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민주주의
1957년 5월 25일 오후 장충단공원에 20만 명이 모였다. 국회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가 시국강연회를 여는 날이었다. 1958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이 선거법을 바꿔 출마 조건을 까다롭게 해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데 항의하는 장외 강연회였다. 한창 연설이 이어지던 때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급기야 돌과 병을 연단을 향해 던졌고 연사 앞 책상을 뒤집어엎고 마이크 조정기에 불을 질렀다. 3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난동을 부렸지만 이를 막을 경찰은 한참 후에 나타났다. 강연회는 중단되었다. (동아일보 1957.5.27.) 이 사건은 ‘정치깡패’에 의한 것으로 권력기관의 묵시적 지령, 적어도 묵인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세간에는 “못 잡는 것이냐 안 잡는 것이냐”는 말들이 오갔다. 현장을 지휘했던 유지광만 재물손괴죄로 기소되었다.
깡패가 권력을 보위하던 이 시절은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박사’라 칭송받던 이승만이 대통령이던 때였다. 이승만은 1948년 7월 21일 국회 재석의원 196명 중 180명의 표를 받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 결과를 전해 들은 이승만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의 권리보다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며 이후 대통령에 취임해 정부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서는 입헌정신에 입각해 정부 권력이 일부에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동아일보 1948.7.21.)
이승만은 ‘민주주의 수호’에 민주주의 장치 이외의 무력을 동원했다. 1957년 장충단 사건 외에도 백골단, 땃벌떼가 동원된 정·부통령 선거(동아일보 1952.8.7.), 단성사 저격 사건(1955.1.29.), 선거 등록 방해와 취재 기자 테러(1960.2.), 고대생 습격 사건(1960) 등이 대표적이다. 폭력에 기반한 이승만의 민주주의는 “3.15 협잡 선거 무효”를 외치며 일어선 학생들에 의해 균열이 시작되어 4.19혁명으로 끝났다. “이 박사 타도로 새로운 민주주의”가 오는 듯했다.
경재개발의 민주주의
1963년 10월 5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주의 논쟁이 벌어졌다. 박정희 공화당 후보는 무분별한 서구풍의 민주주의를 가리켜 ‘가식된 민주주의’라 명하고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해 한국에는 ‘자주적 민족주의’가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일부 특권층의 화장품 역할에 그쳤다며 경제적 구조, 사회적 풍조, 국민의 가치관 등 일체가 전근대적이기 때문에 총체적인 근대화를 이뤄야 자유민주주의의 꽃이 핀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민정당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의 주장을 ‘이질적 민주주의’라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란 민중의 투쟁과 저항이라는 상향식 방법으로 이뤄졌고 우리도 다르지 않아, 국민의 정치적 궐기와 각성과 잘못된 정치 규탄과정을 통해 성장해 왔고 앞으로도 이러한 민주주의 성장 유형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발의 기반이 국민에 의하고 있음에도 무장한 정치세력이 우격다짐과 총칼의 엄호하에 하향식으로 ‘이단’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향신문 1963.10.11.)
한국 현대사의 주요 논쟁으로 꼽힐만한 것이었지만, 당시 많은 이들이 개탄한 대로 이 민주주의 논쟁에 인텔리와 학생, 도시민 외 유권자 대부분은 관심이 없었다. 민주주의 논의보다는 수출을 늘리고 물가를 억제하고 실업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그 속에서 농민, 어민, 노동자, 소시민에 기반한다는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가 승기를 거머쥐는 듯했다.
‘우리 민족은 찬란한 역사를 가졌으니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적 미래로 나아가자’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모두에게 주어졌다. 수출 증대를 위한 고통, 불만족은 민족의 앞날을 위해 접어두고 새마을 운동, 생산성 향상 운동에 매진할 것이 강요되었다. 민주주의 요구는 “사치스런 정치놀음”이 되었다. 이른바 시월유신은 그러한 생각이 역사적으로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평화적 통일의 지향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해 구질서를 청산하고 통일을 향한 민족 주체세력을 형성하며 능률의 극대화, 자주적인 총력체제의 구축을 방향으로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권력 집중의 폐해를 방지하는 모든 제도적 장치를 해체하고 오히려 모든 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하겠다고 했다. 민족적 민주주의가 한국적 민주주의로 그 이름을 바꿔 등장, 더욱 강화된 것이다.
