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질서는 거대한 지각 변동을 겪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반 천년 만에 찾아온 변화인 것 같기도 하다. 지난 500년 이상 세계질서는 유럽 그것도 서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돼왔다고 할 수 있다. 서방의 득세가 시작된 역사적 분기점은 흔히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의 페란도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1492년으로 꼽힌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여 비유럽지역에 대한 유럽의 제국주의적이며 약탈적인 진출에 물꼬를 튼 해이기도 하다.
15세기 말 이후 서구는 비서구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자본주의적 세계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세계 곳곳으로 진출했다고 해서 서구가 곧바로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아니다. 18세기까지도 오스만이나 중국 등 세계에는 서구와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비서방 제국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계가 자본주의적 체계로 작동하게 되면서 서구의 위력은 계속 강화되었고, 반면에 비서방 세력은 갈수록 약화한 셈이다.
1842년 10월 12, 신세계 신대륙의 산살바도르(San Salvador, W.I.) 해안에 첫 번째로 도착한 콜럼버스(Columbus). 출처 : 디오스코로 푸에블라(Dióscoro Puebla) - 미국 의회 도서관(Library of Congress)
서구의 부상은 기독교, 자본주의, 근대적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임과 동시에 비서구, 전근대 비자본주의, 비기독교 세계는 타자화되어 학살과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 되는 과정이었다. 그와 같은 흐름 또는 ‘서세동점’이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결과인 제국주의가 창궐하여 세계 수많은 지역과 나라가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19세기 후반이다. 한국도 이때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고 급기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서세동점은 20세기 말에도 불변의 대세처럼 보였기에 그 흐름에 동참한 비서방 국가들도 적지 않다. 그런 점은 오늘날 ‘집단서방’으로 불리는 나라들에 유럽 이민자들이 건국한 미국이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물론이고 일본과 한국처럼 비유럽 아시아국까지 포함되는 데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유럽에서 기독교 세력에 의한 이슬람 세력의 축출이 일어난 1492년 또는 15세기 말 이후 500여 년이 지난 이제 ‘서세동점’의 장기 지속은 종언을 맞은 듯싶다.
서구나 구미, 서방, 나아가서 집단서방의 추락을 보여주는 징후는 차고 넘친다. 지난달 10〜11일에 미국의 워싱턴에서 열린 제75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의 모습도 단적인 한 예다. 나토는 군사 동맹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1949년에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 12개국이 결성했는데 이제는 32개국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나토의 외형상 성장은 집단서방의 군사적 위력이 계속 강화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격적인 세 확장과는 별도로 나토의 실상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난번 회의에 참석한 주요 회원국 정상들의 모습에서도 그런 점이 역력했다. 회의가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토가 수호한다는 ‘자유세계’의 수장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보여준 모습은 가련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으로 부르며 피아를 구별하지도 못하는 무능을 드러냈다.
바이든의 혼동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해프닝일 뿐이라면, 나토의 위상 추락을 보여주는 현실은 매우 엄중하다. 나토국가들이 총력 지원을 해온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속절없이 패퇴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한 예다. 최근에 들어와서 우크라이나군은 전선 전체에서 대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7월 한 달 우크라이나군이 입은 사상자 수가 무려 60,000명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일방적 발표이니 믿을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러시아와의 협상 시도 자체를 불법화해온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최근에 협상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른 것도 전선의 현실로 인해 압박받은 결과일 공산이 크다.
지난 7월 18일 옌스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 NATO 사무총장은 영국이 주최한 유럽정치공동체회의에 참석했다. 출처 : NATO 공식홈페이지
서아시아에서도 미국과 나토는 무력함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자지구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하마스 세력이 작년 10월 ‘알 악사 홍수 작전’을 펼친 것을 빌미로 이스라엘이 가자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자, 나토와 미국은 그런 폭력행위를 노골적으로 방조해왔다. 그러나 몇 주 안에 하마스 지도부를 소탕하고 인질을 구출하겠다는 이스라엘 군사작전의 목적은 실현이 요원한 가운데, 가자에서는 민간인 그것도 60%가 어린이와 여성인 사망자가 8월 1일 현재 공식적으로 39,480명에 이른다(의학 전문지 『란셋』은 7월 초까지의 실제 사망자가 186,000명을 초과한다는 추산까지 내놓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가 이스라엘에 이미 집단 학살 혐의를 걸고 있는 가운데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포학한 살육이 그치지 않자 이를 방조하는 미국과 나토에 대한 세계인의 규탄도 하늘을 치솟고 있다. 국제법과 세계 여론을 무시하며 안하무인으로 극악한 살육행위를 자행하는 이스라엘을 서아시아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라며 무조건 지원하는 서방과 미국, 나토의 도덕적 위상은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나토의 도덕적 위상만이 아니라 군사적 위상도 크게 떨어졌다. 그런 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막강하다는 미 해군이 안사르 알라 세력이 주도하는 예멘군과의 군사작전에서 아무런 전과를 보여주지 못한 점이다. 