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30일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현수막에 '100주년'이라고 쓰여 있으나 '100회'가 맞다. 사진: 이영호
첫 세계노동절 투쟁은 1890년 5월 1일이다. 미국에서 1886년 5월 1일부터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파업투쟁을 벌이던 노동자들이 진압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날을 기려 제2인터내셔널은 1890년 5월 1일을 ‘세계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시위·투쟁의 날’로 정했다. 그날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동시에 ‘1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세계노동절, 메이데이(May Day) 투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도 가혹한 노동 현실에 맞서 노동자들 스스로 투쟁에 나섰다. 1920년대 초부터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축적한 일본 독점자본들이 조선에 진출함에 따라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조선노동공제회(1920년), 조선노동연맹회(1922년) 등을 거쳐 조선노농총동맹(1924년)을 결성했다. 자주적인 조직을 결성한 1920~1925년 사이 노동자계급의 파업투쟁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노동자들은 1920년부터 메이데이를 기념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봉쇄가 극심해 기념식을 하지 못하면 동맹파업이나 시위, 행진, 격문 살포, 강연회 등의 다양한 형태로 메이데이를 기념했다. 1923년에는 메이데이 기념행사가 일제의 봉쇄로 무산되자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회를 열었는데, 2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갈수록 더욱 강화됐지만 노동자들은 전국 곳곳에서 파업투쟁과 기념행사를 감행했다. 메이데이 투쟁으로 매년 무수한 노동자들이 다치고 체포되고 구속됐다. 그럴수록 메이데이 투쟁은 노동자뿐 아니라 조선 민중 전체 행사로 확장해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전평 출범, 그리고 1946년 첫 노동절
일제가 물러가자 미군이 들어왔다.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바뀌지 않았다. 노동자들에게 더욱 큰 힘이 필요함을 깨닫고 조직적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45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출범했다. 전평은 강좌와 교육 등을 배치해 출범 이후 첫 노동절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1946년 메이데이는 자유와 평화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다. 전평이 5월 1일 조선공산당, 경성지방평의회와 공동주최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거행한 메이데이 기념식에 20만 명이 참가했다. 서울뿐 아니라 인천, 부천, 제천, 대구, 대전, 삼척, 백천, 이천, 춘천 등 전국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단결과 계급의식은 더욱 고양됐다.
한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은 1946년 3월 10일 발족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전평을 깨기 위해 이승만 등 새로운 통치세력과 자본가들이 급조한 단체다. 대한노총은 “우리는 혈한불석(血汗不惜, 피와 땀을 아끼지 않음)으로 노자(勞資) 간의 친선을 기한다”는 강령을 내걸었다. 대한노총은 이후 강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노동자를 짓밟고 국가권력의 노동 통제, 자본의 노무관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 대가로 대한노총 지도부들은 정치적 출세를 보장받았다.
1946년 9월과 1947년 3월 전평의 전국총파업이 벌어졌다. 미군정은 파업을 파괴했다.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까지 발생하고 수백 명이 다치고 수천명이 검거됐으며 전평 조합원들은 해고됐다.
미군정청의 폭압적 탄압으로 노동운동은 위축됐다. 1947년 노동절 기념식은 일제 강점기와 같이 당국과 경찰의 눈을 피해 기습시위 형식을 띠었다. 그럼에도 서울 남산에는 30만 명이나 모였다. 청주에서는 수만 명이 열다섯 번이나 기습시위를 벌였으며 밤에는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불렀다. 경주, 광양, 장흥, 순천, 담양, 광산, 나주 등에서는 경찰과 충돌해 사상자 수십 명이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해고와 테러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절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농민, 시민, 청년, 학생, 지식인의 지지와 동참을 끌어냈다. 같은 해 대한노총은 미군정의 절대적 지지 속에 조직을 키워나갔다. 노동절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축사를 들으며 기념식을 했다.
1948년 남한 단독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국회의원 총선거(5월 10일)를 열흘 앞둔 가운데 미군정은 전평의 메이데이 집회를 불허했다. 대한노총만 서울운동장에서 ‘단독선거 지지’를 외치며 노동절 기념식을 진행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은 전평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대한노총 총재를 맡았다. 이때부터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정치적 동원부대로서 충견 구실을 했다.
