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세 권을 펼쳐든다. 희정이 쓴 <두번째 글쓰기>(오월의봄, 2021), 이호연, 유해정, 박희정이 쓴 <당신의 말이 역사가 되도록>(코난북스, 2021) 그리고 안미선의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낮은산, 2020)이다. 이 책들은 모두 다른 이의 말을 듣고, 들은 것을 모아 쓰고, 기록하고, 책을 펴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반추하고 깊게 고민한 글들이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잘 보여주는 건 희정의 책 부제인데, “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에 관하여”이다. 즉 이들의 일을 돌아보는 글을 묶은 책이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쓴다는 것
한 20~15년 전쯤, 그때 사회과학과 역사학 등에서 구술사 방법론이 유행하면서 여러 질적방법론 교재가 발간되었다. 그 책들은 ‘학문’이라는 범주 안에 있었던 만큼 딱딱했고 매뉴얼은 엄격했다. 그러다가 구술사와는 다른 ‘생애사’라는 (사회과학) ‘방법론’도 소개됐는데 이 역시 ‘과학으로서의 방법론’이었던 만큼 분석적이었고 딱딱했다. 당시에는 또 영상 활동가들이 볼 법한 다큐멘터리 교과서도 널리 참조됐던 것 같다. 한편 그즈음 문학 쪽에서는 ‘르포르타주’라고 하는, 1990년대 소위 ‘보고문학’이라 칭했던 장르도 강좌까지 열리며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문학이론으로서는 두툼한 참고서를 제공해주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이런 일천한, 그리고 맨땅에 헤딩하는 듯한 밑천을 가지고도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삶의 현장, 아니면 투쟁의 공간, 혹은 깊이 침잠하거나 고립되어 침묵 속에 있던 사람들을 찾아 말을 걸었고, 그 작업의 결과들이 책으로 묶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또 비교적 크거나 중요한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끝나면, 아니 전개중에라도 그 목소리를 담은 책이 나옴으로써 다시금 정세적 개입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홈에버-이랜드 투쟁이 그랬고 화물연대도 그랬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용산참사, 밀양 투쟁 등의 책이 그랬다.
그 딱딱했던 매뉴얼을 들고 길게는 20여 년, 짧게는 10여 년 이상, 투쟁 현장 등지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실전에 부딪혔던 사람들이 이들이었다. 이호연, 유해정, 박희정 등은 스스로를 ‘인권기록활동가’로 부르는데 그동안 함께 또는 따로 냈던 책들을 보자면 <금요일엔 돌아오렴>, <재난을 묻다>, <나, 조선소 노동자>, <나를 보라, 있는 그대로> 등이다. 스스로를 ‘기록노동자’로 칭하는 희정의 저서 목록을 보면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노동자, 쓰러지다>, <아름다운 한 생이다>, <여기 우리 함께> 등이 있다. 안미선도 <여기 사람이 있다> <여성, 목소리들>, <엄마의 탄생>, <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 등의 책을 펴냈다.
이들은 여러 책, 여러 작업에서 함께 만나 같이 작업하기도 했던 것 같다. 용산 참사, 세월호, 재난을 다룬 책들 등에서는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또 페미니즘, 장애인 차별, 노동 문제 등 다루는 주제가 중첩되기도 한다.
이 세 권의 책에는 바로 그 ‘목소리를 듣는 방법’을 가지고 여러 젠더, 계급, 현장,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 경험담, 그리고 다른 동업자들의 성과를 들여다보며 얻는 공감, 인터뷰 대상자들과 겪게 되는 긴장과 갈등, 관계 맺음의 방식과 거리 유지 등의 주제에 대해, 담담하지만 울림 있게 돌아보고 있다.
가령 안미선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람들의 ‘공간’으로 찾아가서 ‘녹음’을 하고 그들의 ‘말’을 담아내고, 때로 그들이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면서도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녹취를 정리하다가 울 때에 관해, 아니면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침묵’하는 시간, 그런 의미에 관해 각 장마다 그 경험을 곱십으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끔 어떤 인터뷰 자리에서 곤혹스럽거나, 인터뷰 상대와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거나,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분노를 느끼거나 했던 ‘어긋남’을 이야기한다.
