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1918년의 스페인독감은 세계적으로 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후 1957년 아시아 독감은 100만 명, 1968년 홍콩독감으로는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20세기는 인류에게 있어 재난의 시대였다. 특히 인류가 두 차례에 걸쳐 벌인 세계대전은 1억 5천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이들 중 군인은 약 4천만 명이었으니, 군인의 배가 넘는 민간인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셈이었다. 원자폭탄 또한 이 시기에 발명되었다. 게걸스럽게 이어지는 식민지배와 전쟁은 전 지구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고 갔다.
이런 시대에 등장한 생각이 실존주의였다. 사르트르는 인류의 과도한 욕망이 무분별한(의도하지 않은)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었다고 보았으며 ‘자유에 따르는 책임’과 ‘타인(사회)에 대한 의무’를 강조했다. 또한, 지식이나 정보, 문화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자들을 ‘사회적 발언자’로 규정함으로써 이성을 가진 인간의 사회참여를 주장했다. 이는 ‘주체적 참여’를 핵심으로 하는 실존주의 정신의 토대가 되었고, 이 시기 사르트르와 함께 다양한 사회비평과 예술작품을 통해 실존주의를 구체화한 작가가 바로 알베르 카뮈이다.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
카뮈는 1913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이주한 프랑스인 아버지와 스페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프랑스계 이민자로 태어났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피에누아르’라고 불렀다. 카뮈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사망했고, 알제리는 독립운동으로 사회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카뮈는 지독히도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카뮈의 세계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개인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조리한 현실과 아이러니한 사회갈등의 이야기들은 훗날 카뮈의 작품들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결핵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자 등 다양한 일을 하며 공산당 활동을 했던 카뮈는 자신의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한 큰 틀의 기획으로 ‘부정-긍정-사랑’의 연작을 구상했다. 이중 ‘(인간과 사회에 대한)긍정’을 담은 작품이 <페스트>(1947)다.
페스트
(페스트는 숙주인 쥐나 벼룩으로 인해 사람들한테 전파된다고 알려졌는데, 혈관 내에 피가 응고되어 부패하거나 괴사하면서 사람의 피부와 근육이 검은색으로 변하기에 ‘흑사병(black death)’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크게 유행해 1~2억 명이 희생됐다.)
카뮈는 소설 페스트가 하나의 기록이자 연대기로 읽히기를 원했다. 왜일까. 그것은 소설작법의 한 형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카뮈가 목격한 인간과 사회의 알레고리적인 단면을 최대한 현실에 가까운 형태로 소환하고자 했음이었다.
“어떤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 시민들은 오래 일하지만, 그건 한결같이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에서 하는 일이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없고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페스트> 중에서
페스트가 창궐한 17, 18세기, 일부 페스트 의사들이 착용한 가면. 부리처럼 생긴 가면에는 향기나는 재료를 채웠다. 공기 전염을 막기 위해서다. 출처: Unsplash, Erdei Richárd
“오늘 페스트가 여러분에게 관여하게 된 것은 반성과 성찰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리외는 파늘루와 논쟁하면서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이라며 여행객인 타루와 함께 자원봉사대를 구성해 재난 해결에 앞장선다. 이후 무고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파늘루 또한 자원봉사대에 합류하고 소설의 인물들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 페스트 해결에 나선다.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 싸운 사람들 덕분에 점차 페스트는 수그러들고 마침내 도시는 해방된다.
재난시대의 윤리
엄밀히 얘기하자면 페스트는 ‘재난 이후’의 상황을 주로 담아내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재난이 시작되는 것은 재난 이후라는 뜻이다. 사실 바이러스나 질병이라는 것은 세포의 이동이나 진행을 표현하는 인간의 명명일 뿐이다. 이를테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불의에 맞서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도피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페스트는 이러한 다양한 가치관의 갈등과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국가권력의 책임 범위, 자유의 사회적 성격 등을 파헤치며 재난의 참모습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재난의 역사이듯이 인류는 21세기에도 수많은 위기에 봉착해 있다. 페스트는 재난소설의 효시로서 재난에 대처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촘촘하게 묘사하고 있다. 카뮈는 이 과정에서 기록자(작가)로서의 가치판단을 최대한 배제하고 오로지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로 일관한다. 그리고 마침내 ‘위기보다 중요한 것은 위기에 대처하는 인간의 태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류 역사 이래 재난은 언제나 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리외는 도시의 환희와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환희는 항상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우리의 일상에서 꾸준히 도사리다가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에 죽음을 불러올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페스트> 중에서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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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조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한내와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