1959년부터 ‘메이데이’ 아닌 ‘노동절’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1948년부터 1957년까지 대한노총이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주관했다. 대한노총 내부 파벌싸움이 극심했던 1949년과 한국전쟁 시기인 1951~1952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성대하게 이승만 숭배 행사를 진행했다.
휴전 논의가 오갈 즈음인 1953년 노동절에는 대한노총 간부들만 참석한 기념식에서 “북진 통일 없이는 노동자의 살길도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북진 통일’ 결의문은 1955년까지 노동절 때마다 채택했다. 1956년에는 3대 정·부통령 선거(5월 15일)를 앞둔 노동절에 “이번 선거에 노동자의 은인인 이승만 박사를 절대 지지한다”고 결의했다. 충성스러운 대한노총의 지지와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1956년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승만은 1957년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들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되도록” 대한노총에 노동절 날짜 변경을 지시했다.
대한노총이 새 날짜를 정하는 근거로 ‘노동자와 관계있고 유래가 깊은 날’, ‘봄 혹은 가을로 노동자가 하나의 명절로 즐길 수 있는 좋은 계절’, ‘국내 행사와 중복 피하고 정치와 관련 없이 순수성을 가진 노동절’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그렇게 자신들의 출범일인 ‘3월 10일’을 새로운 노동절로 제시했고, 정부는 곧바로 승인했다.
다음해 1959년 3월 10일, ‘제1회 노동절 기념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기념식에 참석한 이승만을 향해 대한노총은 “존경하옵는 각하, 오늘은 글자 그대로 각하가 평소에 누구보다 아껴주시던 노동자의 명절날입니다. (중략) 오늘 우리들 노동자 동지들이 다 같이 한자리에 모여 (중략) 기쁨을 나누게 되었음은 오로지 각하가 베푸신 어진 정치의 보람임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대한노총은 국제자유노동자연맹 사무총장에게 메시지를 보내 노동절 날짜를 바꾼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 5월 1일 메이데이를 경축 기념하여 왔으나 이는 적색 공산 국가 간에 공통으로 기념되는 날로서 오직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의 노동자 대표들은 폭압하고 잔인무도한 공산 도당과 같은 날에 함께 즐길 수는 없다는 의도하에 (중략) 대한의 참다운 민주적 노동자들이 공산당과 전평을 타도하고 민주 대한 노동자들의 총집결체인 대한노총을 창립한 3월 10일을 한국의 노동절로 축하하고 기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63년 ‘노동’마저 사라지고 ‘근로자의 날’로
이후 대한노총은 1960년 11월, 민주노조 운동을 벌여온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장 김말룡·대한노총 탈퇴파)’와 통합해 ‘한국노동조합연맹’(한국노련·임시의장 김말룡)을 결성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5월 23일 한국노련을 강제 해산하고 수백 명의 노조 간부와 활동가들을 체포·구금했다. 그리고 8월 30일 “노동조합을 재조직하는 데 따르는 정부 측의 입장”에 따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결성했다.
한국노총은 결성대회에서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기약하는 군사 혁명의 성스러운 봉화를 선두로 우리들 노동자는 견고한 단결과 피 끓는 동지애로써 민주주의 원칙하에 산업 부흥의 주도성을 확립하고 국가 재건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5.16 군사혁명을 전폭 지지하며 혁명 과업 완수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결의했다.
1963년 박정희는 ‘노동’이라는 용어가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다며, 근면하게 일한다는 의미의 ‘근로’로 변경했다.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근로자의날법)이 제정되며 ‘노동절’은 ‘근로자의 날’이 되었다. 이 해부터 매년 3월 10일, 한국노총은 정부와 ‘근로자의 날’ 행사를 주관했다. 이날 하루 노동자들을 ‘산업역군’ ‘수출 전사’ 따위로 추켜세웠다. 몸을 움직여 일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노동자’보다는 말 잘 듣고 부지런히 일만 하는 ‘근로자’가 필요했으리라.
자신들의 창립일을 ‘근로자의 날’로 탄생시킨 한국노총은 이후 한국 정치사의 주요 길목마다 집권당과 자본의 주장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1972년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1987년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각종 궐기대회로 충성심을 드러낸 사례가 대표적이다.
다시 찾은 ‘메이데이’
1970년 전태일의 죽음 이후 동일방직투쟁(1976년), YH무역 신민당사 농성(1979년), 한국노총 민주화 촉구 농성(1980년), 원풍모방투쟁(1982년), 대우자동차 파업(1985년), 구로동맹파업(1985년) 등을 통해 민주노조 운동은 빠르게 성장했다.
