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행정협정 불평등조약 미군 범죄 부채질… 협정 앞세워 수도물값까지 체불

지난 2월19일 서울 이태원의 미군전용클럽 뉴아마존에서 일어난 김아무개(32·여)씨 살해사건은 이 의문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다. “주한미군의 역사는 미군 범죄의 역사”라는 극단적인 단정이 나올 만큼 미군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는 수시로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 92년부터 두드러진 하락추세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해마다 500∼700건의 미군 범죄가 공식적으로 집계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번 사건은 미군 범죄가 쉽사리 차단될 수 없는 우리 현실의 조건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범행을 자백한 미8군 47기갑대대 소속 크리스토퍼 매카시(22) 상병이 미군 영내에 머무는 등 우리나라 수사기관이 철저한 조사를 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한-미행정협정(SOFA)과 합의의사록 등 부속문서는 우리나라 수사·사법기관의 권한을 절름발이로 만들고 있다. 대표적인 독소조항만 뽑아보면 이렇다.

미군이 요청하면 재판권 포기해야

(사진/서울 이태원 미군전용클럽 여종업원 살해사건의 피의자를 호송한 미군 수사관들.\”취재진이 5초 안에 떠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등 고압적인 자세로 눈총을 받았다)

△미군 범죄에 대한 형사관할권을 우리나라가 배타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경우에도 미군의 요청에 따라 재판권을 포기할 수 있다(합의의사록 제22조 제2항에 관하여) △우리나라 정부가 1차적 재판권을 갖고 있는 경우에도 미국이 요청하면 포기한다(합의의사록 제22조 제3항 (나)에 관하여). 본 협정은 재판권 포기를 ‘호의적으로 고려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부속문서인 합의의사록에는 ‘포기한다’는 표현이 쓰였다. △모든 재판절차가 종결되고 우리나라 당국의 요청이 있을 때까지 피의자는 미군 당국이 구금한다(협정 제22조 5.(다)) △피고인이 무죄 판결을 받으면 검찰은 항소할 수 없다(합의의사록 제22조 제9항에 관하여) △실형을 살고 있는 범인도 미국이 요청하면 석방하도록 호의적인 고려를 해야 한다(협정 제22조 7. (나)).

이처럼 미군에 지나친 특권을 주는 법에 따라 미군 범죄가 처리되는데다, 수사기관의 무성의하고 굴욕적인 태도가 더해져 사건해결이 미궁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지난해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발생한 기지촌 여성의 죽음이 그 예다. 지난해 1월30일 아침 전기줄에 목이 감긴 채 발견된 신아무개(46)씨의 주검에는 립스틱으로 ‘whore’(창녀)라는 낙서가 쓰여 있었다. 전날 밤 신씨에게 ‘손님’을 소개한 여인이 용의자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경찰은 미군의 협조를 얻기 힘들다며 사진대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웬만한 사건은 수사도 안 해

이번 사건에서도 경찰과 검찰은 평소 관행과 달리 미군 피의자를 ‘특별 배려’해 빈축을 샀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지난 2월23일 매카시 상병을 미군으로부터 잠시 넘겨받아 조사하면서 보도진에게 알린 출두시각보다 30분 앞서 신병을 인수해 취재에 혼선을 줬다. 또 조사실 입구에 통제선을 설치하고 의경 10여명을 배치하기도 했다. 이튿날 오후에 열린 현장검증에서는 공개 방침을 바꿔 취재진을 강제로 몰아냈다. 미군쪽은 “취재진이 5초 안에 떠나지 않으면 매카시 상병을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의자의 초상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은 타당한 것이지만, 유독 미군 범죄 사건에서만 철저히 지켜진다는 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이다.

미군에게 폭행당한 한 여성 피해자의 증언은 수사기관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경찰에 신고하긴 했어요. 그렇지만 사건이 제대로 처리될지 모르겠어요. 저한테 뭐라는지 아세요?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원래 처녀였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더니 미군하고 왜 어울려 다녔느냐….”

경기도 의정부시 시민단체 두레방의 유영님 대표는 “대부분 변두리 인생인 피해자들의 신분이 미군 범죄에 대한 정부와 경찰의 대응 태도를 규정하는 게 아니냐”며 “사람이 죽기라도 하지 않으면 사건이 나도 경찰에서 나와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피해를 당한 여성이 속한 업소 주인이 적당한 치료비를 받아내고 사건을 무마하는가 하면, 지역주민들도 시끄러워지는 것을 우려해 입을 다물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는 숨진 김씨가 일했던 술집 주인 배영옥(58·여)씨가 적극적으로 매카시 상병의 도피를 도운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배씨는 술집 내실에서 매카시 상병이 김씨를 목졸라 숨지게 한 사실을 목격하고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빨리 달아나라”고 재촉했다는 것이다. 배씨는 2월24일 범인은닉 및 윤락알선 혐의로 구속됐다.

