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와 관계 당국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
: 아사히 신문 윤봉길의사 연행사진 진상규명위원회 구성을 촉구한다.
2000년 4월 29일은 윤의사의 의거 6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제 <아사히 신문 보도사진>과 관련된 오랜 공방을 마무리해야 할때도 된 듯합니다. 더이상 이 문제를 놓고 의혹이 계속되어서는 윤봉길 의사에게도 누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역사 기록이 있다면 자라나는 후대를 위해서도 바로 잡혀야 합니다. 이에 “아사히 신문 윤봉길의사 연행사진의 진상 규명을 바라는 네트로폴리탄 행동”은 <윤의사 기념사업회>와 관계 당국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질의서를 보냅니다.
1 윤의사 기념사업회 상임의사인 윤주 님께서는 기회있을 때마다 “상하이 의거로 체포된 사람은 윤의사 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진에 나와 있는 인물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셨는데요…
ㅇ 상하이 타임즈, 申報, 차이나 프레스를 비롯한 당시 모든 신문과 심지어 일본신문, 97년 모 국내신문에까지도 의거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은 5~40명으로 게재되어 있읍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윤의사의 의거는 약 2만여명의 일군경과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국의 4성장군을 비롯한 7명의 일제핵심고관들을 살상시킨 폭탄테러입니다. 그런 테러범을 체포 색출하는데, 당연히 주범뿐만 아니라 공범, 종범, 방조범, 기타 혐의가 있다는 수상한 불특정다수를 일단 체포 연행해놓고 보는 것은 기초상식일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의사 의거 당시 현장목격자도 아닌 윤주 님께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윤주님은 또한 “상하이 타임스 4월30일자 기사도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이 기사에는 윤의사가 의거직후 군경에 폭행 당해 실신상태에 이른 것으로 나와 있으나 거사 직후 주위에 있던 일본인들이 윤의사를 폭행하자 일본군이 군중을 헤치고 윤의사를 체포,압송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신 바 있는데요.
ㅇ 아시다시피 <상하이 타임스> 1932년 4월 30일자 기사에는 “회오리 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한국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에 의해 구타당해 쓰러졌다. 주먹과 군화,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사람이 죽게 된다면 그 한국인이었을 것이다.…(중략)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일본 군경들은 그가 쓰러진 주위에 비상경계선을 쳤다. 곧 차 한대가 나타났다. 그 한국인은 머리가 들려져 짐짝처럼 뒷좌석에 버려졌다.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구요.
ㅇ 의거를 보도한 1932년 4월 30일자 중국 {申報} 1면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우선 “범인 현장에서 체포(兇手卽被捕)”라는 제목으로
“당시 식단 아래에는 일본헌병이 도처에 밀집하여 있었다. 그때 식단 뒤에 있던 양복차림의 한 소년이 갑자기 도화선에 불을 붙이더니 불꽃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소년은 바로 식단을 향해 뛰어갔고 곧 폭발소리가 들려왔다. 일본 헌병이 곧 달려가 소년의 몸 뒤로부터 허리를 끌어안았고 주위의 일본인도 일본 헌병과 합세하여 소년을 붙잡은 후 집단구타를 가하였는데 그 소년의 얼굴은 곧 피투성이가 되어버렸으며 옷차림은 엉망진창으로 변하여 버렸다. 일본 헌병대가 곧 그 소년을 江灣路 일본 헌병 사령부에 압송하여 심문을 진행하였다.”라고 되어 있고,
“▲ 범인 진술(兇手供詞)”이라는 제목으로
“日日社 소식에 따르면, 연행된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이 江灣路 일본군 사령부에 압송된 후 바로 헌병대장으로부터 엄밀한 심문을 받았다. 중국인 다섯명은 중대한 혐의가 없으므로 바로 석방되었고 러시아인은 홍구 공원의 문지기로서 범인을 도와 살인을 저지르게 하였다는 혐의로 계속 구금되어 있다.
맨 나중 조선인 차례가 되자 한 청년이 일어나서 자기 이름이 윤봉길이고 나이는 25세로서 프랑스 조계내 모 세탁염색회사에 취직중이며 작년 8월에 청도를 거쳐 상해로 와서 한국독립당에 가입을 하였다고 말하며 시라카와 등을 쓰러뜨린 폭탄은 바로 자신이 던졌으며 공모자는 한국인 친구 3명이 했다고 자진해서 솔직히 밝혔다한다. 일본헌병사령부는 주모자를 찾기 위한 수사에 착수하였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윤의사 의거 당시 윤주씨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목격자도 아닌데, 단순한 주관적인 판단으로 어떻게 보면 일제신문들의 논조를 대변하듯이 당시 중국 최고권위의 영자신문 <상하이 타임즈>와 <신보>의 객관적인 현장보도기사를 부정하는 근거와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윤주님은 또 당시 아사히 신문에 실렸던, 버버리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든채 점잖게 연행되는 문제의 인물사진과 “현재 국내에 살고 있는 조카들과 닮은 점이 많다.”(문화일보 4.13)고 주장하셨는데요.
