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투쟁이다” 영화운동의 출발선에서 지금까지

지난 9월 29일 현대백화점 킨텍스 토파즈홀에서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24 DMZ DOCS 포럼이 열렸다. 이른 11시 <우리를 연결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변성찬 영화평론가가 사회를 보고 미디액트의 장은경 사무국장이 발제했다. 토론자로는 이마리오 다큐멘터리 감독, 넝쿨 다큐멘터리 감독, 하샛별 미디어 활동가, 양동민 스튜디오R 활동가가 함께했다.

2024 DMZ DOCS 포럼 <우리를 연결하는 것들> 자료집
2024 DMZ DOCS 포럼 <우리를 연결하는 것들> 포럼 현장

장은경 미디액트 국장님의 촘촘한 첫 번째 발표자료는 “사회적 연대 기록 활동 ‘타임라인’”이었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를 장은경 국장은 “영화운동의 출발선에서 포스트 코로나까지”라고 부제를 정했다. 그리고 그 타임라인은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져 있었다. 발제에서는 네 개의 시기마다 각각 중요한 변화가 있는데, 크게 세 가지 면에서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투쟁의 현장 (시기의 역사적 변화와 제도, 정책의 변화)

두 번째는 미디어 활동가들이 스스로 만들어온 환경

세 번째는 카메라 기술과 표현방식의 변화

발제에서는 네 개의 시기에 이루어진 세 가지 특징들의 변화를 간략하게 설명했으며, 이후 네 명의 토론자들이 각각 자신의 활동을 시작한 시기와 계기, 활동 배경, 활동 현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필자는 그 결과로 현장에 남은 카메라들의 역할과 기록이 투쟁이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사회적 연대 기록 활동 '타임라인'. 출처: 포럼 발제자료

1. 1980년대-2000년대 

1980년대 영화운동의 태동기에는 민주주의도 함께 태동하던 시기였다. 어떤 영화에 따르면 영화과 학생들은 남들이 잠든 시간에 비디오 필름을 편집하고 복사하고 배포하며 전국의 학교와 노동 현장에 뿌려 민주주의를 도모하기도 한 그 시절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엄격하게 통제된 그 시절에 필름은 민주화운동을 타고 날아다녔다. 예시로는 노동 현장에서 파업 선동을 이유로 영화 <파업전야>(1990, 장산곶매)가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상영”을 투쟁이란 이름을 걸고 투쟁 상영을 벌이기도 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사회에서 미디어 활동가들은 ‘대안미디어 활동’을 위한 크고 작은 단체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인권영화제와 같은 독립영화제와 지역별 시네마떼끄가 생겨나고 (사)한국독립영화엽회가 창립이 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노동자뉴스제작단, 서울영상집단, 바리터, 장산곶매, 푸른영상과 같은 영상팀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함께 공동으로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고 현장에 결합하기도 하며 다양한 연대적 제작 방식이 생겨났다.

억압의 시절에 검열과 제한으로 오히려 더욱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가 사람들에게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들이 제작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2. 2000년대 온라인, 스크린, 퍼블릭액세스 공공영역의 발견

본격적으로 이 시기부터 민주주의는 발전하면서 환경이 대단히 자유로워졌다. 아주 짧은 사이에 공동체 미디어가 확대되고 온라인, 스크린, 퍼블릭액세스와 같은 공공의 영역이 발견되면서 다양한 매체가 발전했다. 단순히 필름을 만들고 배급하던 1980-90년대와 달리, 시청자가 직접 참여하는 시민방송RTV가 개국하고, 7개의 공동체 라디오가 주파수를 통한 정규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한국독립영화협회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 거버넌스로 출발한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가 개관하고, 각 지역에 미디어센터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센터에서 미디어교육을 받으면서 일명 “미디어 활동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디어 환경은 온라인 성장과 더불어 카메라가 더 이상 필름이 아닌 파일로 대체되며 다양한 주체들이 다양한 공간과 현장에서 다양한 미디어로 창작과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배급을 하게 된다.

또, 운동적으로는 시민단체가 아닌 영화운동이 주체가 되는 과정을 이 시기에 겪게 되었다.