딱딱한 사회과학방법론은 이들 책을 통해 녹음기를 들고 사람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썼던 이들에 의해서 조금 더 구체적인 경험으로 우리에게 함께 듣고 이야기를 같이 엮어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갈 방법을 일러준다. 안미선은 그런 이야기가 시간 속에서 자라고 변한다고 하면서 그 이야기가 모이는 광장을 만들자고 한다.
“용감한 이야기들이 모일 수 있는 드넓은 광장을 우리는 다 함께 일궈 내야 한다. 작은 목소리들이 자신의 몫을 되찾을 수 있는 광장, 우리의 가능성을,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광장.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을 무너뜨리는 광장, 우리가 마주 보고 나눈 이야기가 누군가의 문을 두드리고 열게 하면, 또 하나의 광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202쪽)
경험을 듣다
노동조합의 역사, 노동자 투쟁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고 읽고, 또 관련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옮기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 나로서는, 이 책들은 반면교사이자 내 ‘노동’을 되돌아보게끔 하는 거울이다. 희정이 쓴 이런 글은 ‘엇! 내 맘 속에 들어왔다 나갔나?’ 싶을 정도로 딱 내 마음이다.
“다른 이가 쓴 기록글을 읽다가 부러움에 마음이 따끔거릴 때가 있다. 기록자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그렇다. ‘그’에 대한 온전한 애정으로 쓰인 글을 보면, 내가 도달하지 못한 곳에 선 사람을 향한 부러운 시선을 뗄 수 없다. 이어 드는 감정은 후회다. 그래서 마음이 따끔거린다.”(233쪽)
또 이호연이 쓴 이런 문단도 몇 권의 노동조합사를 쓴 내게 여러 생각이 들게끔 한다.
“기록은 ‘기억 투쟁’이라고도 말해진다. 역사는 사건과 사람(들)에 대한 한 사회의 지배적 기억이다. 가령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그러나 무엇을 사회 공동의 기억으로 쓸 것인가는 선언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이 참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참사 이후 일련의 일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 부여할 것인가? 기억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지는 여러 행위 주체들이 치열하게 경합한 결과로 만들어지고 변화한다… 현재진행형인 사건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변화를 추동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과 같다.” (16쪽)
어떤 노동조합의 역사도 현실에서는 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부침을 겪는다. 힘 싸움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지난 노조사가 잘 정리되어 묶여 있다 하더라도 오늘의 힘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그깟 노조사는 땅속에 파묻혀 없던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역사를 쓴다는 건 늘 오늘의 싸움과 관련성이 있기 마련인데, 내가 그런 자세를 잘 유지했는지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
리얼리즘이 떠난 자리 꽃피우는 비(非)문학의 문학
오래 전,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지고 노동자, 민중의 곁으로 갔던 많은 작가들이 있었다. ‘노동문학’, 더 나아가 ‘노동해방문학’이 극성(極盛)했던 시절, 문학이 민중에게 다가갔던 시절이 다 지나갔다. 어떤 시인은 떠나 버린 작가들을 두고 ‘전선에서 이탈한 탈영병들’이라고 칭하며 웃었다. ‘탈영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들 중 일부는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되어 이후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고, 자신들이 경멸해 마지 않는다던 ‘소부르주아적 근성’을 드러내는 걸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실 이보다 더 큰 배신의 무리들은 벌크선 한 대에 태우고도 모자랄 만큼 차고 넘친다.)
