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과 경성제국대학
조선시대 말의 혜화동은 성균관과,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경모궁, 민가들 정도가 있는 비교적 한산했던 마을이었다. 이후 1907년 공업전습소와 대한의원이 설립되고, 각각 공업전문학교와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하면서 도로가 생기고 점차 번화해갔다. (오늘날의 대학로는 북악산 줄기로부터 흘러온 개천이 청계천까지 이르는 길을 덮어둔 길이다.)
한적했던 혜화동에 본격적으로 부동산 개발 열풍이 불어온 것은 1923년 청량리에 경성제국대학(이하 경성제대)의 예과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일제는 경성제대의 본과를 지을 부지를 찾고 있었고 비교적 지가가 낮던 동숭동과 연건동 일대를 채택했다. 이후 혜화동 일대의 땅값은 기존의 가격보다 4~5배가 올랐고 당시 중산층이 선호하는 지역으로 떠올랐다.
경성제대는 당시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보성전문, 연희전문, 이화여전, 경성공전, 경성의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모두 정식으로 대학인가를 받은 곳은 아니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들이 대학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일본유학이 필수적이었다. 그만큼 조선인의 대입자격은 까다로웠으며 학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당시 신문기자의 월급은 4~50원 정도였고, 경성제대의 학비는 매월 5~60원에 달했다. 경성제대의 착공은 1925년 8월 14일에 시작되어 1928년도에 모습을 갖추었고, 본관 건물은 1931년에 완공되었다.
“서울 가운데서도 제일 살기 좋은 곳이 혜화정·명륜정이라고 한다. (중략) 정내의 경제력을 따져 보더라도 혜화정은 장안에서도 유수한 부자동네로서 이 또한 이곳 정리를 위하여 든든한 일이다.” - 1938년 조선일보
종로구 동숭동에 들어선 경성제대 예과교사. 출처: 국가기록원
우리는 무엇보다도 당을 살려야 한다
아직 여름의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1926년 9월 3일 정오의 기온은 24.6도였다. 삼선평으로 넘어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혜화문 부근 산속에 은밀하게 세 명의 사내가 모였다. 그 사내들의 이름은 김철수, 원우관, 신동호였다. 이들은 이곳에 모인 이유는 조선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재건을 위해서였다.
김철수는 강달영 책임비서 체제에서 7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1인이었다. 그는 이미 1910년대 일본유학 시절에 사회주의 운동을 받아들였으며, 1920년에 조직된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사회혁명당의 창립 구성원이었으며 1921년 상해에서 창립된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창당에 참여한 고참 사회주의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바로 3개월 전인 1926년 6.10만세 투쟁 이후 조선공산당에 가해진 가혹한 탄압 속에 체포를 피한 유일한 중앙집행위원이기도 하였다. 그의 어깨엔 탄압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해야 하는 무거운 역사의 짐이 지워져 있었다. 함께 모인 원우관과 신동호 모두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해왔으며 조직으로부터 당의 후보중앙위원에 임명될 만큼 능력과 경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은 긴급한 상황에서 기존 중앙위원에게 사고가 발생할 때 조직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후보위원들을 선출해두는 것은 상식이었다. 이들은 조직복원을 위한 중앙집행위원회의 선정과 향후 조직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었다. 이들은 본인들을 포함하여 5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고자 하였다.
공석인 2석 중 1석은 1889년생으로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대의원 활동과 귀국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당원으로 참여해온 오의선을 선출한다. 나머지 1석은 당의 규약상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가 당연직으로 중앙위원을 하게 되어있었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초대 책임비서는 박헌영이었고 그가 체포된 이후 후임은 1925년 11월에서 12월의 검거를 피한 권오설이 맡았다. 하지만 그 권오설마저 6.10만세 투쟁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었고 전정관이 그 뒤를 이었지만 전정관 마저 7월 19일 체포되었다. 전정관의 후임은 훗날 체포 당시 소지하고 있던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조직을 지키고자 했으나 체포되어 고문으로 옥사한 고광수가 당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였기에 그가 중앙집행위원의 일원이 되었다.
우선 중앙집행위원회의 인선은 마쳤지만, 이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것은 강달영 책임비서 시기에 이루고자 했던 사회주의 운동진영의 단결이라는 과제가 놓여있었다. 조선공산당은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된 공산당을 창당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지만, 첫 창당은 그러하질 못하였고 특히 신의주 사건으로 당의 주요간부들이 체포된 이후에는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자들의 단결을 요구하는 요구가 높아져 있었다. 그 단결의 요구는 비단 사회주의 진영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과도 통일전선이 필요하였다.