이마리오 감독은 이 시기를 “‘참 좋은 시대에 활동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특히 미디액트라는 근거지가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이주노동자 프로젝트>의 경우 이주노동자들이 결집되어 있던 명동성당과 광화문에 있던 미디액트를 오가며 새벽에 몰래 인터뷰를 진행했던 기억을 꺼내며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미디액트에는 필요한 카메라와 조명, 마이크 등 장비가 있었고, 세팅할 수 있는 공간까지 존재했기 때문에 시도가능했던 프로젝트였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현장의 다양한 이슈들을 모두 수집하고 기록하고 싶었지만 한 사람이 모두 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와 같은 옴니버스 방식으로 한국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고 했다. 영화제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볼 수 있도록 당시 존재했던 한독협 배급팀과 참세상이 붙어 온라인 배급을 가능하게 했고 1,019회 다운로드를 확인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현장에 접근하고 배포하는 경험치들이 중요했던 시기라고 이야기했다.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이주노동자인터뷰프로젝트(2004년) 출처: 포럼 발제자료

넝쿨 감독은 이 시기에 미군기지 확장 반대 지킴이로서 마을 방송을 하는 프로젝트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현장의 특성상 생업을 접고 본업을 떠나 빈집에 들어가서 반대와 찬성을 함께 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먹고 자며 활동해야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지킴이들 중에서 저희가 제일 부자였어요. 기름보일러의 기름이 비싼데, 저희는 늘 기름 한 통이 더 있었거든요”라며 안정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기반에 대하여 설명했다. “‘시민방송RTV’에 일주일에 10분짜리 영상 6개를 만들어 제공하면 납품을 댓가로 받은 비용으로 운영을 하고, 장비를 사며 활동을 할 수 있었다”며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미디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3. 2009-2018 정책파행과 블랙리스트를 넘어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설치된 방송통신위원회는 이처럼 안정된 미디어 활동들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함께 만들어온 퍼블릭액세스 정책을 대부분 파행하기 시작했다. 예시로는 시청자 참여 RTV의 예산 80% 삭감을 시작으로 영상미디어센터와 예술영화전용관과 독립영화전용관에 대한 예산 축소 및 중단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민주화된 사회에 재뿌리기로 정부 정책에 반하는 작품 상영금지를 하기도 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정부 비판적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을 배제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디어 활동가들은 또 다른 방식의 활동 모델을 실험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기존의 옴니버스 제작 방식을 따라가되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팟캐스트 등으로 현장을 중계하기도 했으며 텀블벅과 소셜펀딩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미디어 활동에 시민들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때에는 기계적으로도 카메라가 가벼워지기도 했으며, 일반인들도 인터넷 방송 송출이 가능한 기술을 가지게 되면서 조금씩 카메라의 무게와 현장의 감각도 변해갔다.

변성찬 평론가는 사회를 보며 “2000년대 다큐멘터리 영화계의 가장 큰 기획자는 이명박이었다”고 할 정도로 계속해서 사회적 이슈와 카메라가 필요한 현장이 생겼고, 카메라가 함께 했으며, 다양한 영화가 나왔다고 말했다.

이에 넝쿨 감독은 “그렇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용산참사가 발생했을 때, 이미 빠르게 각종 미디어 생태계가 무너져있어 생계가 어려워진 상황이 발생했어요”라고 이어 말했다. 어쩌면 지속 가능한(안정적인 활동 배경) 환경을 정책, 제도화에 기대어 유지할 수 있었음에 남긴 숙제와 고민들이 있다는 점이 생겼고 이후로도 활동가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가면서 여전히 지금도 어려운 숙제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으로 인해 많은 사회적 이슈가 있었지만 무려 7개의 영화가 나온 배경인 용산참사는 주목할 지점이 있다고 했다. “용산참사 이전에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의 규모가 대단히 커지고 아프리카TV라는 플랫폼이 활성화되면서 1인미디어 생태계가 빠르게 넓어졌어요. 시민들은 당시 사회적 이슈를 뉴스가 아닌 아프리카TV로 언론보다 더욱 빠르게 직접적으로 접하게 되었고요. 그때의 카메라들이 계속해서 용산이라는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기록하고 있었던 거죠”라며 많은 영상이 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하여 설명했다.

<용산 촛불미디어 센터, 촛불방송국 ‘레아’>는 실제로 철거민과 미디어 활동가들을 지원하면서 상징적인 공간으로 여겨졌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인권활동가, 예술가 등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공간이 되자 갤러리, 카페가 생겨나며 ‘복합투쟁문화공간’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직접 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런 방식으로 현장을 지키는 공간을 만드는 작업은 이후 명동 앞 작은 용산으로 불리었던 칼국수가게 ‘두리반’에서도 지속되었다.

