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씨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마 박종화란 이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91년 강경대-박승희-김귀정으로 이어지던 분신정국에서 쉴 새없이 불려졌던 ‘투쟁의 한길로’를 만든 사람이다. 단순하기에 아름다웠던 내 대학시절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노래.
“역사의 부름앞에 부끄러운 자되어 조국을 등질 수 없어…” 흥겨웠다. 자고 일어나면 푸릇한 젊음들이 차례로 스러지던 암울한 시절이었지만 세상은 요동치고 있었고, 박종화만큼 우리도 젊었다. 강경대 열사가 가장 좋아했다던 노래, 그래서 우리는 시도때도 없이 불렀다. 종로에서, 그리고 연세대에서, 고랑을 메워가며 기어이 강경대를 망월동에 안장했던 광주에서.
고은 시인이 목놓아 불렀듯 “강경대, 그대 스무살 꽃다운 청춘”이 경찰의 쇠파이프 아래 목숨을 잃은 그 순간, 우리는 80년대를 짓눌러온 폭력의 공포가 여전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강경대의 죽음을 듣고 달려간 이들이 채 분노를 삼키기도 전에 전해진 박승희 열사의 분신 소식. 문익환 목사님은 절규했다, “더 이상 죽지마, 죽어선 안 돼”라고. 그랬다. 사람이 죽어가던 시절이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수십만이 분노해 함께 싸우고, ‘불안에 떨던 적들’이 결사적으로 덤비던 시절이었다.
그 해 5월에서 6월, 긴 시간을 길바닥에서 보냈지만, 수업과는 담을 쌓았고 손에는 늘 깨어진 보도블럭과 각목뿐이었지만 유감은 없었다. 원없이 싸울 수 있었으므로 차라리 행복했다. 민중과 만나지도 못했으면서 민중을 이야기하며 가슴이 뜨거웠고, 현장 투신외에 다른 길은 생각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최소한 지금처럼 ‘쪼잔한 것’들로 인해 마음이 부서지고, 사람이 갈라서는 세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젊은 우리 옆에 박종화의 노래가 있었다.
박종화를 가장 가까이서 본 것은 94년 가을이었다. 그는 성남시에서 공연중이었다.
공연 중간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갔다 그와 마주쳤는 데, 이런 인연을 그가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속도 창시도 없이…”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는 여전히 불덩이였다.
한참을 잊고 있었다, 민예총에서 한 통의 전화가 오기까지. 8.15 방북단중 공항에서 연행되어 구속된 범민련 관계자중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구속 이유는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이적표현물제작및 반포. 이번 만남을 축하하기위해 만든 음반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예전 [고난의 행군]을 노래로 형상화했던 그이기에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사실 나는 요즘 자신이 변했다고 말하기보다 세상이 변했음을 강변하는 사람이 지겹다. 이런 내게 박종화의 소식은 묘한 안도감을 갖게 했다. 국가보안법을 붙잡고 씨름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럴듯한 국보법 사안이 없어지는 것이 세상의 민주화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약싹빠른 세태때문일거라 지레짐작하던 터이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국가보안법 담당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게 국보법 사안에 대해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게로 자꾸 뒷전으로 미뤄두고 생각하던 보안법철폐 투쟁이다. 박종화란 이름이 나를 부끄럽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실 낯간지러운 것이고 살다보면 이런저런 외도나 변절(?)을 하기 마련이라, 한결같은 이를 보게 되어 기분이 좋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박종화는 감옥에 있는 데 나는 그로인해 깨우침을 받은 듯 헤헤거리는 게 조금 멋적다. (철없게도)국가보안법 체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기보다 한 인간에 대한 기억때문에 흥겹다. “탄압의 총 소리 나를 부르는 함성”을 아무 거리낌없이 불러댔던 청년들이 치기어린 바보들이 아니라 원래 싸우는 자의 본 모습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듣고 싶다. 박종화가 이적표현물 제작으로 걸려든 음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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