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서 일을 하던 농부가 허리춤에서 핸드폰을꺼내어 서울 사는 아들네 전화를 받는다. 핸드폰이 또 하나의 가족이 되는 순간. 손끝 하나로 새로 이사온 집의 인사치레가 끝나는 이런 집에 사니 부러우시죠 하고 묻는 여배우가 등장하는 인터넷아파트 광고도 있다. TV에 등장하는 디지털 세상의 전형이다. 그런데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자. 들판에서 핸드폰으로 짜장면을 시켜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 농기구들은 여전히 구식이고 화면속의 농부는 여전히 낫을 들고 허리 구부려 일하고 있으며 집 지키는 건 죄다 여자들이다. 사이버세상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봉건주의와 전근대의 양상을 본다.
한정된 공간에서 인터넷만을 이용해 얼마나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실험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터넷 상거래가 재벌해체의 원동력이 될 거라는 조심스런 추측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디지털이 가히 혁명적일 수는 있겠다.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다들 이렇게 법석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생활에는 아직 아날로그가 많다. 기계조작법 몇 가지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모두 그렇게 돌아갈 수만은 없는 거 아닌가. 배고픔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 혁명이었다면, 혁명이나 운동, 생활방식과 사고체계 뭐 그런 것은 무엇으로도 코드화될 수 없는 철저한 아날로그 방식이다. 그래서 당위와 관성으로만 외쳐지는 ‘운동의 이론과 과학’은 디지털’혁명’이라는 말만큼 공허하다.
디지털 운운하는 세상이 어느새 우리에게 이러한 기계적 편향을 주입하지는 않았는가. 면죄부로만 기능하는 제3의 대안, 흑백논리를 경계한답시고 자행하는 ‘무위(無爲)’, 탁상 위에서만 체면 차리는 소심함, 서로가 깨지고 부서지는 논쟁이 아니라 사대를 밟고 이기기 위한 입씨름, 과학적 무엇 무엇이라는 미명하에 화석화된, 서로가 잊어버린 줄도 모르는 휴머니즘, 과정과 효과로서 추구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족하기 위한 운동, 또 다른 이즘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려는 관성, 결과를 위해 질책과 강요만이 되풀이되는 인간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사물과 사람을 코드화하는 오만함.
극복할 것을 먼저 극복하지 못한채 틀에 박혀 끊임없이 형식을 갖추고 무언가를 규정짓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디지털 혁명의 파장이라면 차라리 그런 건 안 하는니만 못하다. 과학기술의 목적이 도처에 널린 기계가 아니라 그로인해 편해지는 세상이라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회주의 정권이라기 보다 사회주의 세상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맞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처음부터 그런게 아니었던가?
<정나리/연세대 총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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