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은 시점부터 우상으로 삼았던 뮤지션이 있다. 그의 음악, 가사, 옷차림, 액세서리 작은 것 하나까지 그를 모두 빼닮고 싶었다. 그만큼 그의 재능은 내게 너무나도 비범해 보였고, 그가 써 내려간 가사들은 지금까지 외우고 있을 정도로 난 그를 많이 동경했다. 언젠가 내가 뮤지션이 되어 그를 만난다면 꼭 ’내가 당신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던 당시 그는 4대강 사업 홍보 노래를 직접 제작하고 부르며 스타일을 구겼다. 그리고 그는 종교에 귀의하고서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그런 부정적인 음악은 하지 않겠다’고 트위터에 적으며 자신의 20대 시절을 통째로 부정했다. 마치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홍대 인디씬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홍대를 떠났고,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의 첫 번째 우상이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가끔 하는 우스갯소리의 한 소재 정도로 격하되었을 뿐, 난 아직도 종종 그의 음악을 듣는다.
모든 예술에는 어느 시점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상이 담긴다.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결과물이 때로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때로는 분노하게 만들고, 때로는 삶의 이유를 준다. 작가의 결과물에 크게 감동하고 공감할수록 작가와 우리 스스로를 동일시하려는 경향 또한 커진다. 작가가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오롯이 대변했다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은 순간을 기록할 뿐이고 삶은 계속 이어진다. 작품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지만, 예술가와 우리는 이어지는 삶 속에서 얼마든지 변한다. 어떤 계기에 의해 종교에 빠질 수도 있고, 사상적으로도 바뀔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변해버린 예술가의 삶에 치를 떨거나, 과거의 내 모습과 취향을 부정하거나, 이 두 가지 선택지만 존재한다고 여겨왔는데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어느 젊은 보수 논객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민기 선생을 추모하는 글을 남기며 김민기를 ‘순수 예술가’라 칭했다. 그는 ‘순수 예술가’ 김민기를 이용해 먹으며 빨간색으로 물들인 386 운동권, 그리고 김민기에게 ‘좌익’ ‘빨갱이’라는 라벨을 달아준 우파들에 양비론적 태도를 취하며 ‘순수 예술가’의 ‘순수 예술’을 미학적으로 망쳐놨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문화 예술을 대하는 후진적 태도로 인해 우파가 끊임없이 문화 전쟁에서 패했다고 진단하며, 문화 예술계 비주류로 밀려나고 있는 우파의 상황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다. 그는 과거 우파들이 붙인 ‘좌익’이라는 딱지 위에 ‘순수’라는 스티커를 덧붙이고, 김민기가 작품들에 공들여 담아냈던 여러 가치들을 애써 부정하는 듯 보인다. 그의 견해에 털끝만큼도 동의할 수 없고, ‘순수’라는 말로 보여지는 그의 빈곤한 예술관은 실소를 자아내지만, 공식적인 논평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 남긴 소견이니 여기서 더 길게 반론을 펼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팬이 동경하는 예술가와의 사상적 괴리에 대처하는 새로운 모델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나름 신선하긴 했다. ‘내나라 내겨레’ 같은 노래를 내세우면서 김민기를 ‘보수 예술인’이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의 견해는 어느 정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외국이라고 이런 경우들이 없을까.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영미권 아티스트들의 무수히도 많은 사례가 있는데 하나 소개해 볼까 한다. 80년대 영국 음악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더 스미스(The Smiths)라는 밴드가 있다. 5년 정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90년대의 브릿팝, 그리고 지금의 인디록 밴드들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더 스미스는 동성애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내포한 도발적인 컨셉과 보컬 모리세이(Morrissey)의 거친 언행으로 유명하다. 영국의 음악 저널리스트 사이먼 고다드는 모리세이를 ‘노동계급 출신의, 모호한 성적 정체성, 책벌레 같으면서도 화려하고 도발적인 매력을 지닌 팝스타’라 칭했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성향을 ‘노동계급 지지(pro-working class), 반엘리트(anti-elite), 반기관(anti-institution)’으로 정의하며 모든 정당, 종교 등을 부정하는 거부주의자(Refusenik)라 평했다. 아마 80년대에는 지금의 모리세이를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The Smiths의 보컬 Morrissey
최근 10여 년 동안 그에 대한 평판은 밑바닥 정도가 아닌 지하 맨틀 핵까지 떨어져 있다. 그는 과거부터 끊임없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아왔는데, 이에 대해 계속해서 부정해 왔지만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종을 선호한다”라고 답하며 오랜 팬들의 뒷목을 잡게 했다. 2019년엔 브렉시트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여러 공연에서 영국의 극우 정당 For Britain의 뱃지를 달고 등장하며 그들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10대 시절부터 채식주의를 고수해 오며 동물의 복지와 권리를 위해 열렬히 싸우면서도 인종차별주의적인 성향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극우 정당을 지지하는,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격언을 몸소 증명하는 모리세이의 걷잡을 수 없는 행보에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혈압이 올라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 기준 전 세계 월별 청취자 1600만 명이 넘는 이들이 아직도 더 스미스(The Smiths)의 음악을 즐겨 듣는 중이다.
