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의 탄생
19세기 후반 세계 각국은 산업화에 따른 노동력의 수요 증가와 동시에, 장시간 노동, 저임금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세계 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고, 사회변혁을 추진하는 정치세력들 또한 부상했다.
특히 농업 중심의 경제를 통해 번창한 뉴질랜드는 1890년대에 들어 농민들의 협동조합 운동과 여성 참정권 운동 등 활발한 사회운동이 이루어지며 사회적 약자의 정치·경제적인 권리들을 획득해나갔다. 뉴질랜드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조직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는 1894년 산업노동중재법의 제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법률은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노사관계를 규정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기틀로 ‘최저임금’을 보장하도록 했으며, 이후 1896년에는 호주, 1909년에는 영국 등이 최저임금의 개념을 사회제도에 도입하여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법적 조치들을 시행해 나갔다.
Fight for 15$
2012년에는 미국 뉴욕의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이 15달러의 최저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이는 미국 전역으로 번지며 최저임금 인상 운동으로 발전했으며, 세계 각국의 반빈곤 투쟁에 불을 지폈다. 이어진 2015년 3월 15일에는 뉴욕,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미시간 등 미국내 230여 개의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인 ‘Fight for 15$(당시 약 1만 6천 원)’ 가두투쟁이 벌어졌다. 이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임금을 받을 것을 주장했고, 패스트푸드 부문을 넘어 월마트, 보육교사, 시간강사 등 미국의 저임금부문을 포괄하는 연대투쟁으로 확장했다. 이에 시애틀의 시의회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최저시급을 15달러까지 올리는 안을 통과시켰고, 다른 도시의 단계적 인상안을 포함한 복지정책들 또한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최저임금
한국의 최저임금은 1986년의 최저임금법을 통해 명시되었다. 한국의 최저임금제도는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안정과 노동조건의 향상을 목표로 했으며, ‘1987 노동자 대투쟁’의 영향 하에 1988년 1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최저임금의 인상은 경제성장과 함께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그 인상률이 점차 감소했으나 오히려 제도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아울러 최저임금의 효용이 경제 상황과 노동시장의 구조와 관련해 사회 전체의 고용을 위협하거나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의 운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을 통해 한국사회의 최저임금의 논의는 인상률만이 부각된 채, 특수고용·영세사업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논란의 장벽에 부딪혔다. 이는 한편으로 한국 사회가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복지정책이나 구조적 요인을 손보는 일에 매우 소흘했다는 사실의 반증이었다.
본질은 불평등
최저임금은 어디까지나 ‘절대적 빈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임시처방에 불과했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불평등의 심화 현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요컨대 한국의 노동시장은 코로나19 위기를 지나며 소득 하위 20%와 소득 상위 20%의 차이가 10배도 넘게 벌어졌으며, 이는 극심한 양극화의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 2024년 생활임금은 이미 1만2천 원을 초과했으며, 이에 따라 최저임금의 내용은 기본소득이나 사회적임금 등 복지제도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되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최저임금 인상’은 어느 국가에서나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절대 다수 노동자들의 임금을 현실화할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가난은 최저임금으로도 표현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최저임금의 적용조차 받지 못하고 불평등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이 800만 명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본질은 불평등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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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조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