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꿈에서는 깨어난 지 오래다. 이불과는 더 오래도록 뭉텅이를 이룬다. 겨우 몸을 일으켜 창을 연다. 뉴스를 재생한다. 숱한 말들이 우리의 생을 가르고 베어낸다. 세계적 차원으로 조직된 자본주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쉴 틈 없이, 숨김없이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가차 없이, 예외 없이 조각나고 단절되어 있다. 이 체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국적과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나이, 무엇무엇…. 온갖 ‘사회적 분별’로, 우리를 찢어 놓고, 서로를 증오하고 갉아먹기를 기대한다. 서로를 구별 짓고 차별을 수용하고 사랑과 이해, 연대와 협력으로 일구는 다른 삶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체념하도록 강요한다. 사람과 사람을, 삶과 사회를 ‘가르고’ 평범한 사람들의 고유한 생애를 부수어 간다. 다시 시작하는 민중언론 <참세상>과 함께, 우리를 ‘가르는 말’, 그것들을 기록한다. 기억한다.
김민수의 말
올해 농림축산식품부는 외국인 근로자를 전년보다 24% 증가한 6만 명 넘게 배정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외국인 근로자 없는 농업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장 부족한 일손을 외국인 근로자로 대체한다고 하지만 농촌은 더 큰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
우리나라는 외국인 근로자에게도 내국인과 동일한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2021년 이후 올해까지 최저임금은 무려 12.6% 올랐습니다. 그만큼 농가의 인건비 부담이 커진 겁니다. (…) 최저임금은 지속해서 오르는 데 반해 농가소득은 감소하고 있어 농가의 경영 상황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업 분야의 최저임금 차등 적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 우리나라 농업 분야 외국인 근로자도 의사소통 등의 어려움으로 작업률이 떨어진다는 점을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해 최저임금은 9,860원으로 그 가치는 국내 여건과 내국인을 기준으로 결정한 것이지 외국인의 임금 여건을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최저임금은 내국인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며, 내국인 근로자의 임금은 국내에서 소비되는 반면 외국인 근로자 임금의 대부분은 자국으로 송금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소비자 물가가 상승하고 내수 경기가 둔화하고 있는 지금, 최저임금 차등 적용을 통한 물가 안정과 농가 경영을 도모할 적기입니다.
김민수가 누구냐고. 더불어민주당 소속 충남도의회 의원이다. 지난 4월 24일, 제351회 충남도의회 2차 본회의, 5분 발언 시간. 김민수 의원은 일손은 부족하고, 소득은 줄어드는 지역 농가를 걱정하면서, 농업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할 수 있도록, 충남도와 도의회가 적극적인 공론화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충청남도는 전국 17개 광역 지자체 중, 선주민 대비 이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지역사회의 지속가능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주민들의 일과 삶에 깊이 관계 맺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민수류’의 지역 정치인들은 이주민이 마주한 현실에 대한 적확한 이해에 게으르다.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이주민 인구는 '유치'하고 싶지만, 이주민의 시민권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지역 생산과 소득 증대를 위해 이주민의 노동력은 '수입'하고 싶지만, 이주민의 노동권은 인정하기 싫다 한다. 최저임금을 주는 것조차도 아까워한다. 농가의 일과 삶에 대한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기보다는, 이미 불안하고 고단한 농업 이주노동자의 일과 삶을 더 훼손하는 개악을, 손쉬운 대안으로 선택한다. 이주민을 지역의 주민으로, 우리 사회의 시민으로, 삶의 ‘주체’로 존중하지 않으면서, 온갖 사회문제의 봉합을 위한 ‘수단’ 삼는다.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농촌 외국인노동자 최저임금 차등 지급 주장하는 더불어민주당 충남도당 규탄" 기자회견(2024/05/10) 출처 : 노동과 세계, 촬영 : 백승호 (필자 제공)
대한민국헌법, 근로기준법,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한국이 비준한 국제노동기구(ILO)의 제111호 협약 (고용 및 직업상의 차별에 관한 협약)은 '일의 세계'에서 국적과 인종, 사회적 신분을 근거 삼는 차별을 금지한다. 김민수의 말과 다르게 ‘최저임금은 내국인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 아니라, 이주민을 비롯한 임금노동자 모두의 인간다운 ‘최소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임금의 최저 수준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다.
조정훈의, 오세훈의, 이창용의, 윤석열의, 000의…
피로하다. 참 나쁜 말. 선주민과 이주민을 가르는, 노동과 노동을, 노동자와 노동자를 ‘가르는 말’들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월 100만 원만 줘도 ‘되는’ 외국인 가사 노동자를 ‘수입’하자는 조정훈의 말(최근 한 인터뷰에서는 필리핀 가사 관리사에게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것에 대해 “좋은 취지지만 살 수 없는 물건, 너무 비싼 물건이 시장에 나와서 부러움만 살 수 있다”라고도 했다. 사람을 ‘상품’으로 표현하고 '값'을 셈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시범 사업으로 9월부터 서울지역에서 일을 하게 될 필리핀 가사 관리사 임금이 200만 원을 넘어가게 되어서 아쉽다는 오세훈의 말. 외국인 돌봄 노동자에게는 최저임금을 주지 말자는 한국은행 보고서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면서 “최저임금을 돌봄서비스에 대해 내외국인 차별 없이 차등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도 공감한다”는 이창용의 말(‘차별’ 없는 ‘차등화’라니). 외국인 유학생과 결혼이민자 가족은 최저임금을 주지 않고도 가사·돌봄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윤석열의 말.
