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제3권에서 칼 맑스가 언급하는 다음 내용은 어지간히 충격적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대한 1861년의 인구조사에서는 인구 20,066,224명 중 가옥 소유자의 수는 36,032명이다”(맑스, 《자본》 제3권, 김수행 역, 798〜799쪽). 이 통계로는 19세기 후반의 영국인 가운데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낮다. 2천여만 가운데 3만6천 정도라니 0.2%도 되지 않는 수치인 것이다. 당시 영국은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로서 세계 최대의 부국이었다. 그런 나라에서 자기 집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 99.98%가 넘었다니 과연 사실일까 싶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국부가 아무리 많이 불어나도 노동력을 팔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꾸만 가난해진다는 것이 맑스의 주장이다. 맑스는 그런 사태를 《자본》 제1권 제25장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으로 부른다. 그 법칙에 따르면,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노동자의 상태는 그가 받는 임금이 많든 적든 악화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자본의 축적”은 “빈곤의 축적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가계급이 부를 축적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 측”에서는 반대급부로 “빈곤, 노동의 고통, 노예 상태, 무지, 잔인, 도덕적 타락의 축적”(879쪽)이 이뤄진다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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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말이 과연 사실일까? 자본의 축적이 이뤄질수록 직접 생산자 즉 노동자의 삶은 비참한 재앙에 빠진다는 것은 꼭 현실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오늘날은 노동하며 산다고 해서 비참하게만 살지는 않는다. 한국을 보더라도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이전보다 상당히 향상한 셈이다. 이제는 자기 집을 지닌 사람의 비율도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높아졌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주택 보유율은 61.3%로 옛날 영국의 0.2%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영국도 이제는 주택 보유율이 64.5%에 이르고, 미국은 65.6%로 높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노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중에는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좋은 물건들이 많다. 과거에는 커다란 건물에나 설치해야 할 정도의 컴퓨터 성능을 가진 소프트웨어 기능을 장착한 스마트폰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고, 자동차 보유율도 높다. 겨우 생명만 유지할 정도로 받는 임금 수입에서 집세까지 뜯기던 시기와 비교하면 오늘날의 노동자는 정말 큰 부를 누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맑스가 말한 축적의 일반법칙은 이제 무너졌다는 말일까?
맑스가 《자본》의 초고를 작성한 1860년대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그의 자본주의 분석은 이제 유효성을 잃었을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이 오늘날의 세태가 말하는 바 같기도 하다. 맑스와 그의 가르침은 이제 ‘죽은 개’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맑스의 전통에 조종을 울린 가장 큰 계기는 1990년 전후에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거 붕괴한 데서 찾아진다. 맑스주의를 기치로 삼아 코뮌주의를 지향하며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나라들이 줄줄이 무너졌으니 맑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불신이 크게 생긴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셈이다. 물론 반전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로 군림하는 미국에서 2008년에 거대한 금융위기가 발생한 데 이어 세계 경제가 장기불황에 빠지자, 맑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이 한 예다. 그래도 그를 죽은 개로 여기는 대세가 뒤바뀐 것 같지는 않다.
맑스가 규명한 축적의 일반법칙이 말하는 바는 자본주의에서는 부익부 빈익빈이 철칙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한국만 하더라도 지금 사람들은 ‘보이기로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는 고층, 초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고, 상가와 가게에는 화려한 상품들로 가득하며, 사람들은 소비자로서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쉽게 살 수 있는 듯 보이지 않는가. 이런 점은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곤, 노동의 고통, 노예 상태”에 필연적으로 빠지게 된다는 맑스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것 같다. 극소수 상층 계급이 주택 대부분을 소유하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인구의 다수가 자기 집을 갖게 되었으니 세상은 크게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을 가지면 더 좋을 테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낫지 않은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은 그렇다면 폐기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맑스가 말한 축적의 법칙은 가치의 법칙이지 사용가치의 법칙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생산력이 더욱 발전하고 그 결과 사용가치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양으로 증대한 것은 맞다. 