용산 촛불미디어센터, 촛불방송국‘레아’(2009년 1월~ 2010년 2월) 출처: 포럼 발제자료

이어 이 시기 후반에 활동을 시작한 하샛별 활동가는 이마리오, 넝쿨 감독과 다르게 “저는 정말 가장 어려운 시기에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말문을 떼었다. 대학을 다니며 이마리오 감독님의 작품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잘 싸우지?’라는 고민을 하던 중 미디어센터에 방문하게 되었고, (미디액트가 일민미술관에 있던 시절) 근처 대한문에 쌍용차 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했다기에 잠시 둘러보러 갔다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미디어 활동가 삶에 대해 설명했다. “제가 카메라를 들기 전에는 칼라TV라는 진보매체가 꾸준히 대한문에 연대하고 있었고, 노동자뉴스제작단 활동가가 있었어요. 그런 선배들과 현장에서 만났고, 당사자가 함께 모여 어떤 역할을 할지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하면서 제 역할을 가지게 되었고요.”

이어 “투쟁하는 당사자가 아닌 미디어 활동가들끼리 영화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작지원을 냈던 곳이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라는 조직이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집행위원으로 10년째 함께 하고 있고요.”

(*필자 주: 현재 제12회를 맞이하는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는 수년간 현장을 지켜온 미디어 활동가 이상현, 김석천 활동가의 황망한 죽음 이후, 현장 영상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노동자들과 시민들, 센터들이 모여 현장을 지키는 활동가들에게 그야말로 생계유지와 작업을 위한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이 시기를 필자는 특히나 눈여겨 보았다. 네 명의 토론자 중 세 명의 토론자가 거의 이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지만, 각각의 시작의 계기나 제작환경의 변화를 체감한 게 모두 달랐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필자도 이 시기에 미디어 활동을 시작했지만 세 사람의 경험과 모두 달랐다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정치적,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현장의 영화들이 많았으며 배급과정도 직접 배급이 자유로워지고 지역마다 영화제가 생기며 관객과도 더 깊이 있고 긴밀하게 연결되는 시기라고도 회상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사회적 이슈를 보편적인 개인의 감정과 인간적인 경험에 접근하게 되기도 했는데 이런 배경에는 다양한 미디어 활동가들과 주민들이 현장에서 만나 정치, 경제, 노동, 환경 등을 이야기하는 옴니버스 프로젝트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지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시로는 <4대강 살리기 옴니버스 “江,원래”>, <복지갈구화(畵)적단 - 너네 동네 살만하니?>, <밀양 송전탑 투쟁 연대를 위한 미디어 활동 “밀양, 반가운 손님”>,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밀양, 충북, 제주> 등이 있었다.

라디오, 영상을 넘어 노래와 잡지, 영화로도 매체가 다양해졌고, 플랫폼의 다양화에 따라 빠른 중계와 속보 영상들이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다양한 지역에서 연령과 성별과 이력이 다양한 미디어 활동가들이 함께 만들고 상영 기획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2014년 세월호참사가 일어나며 미디어 활동가들은 짧은 기간에 짧은 기록을 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참사의 진상규명이 어려워지면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카메라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미디어팀’으로 시작해서 ‘4.16연대 미디어 위원회’로 활동을 오랜 기간 동안 이어가야만 했다. 기간이 길어진 만큼 100여명의 활동가들이 세월호참사 현장에 머물면서 다양한 기록과 많은 속보 영상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옴니버스 영화 외에 장편영화 제작을 하며 현장의 기록을 이어 나갔다.

4.16연대 미디어 위원회(2014~2018년) 출처: 포럼 발제자료

이명박 정권 이후 이미 공적 지원이 사라져 조직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고 이에 따라 개인 활동으로 전환되는 아쉬운 결정을 2018년에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경험들은 2016년 박근혜정권퇴진행동 미디어팀으로 함께 이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많은 미디어 활동가들이 틈틈이 결합하며 지켜야 할 기록 방향과 운영원칙들을 정리하면서 큰 규모의 집회를 촘촘히 아카이브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또, 이러한 아카이브를 안전하고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협력체계가 만들어졌고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환경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4. 2019년-現 재난 불평등의 시대

