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오컬트의 시작이자 한국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장르 소설.”
요즘 극장 개봉 중인 애니메이션 <퇴마록>(2025)의 원작 소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은 1990년대 말에 개봉했던 영화 <퇴마록>(1997)의 원작이기도 했다. 당시 포부도 당당하게 스스로를 ‘한국형 블록버스터’라고 선언했지만,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작품성에 있어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나는 박신부를 연기했던 안성기 배우의 앞니에 붙어 있던 팽(fang, 뱀파이어의 송곳니)이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터트린 한탄(혹은 웃음)을 잊지 못한다. 그렇다면 28년 후 찾아온 애니메이션은 어떨까? SNS 상의 분위기로 봐선 원작 팬과 애니메이션 팬, 그리고 오컬트물 팬을 두루 만족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밝히자면, 나도 꽤 재미있게 봤다.
<퇴마록>과 더불어서 최근 나를 사로잡은 또 한 편의 오컬트물이 있다. 일본의 SF 퇴마물 <단다단>이다. 두 작품은 모두 ‘퇴마’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작품의 전반적인 공기랄까 결이랄까가 꽤 다르다. <퇴마록>이 20세기 후반의 정서를 고스란히 유지하며 묵직한 톤으로 세기말적 정서를 드러낸다면, <단다단>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메챠쿠챠(めちゃくちゃ, 엉망진창)’다. 어느 정도냐면, 보다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게 21세기 포스트-포스트모던 힙인가?” (물론 아무 말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퇴마록>이 고전적이라면 <단다단>은 딱 2020년대의 혼란에 걸맞다. 그리고 이 차이는 단순히 스타일의 차원이 아니라 서사와 주제의식의 차원으로 수렴되고, 따라서 두 작품을 비교하는 것은 퇴마 서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변화의 기록을 살펴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퇴마록>: 아직까진 20세기의 유산을 붙들고 있는 21세기의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퇴마록>은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이미지들이 많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공개된 1편만 놓고 보았을 때 (작품의 영어 제목이 ‘Exorcism Chronicles: The Beginning’이므로, 이 시리즈는 이제 시작일 터다.)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는 스타일적 매혹과 별개로 서사는 여전히 20세기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야기는 절대악의 힘을 얻기 위해 인간을 재물로 바치는 해동밀교 145대 교주에 맞서는 다섯 호법들의 고군분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타락한 교주에 맞서기 위해 이들은 새로운 조력자를 찾아 나서고, 그 과정에서 ‘중년 남성’ 박신부와 ‘청년 남성’ 현암, 그리고 ‘소년’ 준후가 거대한 악과 맞서게 된다. 나를 다소 지루하게 만들었던 건 건 이야기가 이처럼 남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여성 캐릭터들은 여느 진부한 남성 서사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매개’로 기능한다는 점이었다.
박신부는 의사 시절, 악마에 빙의된 소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퇴마 신부가 되었다. 그때 지키지 못했던 소녀는 시시때때로 그의 정신세계에 틈입해 들어와 그의 판단과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현암이 무공을 익히고 결국 해동밀교 본산으로까지 찾아오게 된 이유 역시 비슷하다. 그를 움직이는 건 지키지 못한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그리고 분노인 것이다. 해동밀교 대대로 내려온 ‘예언 속의 소년’ 준후의 이야기라고 해서 크게 새롭진 않다. 그의 서사는 전형적인 (<스타워즈>의 대사로 유명한) “내가 니 애비다” 서사의 궤도를 따른다. 양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자란 준후의 진짜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야 “사랑한다 준후야”를 시전한다. 아버지와 대면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각성하는 준후는 거악에 맞서고 위대한 영웅으로서의 첫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소년은 자란다.’
살면서 이런 줄거리는 이천삼백오십 번쯤 본 것 같다. 나에겐 지루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친숙함이야말로 <퇴마록>의 강점이자 셀링 포인트일 수도 있겠다. 어떤 것도 충분히 진지해지기 어려운 요즘 같은 시대에 거대한 악에 맞서 세상을 구하려는 고독한 남성 영웅,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까지 누이의 복수를 다짐하는 진지한 오빠,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지만 끝내 아버지를 잃고 만 아들만큼 무겁고, 진지하고, 비장한 것은 없다. 수천 년의 가부장제가 단단하게 구축해 온, 우리 가슴 속에 DNA처럼 묻어들어 있는 근원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쩌면 ‘클리셰’, 아니 ‘클래식’의 의미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1편까지는 아직 그 활약상 스위치가 켜지지 않은 여성 영웅 승희도 있다. 그는 작품 초반, 박신부가 악마와 대결하던 순간 인상적인 일격을 날린 뒤 기절했고, <퇴마록> 1편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쭉- 누워있다. 과연 우리는 2편에서 과연 살아 숨 쉬는 승희의 또 다른 모험담을 만날 수 있게 될까? 하지만 1편에서 그에게 주어진 쿠키 조각은 ‘보고 싶은 언니’와 ‘아빠’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언니와 아빠는 승희에게 또 어떤 ‘비장’한 이야기를 열어줄까? <퇴마록> 팀이 고전의 가치를 당대적으로 되살리는 ‘킥’을 발견할 수 있기를 관객으로서 기대하게 된다.
