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을 기획하다: 목포 전위동맹의 사람들

목포 운동의 전위를 결의하다

전위동맹은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1925년 8월 30일 목포 시내 서병인의 집에서 오전 10시에 결성되었다이들은 규약 4개 조를 제외한 나머지 사항은 모두 성문화하지 않기로 하며 전위동맹의 사업은 청년사상노농여성형평 등 운동에 연구 노력할 것을 결의한다. 

전위동맹이 규약 4개 조는 아래와 같다.

본 동맹은 전위동맹이라 칭하고 목포에 치(.

본 동맹은 대중의 생활 향상과 역군 훈련을 목적으로 함.

본 맹원은 상호부조를 신조로 함.

본 맹원은 현존 상쟁당파에 계()()가 무()한 자에 한함.

규약은 당시 사상 단체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일반적 규약이지만규약 4조는 특별히 흥미를 끈다조직원의 자격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상쟁당파와 무관한 사람만이 조직원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상당히 이례적인 조항이다동시에 이는 당시 이 조직을 건설한 사람들이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925년 8월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상쟁하고 있는 당파란 다름 아닌 서울청년회를 배경으로 하는 속칭 서울파와 경쟁 관계 있는 화요파’, ‘북풍파를 지칭하는 말이다이들 분파는 각기 다른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더구나 이들 조직이 상쟁이 심화된 것은 바로 전년도인 1924년 조선 내부의 사회주의 세력의 통일을 이루고 그 성과로 공산주의 정당을 건설하려고 시도했던 ‘13인회가 결렬된 후화요파와 북풍파가 연합을 통한 당 건설을 계획에 올렸기 때문이다서울파의 입장에서는 자파가 배제된 당 건설의 일정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에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당되었지만창당에 서울파는 합류하지 않았다이렇게 전국적 수준에서의 공산주의 그룹 간의 경쟁이 심화된 상황에서 목포의 전위동맹은 자신의 규약에 특별히 회원의 자격을 넣을 만큼 유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지향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해방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활동가들에게 전국적 범위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두 세력 간의 경쟁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이미 전위동맹의 구성원들은 각자 인적조직적인 관계 속에서 각 세력과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아마 규약 4조는 오히려 이러한 전위동맹 내부의 사정을 봉합하기 위한 규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이러한 갈등의 가능성은 전위동맹이라는 조직을 건설하려는 당시 목포의 운동가들에게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이미 목포에서는 전위동맹 말고도 목포를 넘어 무안과 전남 서남부 일대를 포괄하려는 조직적인 시도가 있었고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사안은 24년부터 목포 인근의 섬들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소작쟁의에 헌신적인 결합이었다투쟁에 결합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국적 수준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조직적 발전의 길을 모색한다.

모색의 성과는 전위동맹을 만들기 1년 전인 1924년 9월 목포무산청년회의 설립, 25년 1월 목포와 무안지역을 포괄하는 무목청년연맹을 건설하여 목포를 중심 생활권으로 하는 지역 수준의 활동가 조직체를 건설한다대략 1년간의 준비기간과 공동활동을 거쳐 목포의 운동가들은 전위동맹 건설 이후 조직 활동의 성과를 나타낸 것이다.

전위동맹 사람들

전위동맹의 활동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4명이 있다그들은 배치문조극환김영식서병인이었다당시 신흥 항구 도시인 목포의 상황을 반영하듯이 이들 중 목포가 출생지인 사람은 김영식뿐이다.

조극환

조극환은 가장 연장자로 1887년생 전남 영암 사람이며영암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수감이후 영암청년회반일 운동 조직인 수의위친계 활동 이후로 목포로 이주하여 목포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목포무산청년회를 조직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고 전위동맹에 참여하였다.

배치문

배치문은 1890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여 스무 살에 부모를 따라 목포로 이주하였고 목포지역 3.1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여 1년 6월의 실형을 받는다이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고, 1924년 의열단과 관련된 활동으로 검거되었으나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한다이후 목포로 돌아와 목포무산청년회무목청년연맹을 조직하였고 전위동맹 창립의 주역이 된다.