밴드 The Smiths
더 스미스와 동시대에 데뷔해 시나리오, 소설 등의 훌륭한 작가로도 유명한 닉 캐이브 앤 더 배드 시즈(Nick Cave and the Bad Seeds)의 프론트맨 닉 캐이브(Nick Cave)는 평소 자신의 블로그에서 팬들이 남긴 질문에 장문의 글로 답하는 소통으로 유명하다. 어느 한 팬이 그의 블로그에 모리세이의 추한 행태에 대한 실망스러움을 표하며, 예술가의 초기 작품들과 이후에 드러나는 추한 페르소나의 분리가 가능한지, 모리세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닉 캐이브는 동시대에 활동한 동료 뮤지션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면서도, 또 실망한 팬들이 자신의 과거와 취향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아주 현명한 답변을 내놓았다. 내가 본 젊은 보수 논객처럼 현실을 부정하며 무리한 합리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답변이었다.
닉 캐이브 앤 더 배드 시즈(Nick Cave and the Bad Seeds)의 프론트맨 닉 캐이브(Nick Cave)
닉 캐이브는 예술과 아티스트를 분리하는 것에 관해 거창한 예술론이 아닌 그저 노래의 소유권을 이야기했다. 발표된 노래는 더 이상 작가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민기 선생이 1987년에 ‘아침이슬’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처럼, 청중이 원한다면 청중이 그 노래의 소유자이자 보호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 순간부터 노래의 무결성은 아티스트가 아닌 청중에게 달려있으니, 이후 아티스트의 정치적 견해나 행보는 어떻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모리세이의 정치적 견해로 인해 'This Charming Man', 'Reel Around the Fountain', 'Last Night I Dreamed Somebody Loved Me' 등의 훌륭한 노래들이 쓰레기로 취급받는 것은 모두에게 너무나도 큰 손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누구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불쾌함을 선사할 수 있더라도 그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그러한 도전이 대화와 토론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일종의 교정 및 교육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다소 긍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아울러 닉 캐이브 자신을 포함, 모리세이도 얼마든지 지저분한 광기에 빠질 수 있는 개인에 불과하다며, 모리세이의 노래가 청중 각자의 가슴 속에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라 조언한다. 그리고 노래가 가진 아름다움은 모리세이의 불쾌한 정치적 의견 표명보다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라 말하며 글을 마친다.
어떤 예술 작품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모두가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아마 사랑하는 이유는 모두 제각각일 것이다. 이는 예술가가 의도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영역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내가 나의 첫 번째 우상의 노래를 사랑한 건 나도 모르게 사고처럼 벌어진 일이었고, 그가 이후에 종교에 빠지고 이명박을 지지하는 과정은 내가 어찌 손 쓸 수 없는 그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의 현재가 내 과거의 감동을 해칠 이유가 전혀 없다. 닉 캐이브의 말처럼, 내 과거 우상의 노래와 함께 떠오르는 나의 추억이 그의 모양 빠지는 모습에 대한 기억보다 훨씬 오래 남을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 계속해서 지워지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젊은 보수 논객이 썼던 글처럼 그냥 통째로 부정하는 방법도 있긴 있다. 예술에 정답이 어디 있나. 예술은 그냥 내 맘대로 먹고 씹고 맛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아티스트의 언행과 행보보다는 아름다운 음악이 훨씬 중요하고, 그 음악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음악과 함께 기억될 나의 소중한 추억임을 잊지 말자.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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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현은 밴드 로큰롤라디오에서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다. 가끔 글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