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델 테스트(Bechdel Test)'는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매체의 성평등 감수성을 평가하는 테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세 가지 간단한 질문이다. 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하는가? 그 두 명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그 대화 주제가 남자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는가?
간단한 질문들인데 막상 통과하는 영화나 TV쇼가 별로 없다. 그만큼 현재의 대중매체 지형이 가부장적 시선과 감각으로 구획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를 변주한 '기후변화 벡델 테스트'가 등장했다. 이 역시 간단한 두 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변화가 존재한다'와 '등장인물이 그 사실을 안다'.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또 등장인물들이 기후변화를 인지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 테스트를 처음 창안한 것은 미국의 비영리 단체 Good Energy다. 이 단체와 콜비 대학교의 합동 연구 결과, 지난 2013년에서 2022년까지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헐리우드 영화 250편 중에서 첫 번째 기준을 통과한 영화는 고작 12.8%, 그리고 두 번째 기준까지 만족시킨 영화는 9.6%에 지나지 않았다. <킹스맨>, <베놈>, <아쿠아맨>,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등이 두 가지 모두를 통과했다. <기생충>과 <설국열차>의 봉준호와 <인터스텔라>와 <테넷>의 크리스토퍼 놀란이 기준 중 하나를 통과한 영화를 두 편씩 만든 유일한 감독이었다. 아울러 2024년 오스카 후보작 31편 중에서는 <바비>,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1부>,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 세 편만 기준을 통과했다.
호명되는 영화들이 거대 자본의 블록버스터에 한정되어 있지만, '기후변화 벡델 테스트'는 오늘날 할리우드가 기후-생태 위기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는 최소한의 기능을 수행한다. 도대체 할리우드는 타이즈 입은 히어로들에게 망토를 뒤집어씌우고 지구를 지키는 데 사활을 걸면서도 왜 백척간두에 처한 실재의 인류 운명에는 그리 인색한 걸까?
영화 <트위스터스> 스틸컷. 출처: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첫 번째 이유는 공화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미국 내에 기후부정론과 기후음모론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기후변화'나 '기후위기'와 같은 표현들을 일부러 누락시키는 것이다. 가령, 최근에 개봉한 토네이도 재난영화 <트위스터스>에는 기후변화라는 단어가 단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폭염과 홍수 재난이 계속 잦아지고 토네이도의 강도와 빈도가 커지고 있다는 말을 수시로 중얼거리지만,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그것이 기후변화에 기인한다는 말을 끝내 함구한다.
<트위스터스>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은 2021년 80여 명의 사망자를 야기하고 미국인들에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각인했던 켄터키의 재앙적인 토네이도 사건을 추적하고 이를 토대로 영화의 구조와 캐릭터를 구축했다. 또 토네이도로 인해 극장 스크린이 뜯겨 나간 실제 장면을 모티브 삼아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재난 장면으로 구성했음에도, 결국 재난의 실제적 배경 앞에서 주춤거리다 뒤로 물러서고 만다.
상업영화가 지금의 행성 위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기후-생태 위기를 구체적 서사로 형상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나 환경오염 사건은 사건 원인과 책임의 대상을 특정하기가 수월하다. 당장 사건의 원인이 보이는 까닭이다. 스릴러 문법으로 핵발전소 문제를 그려낸 <차이나 신드롬>(1979)이나 환경 영화의 교과서로 치부되는 <에린 브로코비치>(2000)처럼, 문제의 원인과 해결의 인과관계를 하나의 압축적 스토리로 구성해 관객들을 설득하기가 용이하다.
하지만 기후-생태 위기는 갈등 국면을 그려내기가 다소 어렵다. 과연 인류세(Anthropocene)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자본세Capitalocene)의 구조를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할 수 있을까? 화석연료, 대량생산-대량소비, 토지 이용의 변화, 제국적 식민주의의 수탈 기제 등 자본주의 축적 역사의 파괴적인 청구서를 극장과 TV에서 팔릴 만한 이야기로 가공한다는 건 녹록지 않은 과제다.