서병인

서병인은 1896년생으로 지금의 신안군 매화도 출신이다하지만 목포에서 상업학교를 다녔고 면화중개업에 종사하다 1925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구속 등 자료는 없지만 그도 목포지역의 3.1운동에 참여했을 개연성이 높다전위동맹 창립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이후 건설되는 무목노농연맹목포노동총동맹 상무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김영식은 1899년 목포출생으로 전위동맹 조직원인 박제민과 동갑이며 둘은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다김영식은 일본 유학 당시 일월회에 가입하여 이론적 능력을 바탕으로 활동하였고, 25년 4월 귀국 후 전위동맹에서 활동하였다.

이들 4명의 평균 연령은 31.7세이다이들은 1919년 3.1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세대이다. 3.1운동에의 참여는 이들의 향후 삶을 결정지었다.

전위동맹의 활동

이들이 공통으로 몸담았던 전위동맹은 1925년에 눈부신 조직적 성과를 내었다. 1925년 8월 30일 창립된 전위동맹은 9월 17일 무목노농연맹 창립, 9월 27일 제유노동조합, 9월 28일 면업노동조합, 9월 29일 자유노동조합, 9월 30일 정미노동조합, 10월 7일 방직노동조합하차노동조합, 10월 10일 선하노동조합, 10월 13일 목포노농총동맹 창립, 11월 12일 인쇄직공친목회, 11월 15일 목공노동조합, 11월 17일 토공노동조합을 설립한다.

조직 설립 이후 79일 만에 12개 조직 1,770명의 노동자를 조직해 낸 것이다한 지역에서 평균 일주일에 1개 이상의 조직을 건설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이는 전위동맹의 조직원들이 몇 년간의 목적의식 하에 벌인 헌신적인 노력의 성과임과 동시에 당시 목포지역 운동의 기운이 높이 올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4년부터 본격화된 암태도를 비롯한 소작쟁의가 섬에 머무르지 않고 목포에 상륙하여 진행해 왔으며 이주민들의 도시였던 목포지역의 민중들은 그 소작쟁의를 벌이고 있는 섬사람들과 가까운 관계였고 이들의 처절한 투쟁들과 승리의 소식은 목포지역 노동자들의 마음에 단결의 필요성과 투쟁을 통한 쟁취가 필요하다는 불을 질렀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지역 차원에서 상승하는 기세는 1925년 12월 자유노조의 파업으로 드러난다자유노조의 파업 과정도 세밀한 조직의 흔적이 보인다우선 9월부터 임금실태조사를 진행하고 타 지역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는 사실을 확인하며지역 표준임금을 요구하여 조직노동자들을 넘어선 단결을 기획하였다. 12월 7일 파업에 돌입한 자유노조는 유사 노동조건인 하차노조목공노조선하노조가 동정파업동맹파업에 돌입하게 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전위동맹은 목포의 핵심 사업장인 제유노조 파업을 조직하여 1926년 1월 파업에 돌입하였다하지만 3개월이 넘는 파업에도 불구하고 제유노조 파업은 패배하고 만다.

자유노조제유노조 파업의 배후로 지목당한 전위동맹도 제유노조의 패배와 더불어 심각한 역량 훼손에 직면한다배치문김영식조극환서병인박제민임흥수오도근 등 핵심간부가 모두 구속되고 이들이 주도하던 목포노동총동맹도 일시적인 침체에 빠져든다.

