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경동산업에서 발견된 블랙리스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블랙리스트의 탄생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위험인물’ 목록을 작성해 이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활동을 억압했다. 파업을 전개한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0년 목포 제유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전개하자 공장 측은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126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하고, 목포 시내의 다른 자본가들에게 해고자의 명단을 공유했다. 블랙리스트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1978년 4월 10일 한국섬유노동조합 부산지부 김영태 지부장 명의로 「업무집행에 관한 참조사항」이란 제목의 공문이 전국 노동조합과 각 사업장에 배포됐다. 당시 김영태는 섬유노조 위원장과 부산지부 지부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동일방직(인천)에 종사하는 근로자 중 불미스러운 집단에 동조하기 위하여 작업장을 이탈하는 등의 소란으로 해고된 근로자들의 명단은 별첨과 같이 동봉하니 업무에 만전을 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전섬노부지 제690호)
공문에 담긴 내용은 동일방직 해고자 124명의 명단이었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부서, 본적까지 기재됐다. 민주노조운동을 탄압하려고 작성한 이른바 블랙리스트였다. 이 명단을 잘 활용하여 어디에서고 이들을 취업시키지 말라는 공문이었다. 명단에 오른 해고자들은 동일방직에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거듭 해고됐으며 감시 대상이 됐다.
동일방직의 노동자들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 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회사의 사주를 받은 박복례, 문명순 등을 포함한 남자조합원 일부가 조합원들에게 똥을 투척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똥물 투척사건’에 분노한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수호를 결의하며 명동성당과 인천 답동성당, 인천 산업선교회 등에서 단식농성을 벌여나갔다.
이에 당시 중앙정보부 경기도지부에 근무하며 동일방직 노조문제에 개입했던 최종선은 “사흘 이상 무단결근하면 해고가 가능하다”며 노동자들을 협박했다. 그러나 농성노동자는 단 한 명도 돌아가지 않았다. 훗날 최종선은 “이 상황을 중앙정보부 중앙에 보고하고 농성자 전원을 해고하도록 회사 측에 조치했으며 블랙리스트는 중앙에서 작성하고 관리 집행했다.”고 진술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발췌)
블랙리스트는 기업, 노동부, 중앙정보부 등의 협력으로 완성됐다. 민주노조 운동을 전개한 노동자들의 취업할 권리와 생존권을 박탈하여 노동운동 자체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기관이 앞장서 사업장, 노동부 근로감독관실과 정보기관 등에 배포해 비치하도록 했다. 이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의 권리와 직업선택의 자유를 짓밟는 만행이며, 근로기준법에서도 이를 금지하고 있다.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김용자는 1979년 동료 6명과 함께 안양에 있는 대농방직에 취업했다. 하지만 입사 15일째 되던 날 과장은 동일방직에서 근무한 사실을 숨겼다며 사문서위조를 이유로 해고했다.
“이제 저희들은 어디를 가도 노동운동 전과범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른 어떤 형벌보다도 가장 무섭고 극렬한 생존권을 빼앗긴 전과자들이 된 것입니다. 지칠 대로 지쳤던 저희들은 다시 일어서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더 강해졌습니다.”(1978년 9월 1일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성명서 「저희들은 노동운동 전과자가 되었습니다」 발췌)
끝나지 않는 싸움
해고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3년 10월 김용자, 김옥섭 등은 인천 태평특수섬유에서 또 해고됐다. 안순애, 신정희, 서기화 등도 같은 이유로 해고됐다. 블랙리스트가 있는 한, 먹고 사는 게 불가능했다.
이들은 다시 노동부로 향했다. 이번에도 근로감독관, 사복경찰 등 20여 명이 폭력을 휘둘렀다. 서기화는 깨진 유리 파편에 맞아 크게 다쳤다. 그의 피로 한 동료가 ‘복직’이라 썼다. 5명은 현장에서 연행 구속돼 인천소년교도소로 이송됐고, 서기화는 수술 직후 경찰에 끌려갔다.
해고자들의 투쟁으로 블랙리스트 문제가 사회 쟁점화됐다. 1984년 1월 ‘민주노동자 블랙리스트 철폐대책위원회(위원장 문익환 목사)’가 구성돼 해고자들에 가해진 폭력과 블랙리스트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항의하는 활동을 펼쳤다.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구속집행 정지로 석방된 뒤에도 블랙리스트 철폐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블랙리스트 역사는 반복된다
1980년대의 블랙리스트 역시 규모가 확대됐다. 1987년 8월 20일 경동산업이 파업 농성하는 과정에 생산사무실 노무 담당 책상에서 6묶음의 블랙리스트를 발견했다.
묶음별로 내용이 달랐다. 어떤 자료는 1970~80년대 노조 활동 관련자 925명이 수록됐다. 여기에도 동일방직, 원풍, 태창섬유, 콘트롤데이타 등 민주노조 운동을 전개한 사업장들이 대거 포함됐다. 다른 자료는 위장취업자 현황이란 제목으로 93명이 대우자동차, 한국후지카, 대림통상 등 사업장별로 분류됐다. 이렇게 총 1,662명의 노동자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파업 농성 중이던 고려피혁 성남공장에서도 1988년 6월 10일 763명의 블랙리스트가 발견됐다. 주로 서울, 인천, 안양, 안산, 성남 등에서 활동한 노동운동 관련자들의 개인신상이 수록됐다. 성남지역의 라이프제화와 신생 노조의 간부와 조합원 명단도 발견됐다.
2024년 2월 13일 MBC는 쿠팡이 지난 7년간 최소 16,450명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관리해 왔다고 보도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위축시키고 노동운동을 부정한 방법으로 통제하려는 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쿠팡은 내부 인사 평가자료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들의 블랙리스트에는 쿠팡에서 한 번도 일한 적이 없는 기자들의 명단이나 노동운동가들의 이름이 수두룩했다. 단지 기업에 비판적인 의견을 가졌다거나 관리자와 다툰 적이 있다거나 하는 이유로 그 명단에 오른 노동자들은 퇴사압박을 받거나 채용에서 제외되어야 했다.
어느 시절에나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사용자의 입맛에 맞는 ‘쉬운 해고’를 위한 것이며 민주노조 와해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반헌법적인 행위를 한 사용자들은 단 한 번도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참고자료]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동일방직노동조합 운동사』, 돌베개, 1985년
이은영, 「1980년대 블랙리스트를 통한 정부 자본의 노동통제」, 성균관대 석사학위, 2014년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 『다시 기계 앞에 서고 싶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10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도서출판 현장에서 미래를, 2001년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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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이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