그 때문인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기후위기를 반영하는 양식은 서사의 갈등 국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종말론적 파국을 설정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영화 <엘리시움>(2013)에서는 기업의 탐욕으로 생태적 균형이 파괴되어 지구가 인간이 살기 힘든 곳으로 변모한다. <투모로우랜드>(2015)에서는 기후변화로 지구 환경이 붕괴되며, <지오스톰>에서도 기후변화에 대응하고자 인공 기술을 이용해 기후를 조절하다가 파국을 맞이한다. 그런가 하면, 2019년 유엔 연설에서 "우리 인간은 지구를 감염시키는 질병"이라고 주장한 제이슨 모모아의 <아쿠아맨 2> 역시 악당들이 오리할쿰이라는 연료원으로 온실가스를 대량 방출해 인류를 위협한다.
그 외에도 기후위기를 재난의 스펙터클로 가공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차고 넘친다. 특정의 악당이 기후위기를 야기하고 박진감 넘치는 재난들 앞에 슈퍼히어로가 등장한다는 뻔한 설정을 끊임없이 변주한다. 이런 영화들 속에 재현되는 기후위기는 관객들에게 실제 세계를 결코 상기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장광설을 펼친다 해도 결국 악당과 영웅이 대결하는 권선징악이라는 액자에 갇힌 배경으로 전락할 뿐이다.
설령 봉준호의 <설국열차>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처럼 단순한 권선징악 구도에서 탈피해 기후 재난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예시한다고 해도 결국 종말론적 파국을 소비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기후위기는 단지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기후 조절 물질인 CW-7로 환원될 수 있는가? 녹는 빙하와 북극곰을 나란히 병렬시키는 코카콜라 광고와 비슷한 상상력은 기후위기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또는 <인터스텔라>가 가정하듯 온난화와 인구 증가에 기인한 행성 위기의 해법은 정말로 지구 행성을 떠나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지구에 멸종이 임박했으니 화성과 우주로 떠나자는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이조스의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가?
실재 세계를 환기시키지 못한 채 블록버스터에 볼거리로 삽입된 기후 재난이란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스펙타클의 기표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스펙터클로 가공된 재난이란 현실의 부재를 의미한다. 악당과 영웅이 싸우는 액션 활극을 위한 크로마키 배경으로 저만치 물러서고 만다. 그렇기에 오히려 기후위기에 대한 우리의 실제 감각을 무디게 한다. 관람 후에 버려진 팝콘 봉지처럼,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기입된 기후위기란 충분히 즐길 정도로 가벼워야 한다.
최근 영화 중 그래도 예외를 꼽으라면 아담 맥케이가 연출한 <돈 룩 업>일 것이다. 이 영화는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 소행성을 정확히 기후위기로 은유화한다. 자본, 미디어, 미국의 양당정치, 무감각한 대중이 기후위기에 대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대응하는지 블랙코미디 장르를 빌려 미국 좌파의 시선으로 극화한 블록버스터다. 물론 미국 사정을 모르는 관객들에는 단지 혜성 충돌로 지구가 붕괴된다는 설정의 아포칼립스 장르물로 비칠 가능성이 많지만, 기후 문제를 양념처럼 끼얹는 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의미의 갈피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가 기후위기를 진지하게 반영한 것은 차라리 지금이 아니라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이다. 우선 당대에 최고 흥행 가도를 달리던 케빈 코스트너의 티켓 파워를 끝장냈던 SF 영화 <워터월드>를 꼽을 수 있다. 망작으로 평가받는 이 영화는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지구를 물로 뒤덮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물론 극지방 빙하가 다 녹아 해수면이 상승해도 영화의 설정처럼 지상의 육지가 다 가라앉지는 않는다. 비과학적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근래 들어 재평가를 받는 이유는 풍전등화에 놓인 인류의 운명을 시급하게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최소한의 진의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워터월드>는 지구 해수면을 상승하게 한 주범으로 화석연료 기업들을 정확히 지목할뿐더러, 심지어 영화 속에 1989년 알래스카 해안에서 지상 최대의 오염 사건을 야기한 '엑손 발데즈Exxon Valdez' 로고를 뚜렷하게 적시한다. 지구에서 가장 큰 석유 회사를 적확하게 범죄자로 호명한 것이다. 이러한 용기는 최근의 허다한 블록버스터들이 갖지 못한 영화적 배짱이다.