공적 지원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안정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써온 것들에 또다시 “COVID19”라는 위기가 닥쳐왔다. 사람들은 더 이상 모여서 공동체상영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영화관은 텅텅 비어있었다. 전반적으로 연결되어있던 시민사회 운동, 미디어 운동 등의 연대와 결속력이 떨어지게 되면서 생계와 지속성이 더욱 위협받으며 악화되었다. 대부분의 미디어 활동가들은 카메라를 들 현장이 이때부터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집회, 시위가 일단 어려워졌고 투쟁은커녕 당장의 노동환경 속에서 건강을 보장받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절망으로 느껴진 것은 사람들이 오롯이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영상의 형태가 유튜브 짧은 숏폼이나 OTT와 같은 특정 콘텐츠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현장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2022년 3월 윤석열정부가 들어서면서 소외된 투쟁 현장을 시민사회 운동계가 모여 문정현 신부와 함께 3월 15일부터 4월 30일, 약 40여 일 기간동안 <다른 세상을 만나는 40일 순례>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현장을 연대 방문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현장에서 카메라를 다시 들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낀 채로. 순례단의 여정을 팔로잉하는 카메라를 시작으로 각 순례단이 투쟁현장에 들를 때마다 한 개씩 주제를 잡아 또다시 옴니버스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총 18편의 영상으로 아직도 투쟁의 현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미디어 활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2024년에는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POV 지원과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로부터 지원받아 <봄바람2: 다시 바람이 분다>를 제작하고 상영도 하였다.

마지막 토론자인 스튜디오R의 양동민 활동가의 활동 시작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2014년도 대학 신입생 때 세월호참사를 마주했어요. 총파업과 박근혜 퇴진을 이야기하는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고요. 그러다가 2017년에 군대에서 현장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계속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아르헨티나와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지역 운동이나 주변화된 운동들을 연결해주는 미디어 운동을 목격했고, 한국에 돌아가면 예전처럼 글이 아니라 미디어로 활동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LG트윈타워 현장의 청소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구조조정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가서 5개월 동안 찍었어요. 사실 별로 많은 조회 수를 가지지도 못했고,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다가 양동민 활동가는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의 제작지원을 받으며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여전히 자신과 같은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되었다고. 계속해서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이후에 작업한 “국민건강보험 직접고용 투쟁에 대한 영상을 올렸는데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어요. 시험을 치고 들어간 정규직과 시험을 치지 않은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 것이 과연 맞냐는 사람들의 논의를 이끌어 냈어요. 그런 경험으로 ‘아 되게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는데, 사실 역량과 현실 그 중간에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커졌고요.” 유튜브 채널이 익숙한 시대에 결과적으로 누가 이 영상을 보는가에 대한 설정이 어려워 보였다. 알고리즘으로는 재밌지 않아 잘 먹히지 않는 이슈이다 보니 어려웠고, 오히려 빠르게 영상을 전달하고 기록된 영상이 당사자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쪽으로 또, 사람들 간에 설득하고 연결을 할 수 있는 영역으로 활동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현장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 유튜브나 OTT라는 매체가 의미있기 위한 시도들은 다양하게 지속해왔다. 유튜브에 <닷. 페이스>라는 채널이 존재했으니까. 대중들은 아주 접근이 쉬운 형태로 채널 속에서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하기도 했고, 현장을 마주하기도 했다. 미디어 활동가들도 옆에서 지켜보며 진보적이었고 독보적인 채널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생에 실패한 경험까지도.

다른 세상을 잇는 미디어 프로젝트 ‘봄바람 시즌1, 2’ (2022, 2024) 출처: 포럼 발제자료

그리고 현재 2024년.

필자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이어져있다. 2022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이 세월호 현장을 이어 지키고 있다. 그리고 노동 투쟁 현장과 젠더의 현장에서도 이주노동자 현장에서도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고.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장들인 밀양에서도, 안산에서도, 목포에서도, 비자림 숲에서도, 4대강 보의 현장에서도 꺼지지 않는 용광로처럼 이슈가 있을 때마다 “나의 현장이야”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카메라를 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에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제 다른 곳(현장이 아닌 곳)을 찍어도 너는 잘 할 거 같아”라고.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나 혼자 지킬 곳 없는 어떤 곳에 덩그러니 카메라와 서 있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현장에서 늘 가장 가까이에 추워도, 더워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항상 서 있을 수 있던 이유는 여전히 내가 혼자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무용한 무엇을 함께 지키려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니까.

우리를 연결하는 것들은 아마도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어떤 것들을 연결하기 위함이 아닐까? “거기 너 있어?”, “응, 나 여기 있어!”, “너 보고 있어?”, “응, 나 보고 있어!” 서로의 괜찮음과 안부를 카메라로 물으며 어려웠지만 이겨내고자 연결했던 시간들을 정리해 본다.

아무튼! 우리는! 연결이 되어 있다니까! 

덧붙이는 말

다큐멘터리영화 감독이자 영상미디어 활동가. 이번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겁도 없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이유를. 많은 활동가와 이 세계가 나를 겁쟁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 함께 서 있어 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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