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좌파는 핵에 반대하나?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 이어 원자력은 좌파의 단결을 방해하는 이슈다마침내 새로운 좌파 동맹이 등장했지만다가오는 총선을 위해 모인 좌파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지 못했다.

6월 20퇴임하는 에릭 코케렐(Éric Coquerel) LFI 의원은 프랑스의 거물급 인사들 앞에서 새로운 좌파 동맹(Nouveau Front Populaire, NFP)이 집권해도 프랑스의 원자력 발전소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그들이 추진해 온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정했다이는 탈원전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정당으로서는 분명한 타협이지만민간 원전에 적대적인 생태주의자원전에 애착을 가진 공산주의자찬성하는 사회주의자 등 이 문제에 대한 좌파의 분열된 상태를 드러낸 것이다.

1968년 이후 혼란 속에서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제2좌파를 제외하고역사적으로 프랑스 좌파는 모든 형태의 원자력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좌파는 프랑스의 핵 프로그램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심지어 1985년 집권 당시 프랑스 폴리네시아(French Polynesia)에서 핵실험을 막으려던 그린피스 보트 레인보우 워리어(Rainbow Warrior)를 침몰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원자력을 지지했던 좌파에서 현재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 과정을 이해해 보자.

노동자들을 해방시킬 에너지였던 원자력

좌파에서 원자력의 상징은 단연 프레데릭 졸리오(Frédéric Joliot)이다그는 마리와 피에르 퀴리의 사위이자아내 이렌 퀴리와 함께 193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이다또한그는 공산당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9년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 파리에 위치한 고등 교육 및 연구 기관)에서 그와 그의 팀은 원자로 설계원자로 안정화 수단원자폭탄의 서곡이 될 혁신적인 폭발물에 관한 세 가지 특허를 출원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임시 정부 대통령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에게 프랑스 원자력 연구를 재개하기 위한 로비를 벌여 1945년 10월 18일 원자력위원회(CEA)를 설립하고 초대 최고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모든 정치 세력이 순수 민간 연구를 지원하기로 합의한 프랑스 최초의 명백한 핵 '합의'의 시작을 알렸다공산주의자들은 애국심과 노동자들을 해방시킬 에너지에 대한 희망으로 원자에 대한 기대에 열광했고과학적 진보에 대한 자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1947년 냉전이 시작되고졸리오가 소련의 영향을 받은 평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문제가 생겼다특히 1950년 핵무기 금지를 요구한 스톡홀름 호소 이후졸리오와 다른 공산주의 연구자들은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CEA)에서 해고되었다.

1950년 5월 프랑스 원자력위원회에서 프레데릭 졸리오의 복직을 위한 시위.  출처 : 퀴리 박물관

이러한 "합의"의 종식은 군사 프로그램에만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에 비공산주의 좌파특히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Pierre Mendès France)와 기 몰레(Guy Mollet)가 이끄는 정부는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결정적인 결정을 내렸다.

동시에 모두가 민간 연구를 계속 지원했다. 1952년 원자력 5개년 계획이 승인되었고이 계획은 CEA의 첫 번째 전력 생산 원자로의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이 원자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은 프랑스의 첫 번째 핵폭탄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1958년 드골의 권력 복귀 이후좌파는 핵폭탄에 반대하기 시작했으며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1977-1978년 까지 반대를 이어갔다그러나 민간의 원자력 활동은 계속 지지했다.

반핵 운동의 출현과 그 실패

그러나 1972년 주요 좌익 세력이 공동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전술 핵무기를 수용하고 기존 재고를 유지함으로써 핵폭탄에 찬성하는 첫 걸음을 내딛는 동안반핵 운동도 등장했다.