나는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하면서 떠나간 이들이 배신자였다고 낙인 찍을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보다는 애초에 현실주의 문학이 재현하고자 했던 그 전형성의 문제틀 자체가 이젠 시대에 맞지 않는 게 아닐까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전형성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의의 문제인데, 대중이 대의되기에는 대중 지성의 레벨이 올라갔고, 대중을 대의하기에는 엘리트의 속물성이 까발려졌다. 아니, 엘리트-대중의 틀 자체가 붕괴했거나 엘리트-대중이 포개지거나 뒤섞인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은 그런 작가적 소명을 요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그리고 현실주의 문학의 꽃인 ‘소설’과 같은 장르나 리얼리즘이라는 사조가 요구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기존의 문학이, 이른바 민중의 곁으로 다가갈 일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그다지 성공적일 것 같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거나, 현실이 갈등 없이 매끄러운,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일신우일신하고 있다거나 하는 얘기는 아니다. 몸과 마음이 다치고 죽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고 위기에 닥친 지구적 환경과 늘 칼날 위에 서 있는 듯한 노동 현실은 여전하다. 그런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대신 써주어지는 시와 소설과 문학과 장르의 틀이 아니라, 인터뷰를 기록한 글들과 선언문과 선전물과 투쟁사와 르포르타주와 긴급히 간행된 투쟁 자료집과 백서 혹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새롭게 창안된 글쓰기의 장르’가 아닐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동문학을 하겠다고 현장에 갔던 그 많은 작가들이 ‘탈영’(농담이닷!)을 한 2000년대 이후 어찌 이렇게 1990년대보다 더 많은 목소리들을 담은 책들이 범람을 하겠느냔 말이다.
물론, 이조차도 어떤 대의, 대변의 글쓰기가 아닐까 의심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희정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록자에게 물을 자격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왜 당신은 묻는 사람인가요?”(32쪽) “자신을 묻는 자로 상정한다면, 기록자의 역할은 어렵고도 혼란스럽다.” (33쪽) 서사를 쥐고 마치 ‘통령’과 같은 위치에서 호령하는 소설가의 지위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우리가 ‘묻는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질문을 던질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부’로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면서 걸어가는 것이다. 멕시코의 원주민 저항군 사빠띠스따의 마르꼬스가 말하는 것처럼 “질문하면서 걷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묻고, 듣고, 쓰는 이 순환의 바퀴는 계속된다. 이호연은 이처럼 인터뷰(사회적 대화)와 기록을 해가는 활동 자체를 ‘인권을 위한 기록’(23쪽)이라 말하는데, 이는 기록활동 자체가 우리 운동의 일부임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이같은 기록활동이 출판으로 이어질 때 ‘읽는 사람’도 이같은 활동의 일부에 함께하게 되고 ‘기록의 사회적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서 ‘기록 이후의 활동’으로 이어진다.(78쪽)
2000년대 이후 줄기차게 이어지는 이 많은 기록활동과 그 성과로 쏟아지는 책 또는 여러 작품들은 리얼리즘이 떠난 자리에 꽃피우는 비(非)문학의 성과들이다. 물론, 이를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의 예처럼) ‘문학’이 스스로의 경계를 더 확장하면서 문학의 일부로서 포섭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비문학의 문학이랄까. 확실한 건 기존의 문학은 이 현장에 임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문학이 있든 없든, 새롭게 쓰여지고 있는 것이 문학이든 아니든 간에, 많은 작가? 글쓰는 사람? 학자? 기자? 구술사가? 그 이름이 뭐였든 그 사람들의 글이 가닿지 않는 곳에서 내는 목소리들이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는 데에 주목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도 계속 새로 생겨났다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이 책 세 권은 더 많은 사람들이 녹음기와 귀, 그리고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람들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나침반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들을 엮어서 어떤 것, 가령 역사랄까, 전망이랄까 하는 큰 그물을 직조하는 베틀 같은 역할을 해줄 것 같다. 이따금씩은 내가 어떻게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고 쓸 것인지를 돌아볼 때 ‘훔쳐’ 볼 참고서가 될 것 같다. ‘동업자 의식’을 가지고 이들을 응원한다, 목소리를 담아내는 사람들, 비문학의 문학가들. 동지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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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돌규는 노동자역사 한내의 운영위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