제유노조 파업 투쟁과 관련한 기사를 제외하면 이후 전위동맹의 이름으로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그 이유는 일경의 탄압도 있었지만 제유공장 파업 이듬해인 1927년 6월 신간회 목포지회가 창립되면서 전위동맹 성원 모두가 신간회 활동으로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

1927년 신간회 활동을 이어가던 해에 배치문은 같은 해 9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구속된다그는 강달영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 시절이던 1926년 2월에서 3월 사이 김철수 중앙집행위원의 보증으로 입당했다. 1년 6월의 실형을 받고 1929년에 3월에 석방된 이후 신간회 목포지회 집행위원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진행된 목포지역 학생운동의 지원활동을 벌였다신간회가 해소된 이후에도 목포지역 노동운동의 재건과 당 재건 활동에 종사하였다가 잠시 검거되었다이후 동아일보 목포지국장호남평론 등에서 기자 활동을 하였다호남평론이 폐간되고 1941년 3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1942년 옥사한다.

조극환은 제유공장 파업으로 구속 이후 신간회 활동을 하였고 1927년 7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한다. 1928년 9월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3년 형을 받고 1932년 출옥했다이후 동아일보 진도지국을 운영하다가 고향인 영암에 돌아가 일제 말기를 보낸다. 1945년 해방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 영암지부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미군정에 의해 구속되고 약 1년간 수감생활을 하였다이후 고향인 영암 이화정에 은거하다가 1966년 세상을 떠난다.

서병인은 제유공장 파업 구속 이후 신간회 활동을 하였고 1927년 8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조극환 김영식과 함께 활동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책임자로 활동하다 검거되어 징역 2년을 복역한다이후 1932년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으로 한때 검거되었다. 1933년 잡지 신세기를 발행한 혐의로 다시 검거되었다해방 이후 서울을 근거지로 활동한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회의에 서울시 대표로 참석하였고, 1946년 전국농민조합 대의원으로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민전 서울지부 재정부장을 역임했다. 1947년 여운형이 이끄는 근로인민당에 참여하여 중앙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구속되었다구속 중 얻은 병으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1948년 9월 사망한다.

김영식은 목포제유공장 구속 이후 1926년 9월 안광천 등과 함께 정우회 활동을 하였고 1926년 12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1927년 목포로 귀향하여 조선공산당 활동을 전개하였다높은 수준의 이론가로 평가를 받던 그는 1927년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의 상설 비상설 논쟁에 참여하였고 협의회의 의안작성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 신간회 목포지회 정기대회에 참석하여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1928년 2월 일경의 조선공산당 검거 선풍 당시 검거를 피하면서 3차 당 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3월 조선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만 주총국 위원으로 선정이 되어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12월 코민테른 방침에 의해 조선공산당 해산과 재조직 방침에 따라서 김철수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정치부위원으로 선출되었다이후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전개하다가 만주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그의 나이 31세였다.

이들의 간단한 이력에서도 고단한 투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이들은 민족해방과 신사회 건설이라는 자신들의 삶을 걸고 결의한 길에서 비켜서지 않았다어떤 이는 병으로 어떤 이는 옥사로 어떤 이는 쓸쓸하고 외로운 여생을 보냈다긴 투쟁의 기간에서 전향하는 이들과 죽어간 이들을 지켜봐야 했다노선과 전망이 차이로 분열하기도 하였다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그들이 바랐던 세상을 위해 가장 치열하게 분투하였다.


 

[참고자료]

신문 :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매일신보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동광신문목포시민신문 

논문 : 김경일, 『노동운동』, 2008,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일제하 노동운동사, 1992, 창작과 비평

이성운, 1926년 목포 제유노조파업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의』 지방사와 지방문화 23권 1

최성환, 『1920년대 목포청년운동과 지역엘리트의 성격에 대한 연구』 2009. /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5권 1호 1920년대 목포 전위동맹의 결성과 활동』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88. 2024.

이기훈, 『민족독립운동』 2016. 민주 장정 100광주전남 지역사회 운동사 3

목포시사편찬위원회, 『다섯 마당 목포시사 1권 항도 목포』 2017. 전라남도 목포시 

웹사이트

한국학 호남진흥원 : https://www.hiks.or.kr/HonamHeritage/2/read/1680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https://db.history.go.kr/modern/main.do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https://nl.go.kr/newspaper

덧붙이는 말

나영선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연구원이며, 한국지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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