주요 정당 밖에서반핵 운동은 전체 원자력 프로그램에 반대했지만 결국 에너지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역사가이자 사회학자인 세진 톱추는 1970년대 초반의 첫 반핵 조직들을 묘사하면서이들이 원자력이 대표하는 '정부성'을 비판하고 산업화를 명분으로 위험을 무시하는 기술 중심적이고 권위적인 모델을 비난했다고 설명했다이러한 운동에는 지식인 엘리트들이 포함되었으며이들은 미국의 환경운동 단체인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의 프랑스 지부와 같은 협회에서 활동했다또한 알자스의 페센하임(Fessenheim), 노르망디 지방의 라 헤이그(La Hague), 부게이(Bugey) 등에서 원자력 프로젝트가 확장되자 지역 단위의 조직도 활성화되었다.

 르 텔레그람(Le Télégramm)이 보도한 Plogoff 원자력 발전소 반대 투쟁

'메스머 계획'(plan Messmer, 1973년 발생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허가를 받아 1974년부터 시작한 대규모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에 반대하는 CFDT(프랑스 민주 노동 총동맹, Confédération française démocratique du travail)와 같은 주요 단체를 중심으로 반핵 운동의 힘이 커졌다. 1976-1977년에 이세르(Isère) 지역의 슈퍼페닉스(Superphénix) 고속증식로 프로젝트루아르아틀랑티크(Loire-Atlantique) 지역의 펠린(Pellerin) 및 1980년에 피니스테르(Finistère) 지역의 플로고프(Plogoff)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 운동이 특히 강했다플로고프 주변에서는 반핵 운동이 매우 대규모로 진행되었으며거의 모든 좌파 정치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했다이는 일롱그(Île Longue)의 핵잠수함 기지 건설과 아모코 카디즈(Amoco Cadiz)유조선 침몰 사고 이후 쌓인 불만이 터진 결과였다.

EDF 플라망빌 발전소 부지가 내려다보이는 인도에 위치한 비석. 출처 : Vitéquet, CC BY

공산당은 여전히 원자력을 강력히 지지했다이런 좌파 내의 이념적 분열은 1968년 5월 항쟁 때부터 나타났다이는 공산당의 신념과많은 공산당 지지자들이 산업 노동자이자 국가 산업에 종사하는 CGT 노조원들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이들은 1945년 공산주의자 마르셀 폴(Marcel Paul)의 주도로 에너지 생산이 국유화되면서 탄생한 EDF-GDF(Électricité de France-Gaz de France)에서 일하고 있다이들의 지원으로 플라망빌 원자력 발전소 부지에 마르셀 폴 기념비가 세워지고정보 공간도 열리게 되었다이는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환경운동과 극좌파 반핵 운동은 1977년 슈퍼페닉스에 반대하는 폭력 시위로 어려움에 처했다. 1979년 스리마일섬 사고 이후 약간의 부흥이 있었다.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반핵 후보가 나왔지만 중도 좌파 급진주의 운동의 미셸 크레포(Michel Crépeau)와 극좌파 사회당(PSU)의 위제 부샤르도(Huguette Bouchardeau)가 1~2%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무엇보다도 "(생태주의자들과의분열은 원자력 발전에서 시작된다"는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의 당선으로 이 시위는 묻혔다.

1981년 위제트 부샤르도의 후보 출마그는 "평생을 두려움에 떨며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본질적으로 좌파였던 몇몇 프랑스 반핵 세력은 좌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사실상 무력해졌다이들은 사회주의 실험의 성공을 우선시했다그러나 사회당(PS)은 펠린(Pellerin)과 플로고프(Plogoff)의 논란이 된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1981년 가을에 매우 합의적인 의회 토론을 허용했다이러한 변화의 징후로 위제트 부샤르도가 1983년에 환경국 국무장관이 되었으며이는 전환의 상징적 보증으로 여겨졌다그녀는 모든 대규모 프로젝트에 대해 환경 평가를 포함한 공청회를 의무화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원자력 발전을 줄이자고는 하지만...

녹색당과 LFI 내에서 민간 원자력 발전에 대한 반대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1980년대 초 미국을 비롯한 다른 서방 국가에서 일어난 일에 비하면 사실상 사라졌다.

