' 결정 논의를 '해태'하면서, 사실상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길을 열어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와 원칙을 배신한" 양경수 위원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비판이 현장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올해 2월 2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난 양경수 위원장. 민주노총
대선 방침 정할 마지막 중집..."표결 여부 표결하며 파행 이끈 양경수"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지난 20일 회의를 열고 '유일한 진보정당 후보인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 지지 결정의 건'을 논의했다. 이는 앞서 15일 중집에서 기타 안건으로 상정되었으나 양 위원장이 회의를 중단시키며 미뤄졌던 안건이었다.
오후 1시 시작된 회의는 밤 10시 40분까지 이어졌다. 장시간 논의에도 양경수 집행부 등이 지난달 29일 대선 방침에 대한 '원포인트' 중집 회의에서 제안했다 부결된 "진보정당 및 진보정당과 연대·연합한 후보를 지지한다"는 안과 권영국 후보에 대한 지지안 사이에서 고성이 오가는 갈등만 반복됐다.
논의가 공전을 거듭하자, 중집위원 중 여럿이 차라리 권영국 후보에 대한 지지안을 표결에 부쳐 결론을 내자고 거듭 요구했으나, 의장을 맡은 양 위원장은 "표결로 선거 방침 등을 정한 선례가 없다"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표결 여부를 표결로 정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고, 표결에 동의한 이들이 성원 33명 중 14명으로 절반을 넘기지 못하면서, 회의는 "결론 없이 종결"되어 버렸다. 이날 회의는 사실상 대선 투표일 전 마지막 중집으로, 민주노총은 창립 이래 처음으로 '대선 방침'을 결정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민주노총 정치방침 거스르며 사실상 민주당 지지"
중앙집행위원회 성원으로 이날 회의에 참여한 엄길용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은 기자에게 "회의 운영 자체가 파행적으로 됐다"면서 "양 위원장의 주장과 달리, 토론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경우 부득이하게 표결로 결론을 낸 사례들이 있는데도, 양 위원장은 끝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로 표결 제안을 거부하면서 5시간 가까이 논의가 늘어졌다"고 전했다.
그는 사견임을 전제로 "양경수 위원장이 겉으로는 표결 선례가 없다는 것을 내세웠지만, 그 속내는 민주당까지 포함한 연대·연합을 지지하는 의견을 고수하면서도 표결을 통해, 민주노총의 정치방침과 원칙을 거스르는 자신들의 입장을 공식화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이라 추측했다.
엄 위원장은 "민주노조 운동의 후퇴가 아주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렀다"며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민주노총의 핵심의제 중 하나인데, 입장을 정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민주노총 스스로 친재벌 보수 정당이라고 규정한 민주당까지 폭을 열어준 것"으로 "대단히 위험하고, 절대 해선 안 될 일을 한 것"이라 깊은 우려를 전했다.
"이재명이 어떻게 광장 후보 될 수 있나"..."민주노총 역사상 가장 큰 과오"
권영국 후보 지지안을 발의했던 임기환 민주노총 제주본부장은 참세상에 "양경수 위원장은 대선 방침 논의에서 노동조합 민주주의에 따른 의장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서 "민주노총의 위원장은 특정 정당이나 정파의 입장을 대변할 수 없는데, 지난 총선부터 이번 대선까지 진보당의 결정이 민주노총의 결정을 압도하는 사례로 비쳐 민주노총의 위상이 훼손될 우려가 깊다"고 말했다.
임 본부장은 "민주노총은 창립 이래로 진보 정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 세력화라는 기조로 활동해 왔고 선거 때마다 진보정당 후보를 지지해 왔다"면서 "지금도 유일한 진보 정당 후보인 권영국 후보만이 민주노총이 이야기하는 노동기본권 보장과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사회대개혁, 사회 공공성에 대한 요구를 수렴하고 있고,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에도 노동자 노동 진보 정치 세력 결집을 통한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명시하고 있어, 지지하지 않을 이유도, 못할 이유도 없는 상황"이라 짚었다.
임 본부장은 양경수 위원장 등 '진보당계 주류'가 '광장정치연합'을 내걸고 민주당에 대한 지지에 힘을 싣는 것에 대해 "이재명 후보가 광장의 후보라는 주장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면서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이나 차별금지법 제정 등 광장의 요구를 여전히 거부하는 후보가 어떻게 광장의 후보가 될 수 있겠나"라고 개탄했다.
또한 "기존의 방침까지 다 훼손하면서 사실상 보수 후보를 지지하고, 유일한 진보정당 후보를 지지하지 못하게한 것은 아마 민주노총의 역사와 노동자 정치 세력화 운동의 과정에서 가장 큰 과오로 남을 것"이라 평했다.
현장 조합원들 "양경수가 책임지고 사퇴해야"
금속노조 위원장을 대신하여 이날 회의에 참여했던 엄상진 금속노조 사무처장은 기자에게 "민주노총이 왜 이렇게 변질됐는지 이해할 수 없고, 참담함을 느낀다"며 "민주노총은 지난 30년 동안 진보 정치를 지향해왔고,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위해 진보 정당들과 함께해왔음에도, 양경수 집행부가 '광장 연합'을 명분으로 유일한 진보 후보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가로막았다"고 분개했다.
엄상진 사무처장은 현 상황에 대해 "지난 총선 때부터 정치 방침과 총선 방침이 이제 소실되었던 것의 연장선으로,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서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을 지킬 의무가 있음에도 조합원들이 함께 결정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양경수 위원장의 책임이 제일 무겁고 크다"고 짚었다.
또한 "현장에서는 이 지경까지 상황을 끌고 온 양경수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인되고 있다"고도 전했다.
실제, 익명을 요구한 민주노총의 어느 30대 현장 조합원은 기자에게 "광장에서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다'던 양경수 위원장이 말은 무슨 뜻이었나? 친자본 보수정당 민주당으로 길을 내겠다는 것이었냐"면서 "부끄럽고 참담하다. 양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에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윤석열 퇴진 국면, 광장의 경험을 통해 민주노총에 가입한 한 20대 청년 조합원도 참세상에 이번 양경수 위원장의 행보는 "광장에 나섰던 노동자와 시민의 절박한 목소리들을 배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깊이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이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묻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지켜보고, 자신도 조합원으로서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고 이야기했다.
산별·지역본부 권영국 지지 선언 잇따라...현장 조합원 1,400여 명 서명에도 "답 없는 양경수"
한편, 민주노총의 최대 산별 조직인 공공운수노조와 금속노조를 비롯한 주요 산별과 지역본부 등은 "유일한 진보 대통령 후보"인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에 대한 조직적 지지를 잇따라 밝히고 있다. 지난 19일에는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 성원 중 16명(부위원장 3명과 산별연맹 위원장 6명, 지역 본부장 7명)이 권영국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이를 대선 방침으로 결정할 것을 호소한 바 있다. 선언에 이름을 올린 6개 산별연맹에 소속된 조합원 수는 총 53만 5천여 명으로, 민주노총 전체 기준조합원(96만 2천여 명)의 약 56%에 달한다. 20일에는 민주노총 현장 조합원 1,400여 명도 "민주노총 정치 방침에 따라 진보 대통령후보 지지를 포함한 대선방침 결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모아 집행부에 전달했다. 서명 제안자 중 한 명인 이장우 전 울산대학교병원 분회장에 따르면, 이를 양경수 위원장에게 직접 카카오톡 메시지로 전달했으나, 양 위원장의 답신은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