영화 <투모로우>의 한 장면
그런가 하면, 2004년에 개봉된 <투모로우>는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와 화석연료 기업들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대서양 해류 순환(AMOC)’이 고장 나 북미가 삽시간에 얼어붙는다는 이야기로 대중에게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각성시킨 터였다. 당시 NASA는 정치권에 정치적 타격을 입힐까 봐 소속 과학자들에게 <투모로우>에 대한 언급을 삼가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확실히 <투모로우>는 대중에게 지구온난화의 재앙적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한 최초의 블록버스터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유의미한 상업영화로 봐야 한다. 더욱이 이 영화는 지극히 현재적이다. 당시 NASA는 <투모로우>의 설정이 과장된 억측이라고 비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들어 과학자들이 대서양 해류 순환이 고장 날 조짐이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속속 밝히는 실정이다. 지난 10월에는 44명의 세계적인 기후과학자가 수십 년 안에 대서양 해류 순환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투모로우'가 어느덧 '현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워터월드>와 <투모로우>는 예언적인 측면이 있다. 생태학자 한스 요나스가 주창한 '공포의 발견술'이란 미래에 닥쳐올 생태 재난을 미리 발견하고 대중에게 예시함으로써 각성을 촉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수면 상승과 대서양 해류 순환 붕괴와 같은 기후 재난의 풍경을 단지 배경으로 소비하지 않고 영화의 주된 서사로 삼았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고만고만한 아포칼립스 장르물에 비해 더 나은 시야를 제시한다.
'기후변화가 존재한다'와 '등장인물이 그 사실을 안다'는 지표는 기실 기후-행성 위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감정에 별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기후위기를 중국의 음모라고 여기는 트럼프와 미 극우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아니, 모두가 알고 있다. 단지 한계를 모르고 폭주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기생한 채 단기 이익이라는 단물에 중독돼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기후변화 벡델 테스트'의 한계이자, 정체성 정치에 정박된 미국 자유주의 담론의 초라한 행색일 것이다. 기후위기를 그저 재난의 배경으로 설정한 채 한 줌의 히어로들이 우쭐거리며 영웅 행세를 한다고 극장 밖 세상에 단 1인치라도 영향을 미치겠는가.
최초의 기후변화에 관한 할리우드의 작품은 〈The Unchained Goddess〉이라는 애니메이션이다. <멋진 인생>의 거장 프랭크 카프라가 연출한 작품인데, 세상에 나온 해가 1958년. 이 연도는 중요하다. 인류의 운명을 담은 최초의 과학 보고서를 최대의 석유회사 엑손Exxon이 은폐했던 해이자, 데이비드 킬링 박사가 하와이 화산섬에서 인류 최초로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했던 해다. 말하자면 최초의 기후변화 영화는 그래도 시대적 흐름에 기민하게 동조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는 고작 배경에 기후변화가 존재한다는 것과 등장인물이 그 사실을 안다는 두 가지 지표의 반영만으로도 칭찬을 들어야 하는 지체의 늪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만큼 퇴행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독립-예술영화와 다큐멘터리 분야에선 그나마 기후-생태 위기를 꾸준히 반영해 왔고 이 경향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기후위기 쓰나미에 가장 먼저 쓸려나가는 사회적 약자와 남반구 이야기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비스트(Beasts of the Southern Wild)>와 기후-생태 위기 속에서 동시에 허물어지고 있는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탐색한 <퍼스트 리폼드>처럼, 또는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벵골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고발하는 숱한 다큐들처럼 지금의 행성 위기를 기민하게 직시하려는 움직임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주류 매체가 허다하게 인용하는 빙하의 쿵 소리보다 더 빠르게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그런 까닭에 망토 입은 히어로들이 기후변화를 인식하냐를 놓고 따지는 것 자체가 한가로운 농담에 가깝다. 