또한 프랑스 전력공사의 인식 제고 캠페인에 힘입어 어느 정도의 대중들은 원자력을 지지했다스리마일섬 사건(Three Mile Island accident, 미국에서 일어난 최악의 산업용 원자력 발전소 사고)으로 미국의 계획이 중단되었고 체르노빌 사고는 독일 프로그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체르노빌 사고 2년 후인 1988대통령 선거에서 반체제 공산주의자 피에르 주캥(Pierre Juquin)과 녹색당(1984년 창당후보 앙투안 웨흐터만(Antoine Waechter)이 원자력 발전 중단을 위한 국민투표를 요구했다그러나 이들은 각각 5% 미만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이 상황은 서방이 소련의 중거리 무기에 맞서 미사일을 배치한 유로미사일 위기 속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배경이었다이런 긴장 속에서 미테랑의 발언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결국 1987년 유럽에서 모든 중거리 무기를 폐기하는 합의로 이어졌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재앙을 되돌아보는 Monde.fr의 기사

그 후 1990년대에 생태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화되고 사회당과 공산당이 단독으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복수 좌파연립정부가 집권하면서 1997년 수많은 사건으로 몸살을 앓던 슈퍼페닉스(프랑스에서 건설된 고속증식로(Fast Breeder Reactor) 원자력 발전소)가 폐쇄되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1998년 적-녹 연정이 탈원전을 결정한 독일 모델에 대한 언론 보도로 인해 이 논쟁은 다시 불붙었다.

일본 대지진 이후 감정이 격해지면서 원자력 발전을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가 극우 세력까지 확산되었다.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가장 오래된 발전소인 페센하임을 폐쇄하고 원자력 발전 비중을 기존 75%에서 50%로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에 대한 점점 더 커지는 반대와 특히 풍력 발전소의 배치 문제그리고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위기는 이러한 모든 계획을 무너뜨렸다사회당(PS)은 이제 재생 가능 에너지의 홍보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녹색당(Verts)은 그들의 역사에 충실하며, 2017년 대통령 선거를 위해 장-뤽 멜랑숑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LFI는 창립 초기부터 핵 에너지의 탈피를 약속했다극좌파의 반대 운동과 기후 불안의 시기에 탄생한 이 당은 친환경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이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동시에 핵 억제력 포기를 논의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프랑스 좌파를 근본적으로 반핵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1945년 이후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발전은 LFI가 이런 입장에 찬성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정당의 지배구조와 일부 선택은 온건 좌파 유권자들에게 큰 반발을 사고 있다따라서 이는 좌파의 전체 의견을 대표하지 않으며원자력 발전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2022년에 천 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좌파 유권자의 66%가 원자력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세부적으로는 프랑스 국민전선 지지자의 56%, 사회당 유권자의 83%, 녹색당 유권자의 53%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새로운 좌파 동맹은 현재의 원전 정책을 되돌리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다.

최근 몇 년간 특히 변화한 점은 원자력이 우파와 극우파의 주장이자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다이들은 반환경주의적 담론을 통해 농촌과 대중 유권자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출처La gauche française est-elle antinucléaire ?

[번역이꽃맘

덧붙이는 말

야닉 핀세(Yannick Pincé)는 에콜 노르말 상페리에르(ENS) - PSL의 CIENS ENS-Ulm 및 ICEE 소르본 누벨 대학교 부 연구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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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원자력 좌파 발전소 조기총선 좌파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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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파시스트에 맞서야한다. 만약 파시스트들이 선거에 승리한다면 그 의미는 좌파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것이다.이런 우기의식를 감안한 좌파라면 환경문제도 중요하나 파시스트들에 대항해야 옳다. 심지어 작업장 공장 서비스업 노동자 총단결이 중요하고 좌파는 현장조직에 몰두해야한다. 선거에서 승리해야만 총파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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