김철수
물러서지 않으리
강달영 집행부의 내부에는 이러한 요구에 맞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철수였다. 상해파였던 김철수를 중앙집행위에 인선한 것도 김철수가 파벌에 기울지 않고 당과 운동을 중심에 두고 사고 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고, 따라서 여러 정파 간의 주요 인물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였기 때문이었다. 김철수가 남긴 회고와 구술에는 김철수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회고가 남겨져 있다. 그 보기를 들어본다면 해외에 있는 상해파에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승인 여부와 조직의 방침과는 다르게 개별적으로 당에 참여한 주종건을 문책하려 하였을 때 이동휘에게 직접 전보를 띄워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공산당을 살려내야 되것다 공산주의자라면 파당을 초월해서 당을 지켜야 하겠으니 국제당에 찬성 전보를 쳐달라’ 라고 한 대목이 그것이다. 그의 다른 활동을 보더라도 그는 소위 사업이 되게 하는 사람이었다.
강달영 집행부는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정식 지부라는 승인을 얻어내어 사회주의 진영 내의 위상과 영향력이 높아지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민족통일전선을 위해서 천도교 구파,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의 반일적 세력들과 연합을 위해 논의를 이어나가 상당한 진척을 이루어냈으며 조직의 위상을 공개로 할 것인지 비밀단체로 할 것인지 정도의 전술적 판단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일제에 대한 대중투쟁의 준비도 진행하였다. 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원래 기획했던 메이데이 투쟁계획을 폐기하고 순종 인산일을 겨냥한 투쟁으로 전환하여 천도교를 끌어들였다. 탄압의 불길이 당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서 공청을 중심으로 한 투쟁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가두투쟁을 책임질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담당자와 전국으로 배송할 유인물도 해외에 나가 있는 전임 중앙위원들과 논의속에 준비하였다. 순종의 죽음을 맞아 일경은 3.1운동과 같은 재현을 막아야 한다는 각오로 비상체제에 돌입하였지만 그러한 일경의 감시를 피해 모든 준비는 순조로웠다고 느껴졌다. 다만 투쟁을 앞두고 민족주의 세력이 주저하고 있는 것이 감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1925년 첫 번째 탄압이 신의주에서의 사소한 일 때문에 벌어졌듯이 1926년의 두 번째의 탄압도 의도치 않은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1926년 6월 5일 종로경찰서 사법계 형사들은 중국 화폐 위조범 이동규 쫓고 있었고 그를 거주하고 있던 집에서 검거하였다. 하지만 이동규의 집에서 찾아낸 것은 위조지폐뿐만 아니라 안방 재떨이에서 대한독립당 명의의 유인물을 발견한 것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일경은 이동규를 비롯한 관련자를 심문하여 알아낸 정보로 6월 6일 연합경찰대를 구성하여 경운동 천도교당을 급습하여 교당 내의 모든 천도교 간부와 개벽사 직원을 연행하고 비밀리에 인쇄하여 교당에 보관 중이던 5만여 매의 유인물도 압수했다. 이것이 조선공산당 대검거를 알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인쇄를 맡았던 박래원을 필두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권오설이 체포되었다. 권오설은 살인적인 고문에 맞서 2일을 버텨냈다. 진술의 일관성과 조직과 투쟁계획을 지켜야 했다. 권오설이 버티는 사이 책임비서 강달영은 지하로 잠적할 수 있었고, 빼앗긴 유인물을 대신해서 가두투쟁의 책임자들은 손으로 등사기를 밀어 수만 장의 유인물을 찍어내 6.10 투쟁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일경은 저인망식 탄압으로 6.10 투쟁 기간 중 연행자의 숫자는 2천 명을 넘어섰지만 체포된 당원들의 결사적인 진술 투쟁으로 결정적 물증을 갖지 못했다. 7월 12일이 되자 일경은 12명의 공산당원만을 예심에 넘길 수 있었고 대부분 검거자를 석방했다. 석방자 가운데에는 중앙집행위원 이봉수와 홍남표, 후보위원인 구연흠도 포함되었다. 초조해진 일경은 책임비서 강달영을 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주식거래소에서 강달영의 흔적을 찾아낸다. 마침내 7월 17일 강달영을 검거하고 당의 기밀문서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강달영은 기밀문서를 훼손하고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을 기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암호로 작성된 기밀문서가 일경의 손에 해독되자 강달영은 무너졌다.
당원 명부가 기록된 기밀문서로 한풀 꺾인 검거선풍이 당의 기반을 흔들었다.
6월에 시작된 검거는 8월까지 지속이 되었고 체포된 인원은 3천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전년도 체포된 당원들과 함께 재판에 넘겨진 인원은 100명을 넘겼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빛나고 참혹하게 투쟁하였다. 훗날 구연흠은 자신의 회고에서 일제 경찰의 참혹한 고문을 이겨내고 비밀을 지켜낸 동지로 권오설, 이봉수, 홍덕유, 염창렬을 거명했다. 이 검거와 재판과정에서 사망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경찰 심문과정에서 박순병이 고문으로 사망하였고, 백광흠, 권오운, 권오상, 박길양, 권오설이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거나 석방 이후 사망하였다. 책임비서 강달영은 고문과 자해로 정신이상을 얻어 1942년에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1926년 9월 동소문 인근 야산에 모인 셋의 마음엔 쓰러져간 동지들을 대신하여 운동을 이어가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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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선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연구원이며, 한국지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