부단한 투쟁으로 성장하던 노동자들은 빼앗긴 메이데이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1985년 5월 1일에는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주최로 노동자·학생 300여 명이 영등포시장 로터리에 모여 ‘노동운동 탄압 중지’ ‘8시간 노동제’ 등을 외치며 노동절을 기념했다. 1986년 노동절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 주도로 출근 시간에 구로공단에서 가두 시위를 했고 저녁에는 전국노동자임금투쟁위원회가 서울 독산동에서 노동자 4백여 명과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제까지는 비밀스럽게 집회 장소를 알음알음 주고받았다면, 1988년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세계 노동자의 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 노동자대회’를 공개적으로 열었다. 정권의 탄압과 봉쇄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3월 10일이 아니라 세계노동절인 5월 1일에 기념 투쟁을 전개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노동자들은 전국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전국투본)를 구성해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를 치른 뒤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전국회의)를 결성했다. 전국회의는 드디어 한국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5월 1일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89년은 세계노동절이 딱 100년째 되는 해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역대 독재정권에 빼앗겼던 메이데이가 42년 만에 대중적 투쟁으로 부활한 해다.
1989년에야 대중적으로 부활한 한국의 노동절
전국회의는 세계 노동절 한국 노동자대회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노협 건설의 실질적 토대 구축 △노동자 대중과 민중들의 연대의식 제고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 분쇄를 목표로 세웠다. 4월 30일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 한국노동자대회’, 5월 1일 ‘노동절 기념 및 노동운동 탄압 분쇄 결의대회’를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는 4월 26일 내무부, 법무부, 노동부 장관 연명으로 대회를 원천봉쇄하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투쟁은 4․29 전야제부터 시작됐다. 정부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노동자·학생들은 대회장인 연세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신촌 로터리와 신촌역, 연세대에 이르는 모든 도로와 교통을 통제했다. 사전에 진입한 대오는 줄곧 교문 앞 투쟁을 전개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산을 통해 연세대로 진입했지만, 진입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서강대, 동국대, 한양대 등으로 집결했다. 전야제는 결국 동국대, 서강대, 연세대, 3개 대학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노동자들이 전야제를 치른 각 대학 앞은 경찰이 철저히 봉쇄했다.
4월 30일 본대회는 각 학교로 분산된 노동자·학생들이 교문을 돌파하는 투쟁으로 시작했다. 연세대와 서강대 교문에서 치열한 돌파 투쟁을 벌였다. 한양대, 동국대 등지에 산개해 있던 노동자·학생들은 아현동과 서울역, 신세계백화점 앞 등에서 저녁까지 가두시위를 계속했다. 연세대 봉쇄가 풀리자 오후 10시까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이틀 동안 연행자는 5,500명이 넘었다. 부상자도 많았다. 연세대에서만 총 104명이 다쳤고, 봉합수술을 한 사람만도 30명에 이르렀다. 처절하지만 결연한 투쟁이었다.
4월 30일 중앙집중 투쟁에 이어 5월 1일 노동절에는 투쟁의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했다. 지노협을 중심으로 전국 13개 시·도(서울, 인천, 성남, 부천, 안양, 안산, 수원, 대구, 울산, 마창, 부산, 광주, 전북)에서 총회투쟁, 가두투쟁, 집회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노동자들은 해마다 5월 1일 정권의 원천봉쇄와 폭력적 진압 작전에 맞서 세계 노동절 기념 투쟁을 벌였다. 그해의 핵심 요구를 집약해 강력한 투쟁으로 정권과 자본을 압박했다. 이러한 투쟁에 밀린 정부는 1994년, 근로자의날법을 개정해 날짜를 3월 10일에서 5월 1일로 바꿨다.
달력에는 여전히 ‘근로자의 날’이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단, 우리가 그 의미와 역사를 온전히 기억하는 한. 지난해 노동절에 정권의 폭압에 항거한 양회동 열사의 정신을 다시 되새긴다.
[참고자료] 역사학연구소, 『메이데이 100년의 역사』, 서해문집, 2004.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2권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1989년)』, 2003.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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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미는 오랜 노동운동의 길 위에 있는 활동가로서 현재는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기획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