사용가치는 유용한 것 일체로서 그것이 풍족하면 부가 증대한 측면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용가치는 대부분이 상품인 만큼 그 교환가치를 지불해야만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주택, 가전제품, 자동차, 스마트폰, 레저용품 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상품 더미는 한편으로는 사용가치로서 부를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그에 대한 교환가치를 지불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보유하거나 누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부 가운데 주택만 놓고 보면 자기가 사는 집을 온전히 ‘소유한’ 노동자는 사실 드물다. 대부분이 자신이 보유한 주택을 점유하는 것이지 소유한다고 보기 어렵다. ‘소유’와 ‘점유’는 서로 다르다. 주택의 점유자는 거기서 살 수는 있어도 주택의 교환가치를 다 지불해서 그것을 법적으로 소유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자가를 ‘보유한’ 노동 대중 가운데 주택을 법적으로 소유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람들이 주택과 관련해 예외 없이 엄청난 규모의 대출 즉 부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2020년 기준 한국인의 주택담보대출은 910조 원, 전세금 대출은 170조 원으로 둘을 합치면 1,080조 원이다. 이 결과 가구당 부채도 만만치 않아서 2023년 기준 평균 8,652만 원이고 1인당은 3,615만 원이다. 이 통계에는 부채가 없는 경우도 포함되어 있을 터이니 부채 가진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면 액수는 훨씬 더 클 것이다. 자기 명의의 주택에서 사는 사람도 그렇다면 대부분이 금융기관의 대출금을 어렵게 갚으며 살아간다고 봐야 한다. 자동차나 스마트폰, 기타 고가 상품을 할부 구매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물건을 매입하면 요긴한 사용가치가 집적되는 셈이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따르게 된다. 물건을 상품으로 구매한 이상 사람들은 그에 대한 교환가치를 지불해야 하지만, 현금 지불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신용을 활용하게 되며 그 결과 부채를 짊어진다. 최근에 한국인이 엄청난 부채를 진 것은 주택, 자동차, 전자기기, 생활용품, 그리고 여가 생활 등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할 생활 수준을 누린 결과라 할 수 있다. 가계부채가 엄청난 규모로 늘어났다는 점도 그런 점을 말해준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가계신용—가계대출 더하기 판매신용—을 중심으로 보면 2023년 기준 1,886.4조 원으로 GDP 2,401.2조 원의 78.6%다. 그러나 가계부채에는 가계신용 외에도 전세자금과 자영업자의 대출이 포함된다. 그것까지 포함하면 2022년 1분기 기준 가계부채의 규모는 3,200조 원, 가계성 법인 대출까지 포함하면 3,500조 원 이상으로 추정되며, 그 경우 GDP 대비 190%나 된다는 통계가 있다. 이런 점은 고도의 소비생활을 ‘즐기는’ 동안 개인과 가계가 거대한 규모로 부채를 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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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규명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작동하는 한 그것은 철칙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익부와 빈익빈의 경향이 그대로 관철된다는 점도 쉽게 확인된다. 자본주의적 발전은 아무리 진행되어도 인민대중의 부를 늘리는 법이 거의 없다. 부를 늘리는 것은 언제나 상위 그것도 그중의 극소수일 뿐이다. 하위 다수는 갈수록 더욱 허덕이는 삶을 살게 되니 자본주의에서는 불평등만 심화할 뿐이다.
세계 불평등 연구소가 발간한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한국은 1980년 이후 소득과 부의 격차가 지속해서 벌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소득의 경우 2021년 기준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에 달하는 46.5%를 가져간 반면, 하위 50%는 16.0%를 가져가는 데 그쳤다. 상위 10%의 1인당 소득은 15만3200유로(약 1억7850만원)로 하위 50%의 1만600유로(약 1233만원)로 약 14배나 많았다. 부의 경우 소득보다 불평등이 더욱 두드러졌다. 상위 10%는 전체 부의 58.5%를 차지한 반면, 하위 50%는 5.6%를 가져가는 데 그쳤다. 상위 10%가 보유한 부는 평균 105만1300유로(약 12억2508만원)로, 하위 50%가 보유한 부 평균 2만200유로(2354만원)보다 무려 52배 이상 많았다”(경향신문, 2021.12.07.).
세계 구호단체인 옥스팜의 연례 보고서의 발표 내용도 비슷하다. 그에 따르면 2017년에 세계 최대 갑부 8명이 세계 인구 절반이 지닌 것과 같은 규모의 부를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옥스팜이 2023년 1월에 내놓은 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상위 1%는 2020년 이후 2년간 창출된 새로운 부 42조 달러의 3분의 2, 즉 하위 99%보다 두 배나 많은 액수에 해당하는 부를 채갔다. 지난 10년간 상위 1%가 새로 생긴 부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것이 옥스팜의 주장이다.
이런 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속 불평등이 지속되고 악화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언뜻 보면 노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개선된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다. 한국의 경우 사람들이 최근에 잘 더 살게 된 듯한 것은 실질적 부를 많이 축적한 결과라기보다는 부채를 더 많이 짊어져서 생긴 착시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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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는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으로 중앙대학교 교수, '문화/과학' 발행인, '문화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참세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의 생김새』, 『길의 역사』,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