ㅇ한국일보 95.4.28, 경향신문 97.4.28, 서울신문 97.4.28, 문화일보 97.4.29, 한국경제 97.4.29 등에는 다은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윤봉길(매헌)의사 유족들은 윤의사 의거 63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28일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에 있는 윤의사 동상이 생전의 모습을 전혀 닮지 않았다』며 동상을 다시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한국일보 95.4.28)
-윤봉길의사 동상 실제모습과 다르다 : 6촌동생 수정요구에 기념회측 “표현의 차이” : 윤봉길의사 상하이(上海) 의거 65주년 기념일(29일)을 앞두고 서울 양재동 윤봉길기념관에 세워진 윤의사 동상이 실제와 크게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 윤의사의 6촌동생인 명의씨(86·대홍기획 회장)는 지난 92년 건립된 동상의 얼굴 윤곽과 이목구비, 체격 등이 실제와 다르다며 시정을 요구.
문제의 동상은 91년 윤봉길기념사업회(회장 김상길)가 작가 심정기씨에게 의뢰해 제작했다. 윤의사가 만주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웃에서 살았다는 명의씨는 동상이 2개월만에 졸속 제작돼 표준영정 등과의 차이가 심각하다고 지적.
얼굴 생김새가 다른데다 체격도 지나치게 뚱뚱하게 표현됐다는 것.
생전에 한번도 입지 않았던 바바리코트 차림도 어색하다고 강조했다.
명의씨는 『동상 제막후 동상의 얼굴·체격 등이 실제와 다르다는 여론이 있어 유족측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기념사업회측은 동상이 잘못 제작됐음을 인정하면서도 5년이 지나도록 재건립 등 수정 보완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경향신문 97.4.28)
– “선열 얼굴 제각각” : …항일운동의 상징인 윤봉길 의사의 경우는 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생전에 찍은 사진이 남아있기까지 하지만 동상은 전연 딴 사람입니다. 지난 91년 양재동에 매헌 기념관에 세워진 윤봉길 의사 동상입니다. 사진모습과 전혀 담지 않았습니다. (SBS 8뉴스 기동취재 99.4.28)
이를 종합해 보면 윤주 님을 제외한 수많은 윤봉길 의사 유족들이 오랜세월에 걸쳐 원래 윤의사 모습이 바바리를 입은 동상과 전혀 다르다고 호소해 왔는데 이것을 묵살한 이유와 배경을 해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경향신문 1999. 7. 9. 자 사회면 기사를 보면 현재 윤주 님께서 상임이사를 맡고 계시는 윤의사 기념사업회는 97년 서울시 등으로부터 예식금지조치를 받고도 불법영업을 계속했으며 95년에는 서초세무서로부터 탈세액을 추징당하기도 했다고 되어 있는데요. 이런 사건과 윤의사 동상건립과 관계는 없는지 납득할만한 해명있으시길 바랍니다.
4. 동아일보 1999년 4월 28일자 기사를 보면 “체포사진 가짜일 수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 ….윤의사를 연구해온 상하이 주재 한국 총영사관 강효백(姜孝伯)영사는 28일 “문제의 사진 속의 인물은 이마 눈썹 코 등 얼굴형과 체구에서 거사 사흘전 한인애국단 선서식 때의 윤의사와 확연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강영사에 따르면 △거사당시 윤의사는 25세였으나 사진 속의 인물은 35∼50세로 보이며 △거사직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군의 폭행으로 정신을 잃고 진흙탕에 쓰러졌던 사람치고는 옷차림이 너무 말쑥한 데다 모자까지 들고 끌려가는 등 윤의사로 보기에는 의문점이 너무 많다는 것. 이 때문에 강영사는 사진 속의 인물이 거사직후 현장에서 일본군이 체포한 조선인 8명 등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 윤의사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준엽(金俊燁·전고려대총장)사회과학원 이사장은 “의문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전문가의 고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매헌 윤봉길평전’을 쓴 김학준(金學俊)인천대총장은 “체포직후 윤의사가 너무 당당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일본측이 다른 사진을 골라 썼을 가능성이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윤의사 기념사업회의 윤주 상임이사님과 윤남의 고문님은 이에 대해 아사히 신문에 실린 문제의 인물이 윤봉길의사가 맞다고 주장하시면서 “당시 훙커우 공원에는 오전 한차례 비가 내렸지만 흙이 촉촉이 젖었을 뿐 진흙탕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씀하신 바 있고, 또 “거사 직후 일본인 군중이 윤의사를 폭행하자 일본군이 재빨리 군중을 흩어버려 윤의사가 중절모 등을 집어든 것으로 안다”고 하셨는데요.
ㅇ 의거 당일 현장보도자료 및 상하이 기상자료를 뒤져보면 그날 사실 비가 억수로 내려 바닥이 진창이었다고 합니다. 윤의사 기념사업회의 윤주 상임이사님과 윤남의 고문님은 무슨 근거로 모든 사실 자료 정황증거를 무시하며 일본군의 행동을 그런식으로 단정하며 한편의 시나리오를 쓰듯 당시 아사히 신문에 실린 문제의 인물이 윤의사가 맞다고 극구 주장하시는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5. 윤봉길 의사 의거 68주년을 맞아 윤주님을 비롯한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측과 교육부 등 관계당국에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윤의사 의거 69주년을 맞는 시점에 이 문제를 둘러싼 의혹을 풀기 위해서 이제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측에서 마음을 열고 당시 윤의사를 잘 아는 인물과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성의있는 답변을 바랍니다.
<아사히 신문 윤봉길의사 연행사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네트로폴리탄 행동>
(2000.4.28일 www.hotissue.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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