헐리우드 상업영화계는 여전히 누가 누가 정치적으로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지, 아니면 <바비>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가 제작 과정에서 얼마나 텀블러를 많이 애용하고 탄소배출권을 구매했는지를 놓고 서로 칭찬하기에 바쁘다. 제작 과정에서 전기차를 사용하고 재활용을 잘했다고 칭찬받은 <바비>의 흥행으로, 플라스틱 인형 판매가 급증한 역설적 상황에 대해 그들은 그저 입을 다물 뿐이다. <바비> 투자사들이 화석연료 산업과 연결된 그 더러운 진창의 발자국도 슬그머니 지워버린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현재 미국 할리우드와 '기후변화 벡델 테스트'와 같은 자유주의 담론은 절체의 행성 위기 앞에서도 그 어떤 성찰과 체제의 전환을 사유하지 않는 녹색 자본주의의 영화적 버전이나 진배없다. 군데군데 녹색을 칠하고 친환경 제품을 소비하면 영원한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 믿는 녹색 자본주의의 환영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도 출신의 작가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에서 "기후위기가 곧 문학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문학이 인간관계의 갈등과 개인의 내면만을 집요하게 파헤쳤을 뿐, 지구 행성의 생태 한계를 고려하지도 않았거니와 자연-인간의 관계에 대한 사유도 도외시했다는 분석이다. 문학을 비롯한 근대의 문화가 지구라는 행성적 조건을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을 무가치한 타자로 취급하고 지속적으로 수탈해 온 자본주의의 족적에 기생한 것 아니냐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그는 자연 속의 인간, 지구 속의 인간의 운명을 성찰하는 인류세의 문학을 요청한다. 기후위기 극복이란 바로 인간주의에 함몰된 문학과 상상력의 해방이라는 것이다.
고시의 말을 변주해 보면, 기후위기는 곧 영화의 위기이기도 하다. 막대한 탄소를 배출하며 블록버스터를 제작해 왔던 할리우드와 상업영화는 그 재현 양식에서마저 여전히 인간의 자연적 조건을 사유하지 않는다. 인간이 어떻게 지구 행성의 조건과 한계를 존중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그 상상력과 언어가 미처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세계를 감각하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잃어버린 문화란 인류의 유일한 요람을 집어삼키고 있는 이 파괴적인 체제의 알리바이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트위스터스 스틸의 실제 배경이었던 붕괴된 켄터키 극장 사진: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영화계는 어떤가? 사실 지금까지 써내려온 이 짧은 에세이는 한국 영화계의 위치를 들여다보기 위한 지남철과도 같다. 애석하게도, 일부 다큐를 제외하고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한국 영화계는 벡델 테스트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행성 위기에 대한 감각이 심각하게 뒤쳐져 있다.
제작 과정은 물론 재현 과정에 걸쳐, 모르쇠와 침묵으로 일관한다. 영화제도, 영화기관들도 속수무책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 지속가능한 영화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우리 삶의 지속가능성을 형해화하는 기후-생태 위기에 대해 눈과 귀를 닫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영화 산업이 불가역적인 규모로 축소되었음에도, 기후-생태 위기의 파도에 실려 부단히 떠내려 올 무수한 감염병의 위협 같은 것에도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 흔한 기후정의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그렇다고 과연 기후악당 국가의 영화계답다고 냉소하기엔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녹록치 않다.
조금 나이브한 비유이긴 하지만, 스크린이 뜯겨나간 극장에는 영화의 미래가 없다. <트위스터스>의 실제 배경이었던 켄터키의 붕괴된 저 극장 스크린에 비친 것은 무엇인가? 가상의 재현인가, 실재인가? 영화가, 그 누구보다 먼저 인간의 운명을 염려하던 예술과 문화로서 계속 기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질문에 즉시 대답해야만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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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은 영화 연출이 주업이지만, 칼럼도 쓰고 책도 쓰고 강의도 나간다. 동분서주 오지랖을 떠는 것 같아도 결국엔 이야기꾼이 되고 싶은 백수 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