노인들에게는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말. 재개발 사업 현장을 둘러보면서 “건설 근로자의 경우 요즘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있는데 기본적인 숙식 제공을 조건으로 최저임금의 차별화 등을 공론화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는 나경원의 말.
더 이름난 이들의, 덜 이름난 이들의, 전국적인, 지역적인, 나쁘고 못된 말들 모두를, 촘촘히 기록하고 기억하고 다툴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위원회 1차 전원회의 현장 (2024/05/21) 출처 : 노동과 세계, 촬영 : 백승호 (필자 제공)
최저임금의 계절, ‘차등적용’이라는 독과
봄이 저물고, 여름이 피어나는 때를 느낄 겨를이 없다. ‘최저임금의 계절’은 뜨겁고, 서럽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이들이 올해 맛보려는 열매는 최저임금 차등적용이다. 열심히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볕을 살피고 있다. 자신들에게 ‘불필요’한 가지와 열매들은 쑥 싹 베어내고 솎아내 버린다.
‘가르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돌봄 노동자, 이주노동자, 고령 노동자, 건설 노동자, 농업 노동자, 그리고 누구, 그리고 무엇. 업종으로, 국적으로, 연령으로, 지역으로 노동자를 찢어 가르고, 차별을 획책한다.
저들에게 최저임금 차등적용은 오랜 시간 기다려온 달콤한 과실이겠으나, 우리, 일하는 모두, 일을 멈춘 모두, 노동자, 시민들에게는 이미 고단한 일과 삶을 더 병들게 할 독과다. 업종별, 지역별, 국적별, 연령별 차등적용 도입은 이미 일의 세계에 만연한 차별과 불평등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최저임금제도의 존재 이유는 불평등한 일의 세계, 삶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일과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임금을 국가의 개입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하는 일이 다르다고, 국적이, 나이가, 사는 곳이 다르다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최소한의 필요가 달라지지 않는다.
허약한 논리, 조악한 거짓말
허약한 논리, 조악한 거짓말이 저들의 ‘가르는 말’들을 지탱한다. 최저임금 동결을 주장할 때도, 산입 범위 개악을 다툴 때도, 차등적용 도입을 가르는 때도, 낡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최저임금을 지급하기 어려운 사용자들의 사정을 짚는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기준은 사용자의 지급 능력이 아니라 노동자와 노동자가 관계 맺고 삶을 함께 이어가는 이들의 일상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가 되어야 한다.
자영업자들의 고통 어린 신음이 최저임금 탓이라 한다. 최저임금 탓으로 경제가 망해 간다고 한다. 이윤을 독점하는 자본과 이를 돕고 이용하는 국가 권력의 책임은 지워 버린다.
‘선진국’들은 다 하고 있다면서 조악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국제노동기구(ILO) 회원국 중 90%의 국가가 최저임금제를 시행하고 있고, 이들 중 절반 이상은 국가 전체에 단일한 최저임금제를 채택하고 있다. 업종별, 지역별 차등적용을 도입한 국가들의 경우, 국가 전체에 적용되는 기본 최저임금보다 특정 업종과 특정 지역에서 더 높은 최저임금을 책정하기 위한 상향식 차등적용이 대부분이었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주기 위한 한국 사회의 차등적용 요구와는 결이 다르다.
저들이 쉽게 근거 삼는 '국제기준'은 오히려 최저임금의 '단순하고 보편적인' 적용을, 전통적 의미의 '임금노동자'를 넘어서 '일하는 모두'에 대한 최저임금 적용 대상 확대를 권고한다. 개별 국가들이 최저임금 모델을 스스로 기획하고 결정할 수 있지만, 차등 적용의 경우, 적확하고 객관적인 기준과, 충분한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전제로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도입하지 않을 경우, 최저임금제도의 취지를 몰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우려한다.
지금 '국제기준'에 따라 우리가 논의할 것은, 차등적용 도입이 아니라 장애인, 선원 노동자, 특수고용, 프리랜서 등 일하는 모두의 인간다운 일과 삶을 지탱하는 최저임금 적용 대상 확대 방안이다.
모두를 위한 최저임금운동본부 출범 기자회견(2024/05/20) 출처 : 노동과 세계, 촬영 : 송승현 (필자 제공)
오래된, 여전히 절실한
태어나고 자란 나라, 하는 일, 살고 있는 지역, 나이, 무엇무엇의 차이가, 누군가의 일과 삶을 제약하고, 존엄을 부수는 명분으로 쓰일 수는 없다.
저들의 말이 우리를 구별 짓고, 우리 사이에 증오가 타오르길 기대하고, 모두의 일과 삶을 조각 낼 때, 우리는 기꺼이 서로를 잇고, 끌어안고, ‘우리’로 함께, 다투어 간다. 저들의 말은 우리를 가를 수 없다.
오래된, 여전히 절실한 우리의 ‘말’을 되짚는다.
“노동자는 하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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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민의 가르는 말]을 통해 일의 세계, 삶의 관계, 모두의 존엄을 다시 생각합니다. 읽고 쓰고 다투는 일에 오래도록 게을렀습니다. 다시 읽고 써 보려고 합니다. 다시 다투어 보려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우리의 삶과 세계를, 저마다 고유한 생애를 ‘가르는 말’들 사이에서, (다시 기록하고, 다시 기억하고), 다시 다투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