동두천시 기지촌 여성들의 공동체인 새움터의 김주영 사무국장은 “미군 범죄는 정부와 미군에 의해 기지촌이 유지되고 있는 미군 매춘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기지촌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현실이 한-미행정협정의 문제점과 함께 작용해 미군 범죄를 길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군 범죄의 피해자는 꼭 기지촌 주변의 허물어진 인생들만이 아니다. 미군 범죄의 유형별 비중을 보면 80년대 초반에는 폭력이 30% 안팎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지만 80년대 후반부터 도로교통법 위반 범죄가 늘어나기 시작해 90년대 들어서는 50%를 넘고 있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도 15∼20%에 이른다. 무차별적 대중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번번이 무산되는 용산 미군기지 이전 문제

(사진/서울 한복판을 차지한 용산 미군기지. 기지 이전문제가 몇 차례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지난해 12월6일 새벽 2시40분께 의정부 시청 뒤 사패터널 입구 갓길에 세워둔 승용차를 미군 구급차가 들이받은 사건이 있었다. 승용차 안에는 한아무개(26)씨와 여자친구가 타고 있었는데, 한씨는 이때의 충격으로 목뼈가 부러져 목 아래부분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한씨 여자친구의 부모 등 현장에 일찍 도착한 증인들에 따르면 사고를 낸 미군은 운동복 차림에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등 음주 또는 약물투여를 의심케 하는 행동을 보였고 구급차 안에는 한국인 여성과 카투사도 타고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미군 헌병들에게 모든 조사를 맡긴 채 가해자쪽 전원의 신병을 미군에 넘겼다. 미군의 조사는 졸음운전으로 결론났고 보상금은 소송을 통해 받으라는 통보를 해왔다. 한씨 가족들이 “범죄행위를 의심할 만한 정황이 명백히 있는데 왜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느냐”고 항의하자 경찰은 “미군에 대해서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부는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의 개정을 위해 지난 96년 11월 중단된 협상을 다시 열자고 계속 요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의 가장 큰 관심은 미군 범죄자의 신병 인도 시기를 지금의 판결확정 뒤에서 기소할 때로 앞당기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쪽으로부터는 협상 재개를 검토중이라는 형식적인 메아리만 돌아오고 있는 상태다.

한-미행정협정의 불평등성은 형사관할권 문제에서 가장 감성적으로 다가오지만, 다른 숱한 분야에서도 불합리한 사태를 빚고 있다. 최근 두 가지 쟁점이 불거지고 있는데, 바로 용산 미군헬기장 이전 문제와 원주 주둔 미군기지의 수도료 체납 문제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섬에 따라 박물관 부지에 포함된 지금의 헬기장을 서울 용산구 이촌1동 한강 둔치로 옮기는 방안을 정부에 제시했다. 그러나 한강 둔치에 헬기장 구조물을 건설할 경우 홍수 때 강물의 흐름을 막아 범람이 우려되고, 엄청난 소음으로 인해 시민 휴식공간으로서 제 기능을 잃을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녹색연합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금도 용산 헬기장 주변은 생활환경치(밤 40㏈, 낮 50㏈)를 크게 넘어선 80㏈ 안팎의 소음으로 주변 주택가 주민과 학교에 피해를 주고 있다. 결국 수도 한복판을 차지한 미군기지의 존재 자체가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는 셈이다. 미군기지 이전은 몇 차례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미군의 안보논리에 막혀 번번이 무산됐다.

강원도 원주에 주둔한 미군부대 캠프롱의 수도료 체납은 우리 정부의 세금징수 질서를 무시하는 것으로 원주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캠프롱이 지난 95년 12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체납한 수도료는 모두 1억1355만여원. 95년 12월1일로 상수도 요금체계가 통폐합되면서 t당 320원이던 공공용이 t당 630원인 업무용으로 전환됐는데도 미군쪽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가장 값싼 가정용 요금(t당 350원)을 내왔기 때문이다. 미군은 ‘공익사업과 용역의 이용에서 다른 어떤 이용자보다 불리한 요금을 낼 수 없다’는 제105차 한미합동위원회 의결(75년 7월)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원주시는 이 문제가 불거지자 수도급수조례를 개정해 가정용의 구분내용란 가운데 ‘원호단체’를 ‘원호단체, 미군부대’로 고쳤다. 이에 대해 규탄집회와 대시민캠페인을 계획하고 있는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는 “미군부대의 탈법·탈세행위를 적당히 해결하려 하지 말고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을 즉시 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주한미군 범죄 항의집회에 욕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부지에 포함된 헬기장의 이촌동 둔치 이전안은 시민 휴식공간이라는 둔치의 기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국제법)는 “한-미행정협정은 문제되는 일부 조항만 손질할 게 아니라 평등과 호혜성이라는 원칙에 따라 전면 개정해야만 한-미관계가 진정한 동반자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현실적인 약자의 비현실적인 바람일 뿐인가. 지난 2월25일 제257회를 맞은 주한미군범죄근절 운동본부의 금요집회는 평소와 다름없는 구호로 진행됐다. “살인사건을 철저히 수사하고 한-미행정협정을 개정하라.” 신경이 예민해진 경찰이 전투경찰 2개중대를 주변에 배치한 게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운동본부의 김동심 사무처장은 그동안의 금요집회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부분 미군들은 관심없이 지나치고 일부는 욕을 하곤 합니다. 98년에는 ‘미군이 싫으면 북한에 가라. 북한에는 자유도 미군도 없다’는 편지를 주고 간 미군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명이 고개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을 뿐입니다.”

박용현 기자

piao@hani.co.kr

한겨레21 2000년 03월 09일 제2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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