<단다단>: 가벼움 속의 급진성
반면, <단다단>에선 비장함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영매사 할머니 밑에서 자란 ‘모모’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외계인 신봉자이자 오컬트 매니아인 ‘오카룽’은 사소한 말다툼을 하게 된다. 귀신은 믿지만 외계인은 없다고 주장하는 모모와 외계인은 있지만 귀신은 없다고 믿는 오카룽 사이에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대결. 결국 두 사람은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모모는 UFO 스폿인 폐병원으로, 오카룽은 심령 스폿인 터널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이해를 초월하는 압도적인 괴기와 조우하게 되는데...”
그리하여 밝혀지는 진실이란, 지구인의 재생산 능력을 탈취하려는 외계인과 남자들의 외부성기만 골라서 탐하는 늙은 악귀가 존재한다는 것. 그들과 맞서면서 모모와 오카룽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초능력을 얻게 되고, 인간계를 위협하는 순수 악과 대적하게 된다. 그리고 풋풋한 사랑의 설렘도 시작된다.
<단다단>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황당하다. 사실은 꽤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이를 풀어가는 에피소드들은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유머러스하다. 동시에, 작품이 뿜어내는 이 황당한 에너지는 기존의 소년 만화 서사를 뒤트는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오카룽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며 어떻게 성장해 나가야 할지 모르는 혼돈 속에 머물러 있는 반면 모모는 활달하고 주도적이며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로, 이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동기 부여자다. 그런 둘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구적 스케일과 현생의 차원을 뛰어넘는 거대한 위협이 시시때때로 닥쳐온다. 이 역시 대략 이백칠십오 회 정도 본 것 같은 ‘세카이계’의 설정이다.
하지만 <단다단>에서 서사적으로 대상화되는 ‘최종병기’ 캐릭터가 있다면, 그건 모모라기보다는 오히려 오카룽이다. 이야기는 모모의 관점을 중심으로 그의 시간을 따라 흐르고, 오카룽의 시간은 군데군데 비어 있다. 그에게 시점이 주어지는 순간은 대체로 두 사람 사이의 연애 사건이 진척될 때다.
여기서 가장 황당하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오카룽의 ‘성기 실종’ 모티프다. 오카룽은 애니메이션의 초반부에 음경과 음낭(혹은 “기둥”과 “방울”)을 모두 잃어버린다. 이후로 각 에피소드는 오카룽의 ‘금붕알’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따라 구성된다. <단다단>은 남자를 남자이게 하는 것으로서 여겨지는 ‘단단한 성기’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에 대해 낄낄거린다. 한 번 변신하면 딱 두 번 전력을 다하고 사라지는, 오카룽의 제2의 분신이 그런 ‘남성성’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성기 실종 사건은 오카룽을 시스젠더 이성애자인 모모의 연인으로 만드는 것이 “기둥”과 “방울”이 아닐 수도 있음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실제로 모모는 오카룽의 성기 부재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오카룽이 자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주고 싶을 뿐.)
이 퇴마도 재미있고, 저 퇴마도 재미있다, 다만...
<퇴마록>과 <단다단>은 신체와 정체성을 다루는 방식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하게 차이가 나는 건 ‘악의 실체’를 상상하고 그려내는 그 상상력의 지반이다.
<퇴마록>에서의 악은 절대 악이자 인간을 초월하는 무언가다. 주인공들은 거대한 힘에 맞서 싸울 숙명을 타고난 존재들이며, 필연적으로 막중한 짐을 짊어진 ‘선택받은 자들’이기도 하다. <단다단>은 추상적인 절대악보다 이 사회에서 나고 자란, 보다 구체적인 폭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컨대 오카룽의 성기를 훔쳐 간 ‘터보 할멈’이 음경과 음낭을 수집하게 된 건, 남자들에 의해 살해당한 수없이 많은 소녀들의 원한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퇴마록>은 순수한 악이 있으매 지금 이 사회가 이처럼 타락하였다고 생각하고 <단다단>은 우리가 사회를 이처럼 만들었으므로 그로부터 험한 것들이 튀어나왔다고 상상한다.
그건 물론 두 작품이 기대고 있는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단다단>은 남성 폭력이 여성에게 위협이 되는 세계를 다루고, 모모와 그의 친구들은 그 세계에서 ‘여성 신체’와 어떤 ‘남성 신체’에 닥쳐오는 다양한 폭력들에 저항한다. 피부로 와닿는 싸움이다. 게다가 외계인들이 노리는 것이 인간 청년들의 생식능력이라니, 이 역시 얼마나 우습고도 현실적인가.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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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 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이며,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프로젝트38의 멤버이다. 저서로는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