언론, 학자 중 이를 옹호하고 나서는 이들이 많았다. 국회, 법원은 의미 없는 건물이었고, 헌법도 종이에 불과했다. 저항에는 긴급조치로 대응했다. 이렇게 박정희의 민주주의는 민족적,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뒤집어쓰고 독재체제를 구현하는 담론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하지만 여기에도 균열은 생겼다. 긴급조치와 비상계엄 속에서도 반독재운동이 이어졌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운동’으로 경제개발, 수출 증대에 의탁한 박정희 민주주의를 밑에서부터 흔들었다. 하마터면 ‘토착화’될 뻔한 박정희식 민주주의는 정지되었다.
법치의 민주주의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실체를 잃고 표류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법치는 사실상 없었다. 헌법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의회가 아닌 국가재건최고회의 같은 초헌법적 비정상 기구에서 법이 만들어지고, 군부에 의해 만들어진 억압기구가 권력을 행사했다. 쿠데타와 광주 학살로 박정희의 대한민국을 물려받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그랬다. 1987년 6월 항쟁과 이어진 노동자대투쟁 전까지 민주주의는 저 먼 곳에 있었다.
‘6.29 민주화 선언’ 이후 여당과 야당은 머리를 맞대고 헌법과 각종 법을 고쳤다. 대통령은 직선으로 뽑고 국회와 행정부의 균형을 위한 장치를 뒀으며 사법부를 강화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 의무화, 언론 검열 폐지,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보장 등 독재체제를 떠받쳤던 헌법을 손보았다. 제도는 일찌감치 도입되었으나 설치되지 않았던 헌법재판소도 이때 부활했다. 헌재는 독재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고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기관이었다. 그럼에도 ‘제왕적’ 대통령제, 결선투표 없는 선거방식,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방지책 부족 등 다시 독재로 회귀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부족하다는 문제제기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거리에서 외쳐진 민주주의에 여당과 야당은 법의 옷을 입혀 놓았다. 물론 ‘민의’를 모은 헌법개정 투표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 이후에도 법치 민주주의는 편향적이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의 구속노동자 수만 보더라도 그렇다. 1988년 80명, 1989년 611명, 1990년 492명, 1991년 515명, 1992년 274명, 1993년 46명, 1994년 160명, 1995년 176명에 달한다. 반면 재산 해외 도피, 노태우 비자금, 뇌물 등으로 ‘시련 시대’를 맞았던 재벌총수들은 ‘조용해지면’ 사면복권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법치는 노동자의 자유를 확장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진정한 민주주의 보장책이 아니었다.
참세상 자료사진
새롭지만, 역사적인
2022년 5월 10일 임기를 시작한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내내 검찰과 언론, SNS를 동원하는 정치를 했다. 친위 쿠데타 이후엔 노골적으로 여당의 국회의원까지 동원하고 헌법 위에 군림하는 권력 앞에 각종 제도는 무용지물이었다. 한국사회 권력층에 포진한 소위 민주화 386세대의 숭고한 자긍이 무색한 일이었다.
지난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본래 광장으로부터 잉태된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방향이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변질될 때마다 광장이 등장했고, 광장의 민중들은 헌법적 기본권을 되찾고 부조리와 독재에 저항하는 사회적 진지를 형성했다.
오늘의 광장에도 차별과 혐오를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기하는 세대가 구축되고 있다. 이들은 역사의 한계가 미처 조명하지 못했던 불안정노동자, 장애인, 퀴어 등을 호명하며 기성의 운동을 새로운 세대의 문화와 패러다임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셸 푸코는 68혁명 이후의 사회적 바리케이드는 현실정치의 구도나 논쟁 속이 아니라 민중 속에 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의 바리케이드 또한 언제나 민중 속에 존재했다. 세대를 넘어 단결하고 도시와 농촌의 삶이 연대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깃발이 다양하게 올려지고 소수자의 목소리도 들리는 그곳, 거기에 우리의 민주주의가 있다.
- 덧붙이는 말
-
정경원은 『전노협백서』 발간을 계기로 노동운동 자료를 모으고 노동자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2008년 이후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역사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가스공사노동조합 30년사』, 『서울지하철노동조합 30년사』 등이 있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