팔레스타인 전쟁 발발 이후 예멘이 이스라엘 선적 또는 이스라엘행 선박의 홍해 통행을 금지하자, 미국은 물류대란을 막을 목적으로 영국 등과 함께 ‘번영 수호 작전’을 펼쳐 해역을 장악하려 했지만, 항공모함 아이젠하워가 공격받아 전역을 떠나야 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미국과 나토의 군사력이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동안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국가들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들로 구성된 나토는 한편으로는 회원국을 늘리며 세를 불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막강한 위력을 과시해왔다. 그러나 그런 위력은 군사적 약체국가나 비국가 단체에나 통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초강대국 러시아와의 대결에 직면하자 나토의 군사적 능력은 허장성세였음이 그대로 드러났고, 서아시아에서도 하마스, 헤즈볼라, 안사르 알라, 이란 등‘저항의 축’을 맞아 나토는 이스라엘과 함께 무능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잘하는 것이 없지는 않다. 무고한 민간인 살육에 동참하고, 반인륜적이며 반국제법적인 안하무인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 세계질서의 지각 변동을 예시하는 또 다른 징후는 비서방의 놀라운 굴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제국주의적 서방과 비교하면 비서방에는 아직도 열악한 처지에 놓인 국가들이 많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서 비서방에서 경제적 군사적 능력의 괄목할 성장으로 지리정치적 위상이 서방 어느 나라와도 뒤지지 않는 국가들이 출현한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중국과 러시아로, 비서방 세계는 지금 두 나라의 주도로 경제적으로는 브릭스, 군사 안보로는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중심으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나토 정상회의가 개최되기 일주일 전인 7월 3〜4일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에서 SCO 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난 뒤 채택된 선언문의 첫머리가 관심을 끈다. “세계의 정치, 경제, 그리고 기타 국제관계 분야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중이다. 더 공정한 다극적 세계질서가 태어나고 있다.”
지난 7월에 열린 SCO 정상회의. 출처 : SCO 공식홈페이지
SCO는 2001년에 출범했으며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이란, 인도 등 유라시아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가, 올해 벨라루스가 새로 들어와서 회원국이 10개국으로 늘었다. 회원국 외에 ‘대화 상대국’도 있는데 튀르키예와 사우디아라비아가 그런 나라다. SCO 회원국의 인구는 30억으로 세계의 40%를 차지하며, 영토 면적은 유라시아 대륙의 60%를 차지하고, GDP는 세계 GDP의 25%가 넘는다. 보다시피 SCO 회원국 가운데는 중국과 러시아, 인도 등 브릭스의 주요 국가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은 SCO가 미국이 주도하는 G7과는 다른 방향의 세계질서를 추구하며 브릭스와 협력관계를 추구할 것임을 말해준다. 올해 SCO 정상회의의 선언문이 국제관계의 ‘지각 변동’, ‘더 공정한 세계질서’를 언급한 것은 비서방의 주요 국가들이 나토와 G7이 강요하는 국제관계가 공정하지 않음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과 다르지 않다. SCO 선언문은 비서방이 그동안 서방이 전개해온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즉 다극적인 세계질서를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비서방이 앞으로 서방과 적대적인 대결을 벌이겠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서방과의 국제관계에서 비서방의 자신감 표명인 것은 명확해 보인다.
500년 또는 반 천년 넘게 작동해온 서방 제국주의의 지배가 바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서방의 맹주인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고, 경제력 또한 적어도 명목 GDP로는 세계 최대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의 국력도 여전히 막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서방의 전통적 강국들의 쇠퇴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특히 2010년대 중반 이후 집단서방의 핵심인 G7과 비서방의 핵심인 브릭스의 경제력을 비교해보면 최근에 중대한 변동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중국 경제의 굴기가 특히 놀랍다.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중국의 GDP는 2016년에 미국을 이미 추월했다.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준 것은 브릭스도 마찬가지다. 1992년 브릭스 국가들은 PPP 기준 GDP가 세계의 16.45%에 불과했고 G7은 45.80%나 되었으나, 2022년에 이르러서는 두 진영의 지분이 역전되어 브릭스는 31.67%, G7은 30.31%가 되었다.
지금 인류는 역사상 새로운 변곡점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있다. 지난 500년 지배적 위상을 누려온 자본주의적 세계체계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서방 세계가 자발적으로 그동안의 지배를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쟁, 팔레스타인 갈등에서 미국 등 서방은 기존의 헤게모니를 관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7월 28일 대선을 치르고 ‘21세기 사회주의’의 주창자 우고 차베스의 후계자로 차베스가 시작한 볼리바르 혁명을 잇고 있는 니콜라스 마두로의 3선이 확정된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도 우크라이나에서 일으킨 마이단 쿠데타와 유사한 정변을 일으키려는 중이다. 그래도 세계체계가 지금 거대한 변동을 겪는 중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세력이 그동안 주도해온 국제관계가 해소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지, 새로운 세계질서는 과연 자본주의적 세계체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지 눈 뜨고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세계의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 관건이라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극복할 실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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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는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으로 중앙대학교 교수, '문화/과학' 발행인, '문화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참세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의 생김새』, 『길의 역사』,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