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동안 프랑스령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는 생활비 상승과 악화되는 경제 상황에 대한 격렬한 시위의 중심지였다. 마르티니크만이 아니라 이웃한 프랑스령 과들루프에서도 2024년 10월 26일 파업 노동자들이 발전소의 제어실을 점거해 정전 사태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정부는 통행 금지를 시행했다.
언론은 종종 이 불안의 즉각적인 경제적 원인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다. 하지만 이 시위의 배경에는 훨씬 더 긴 역사가 있으며, 이는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과 프랑스령 카리브해에서의 식민주의의 지속적인 유산을 포함한다.
마르티니크 주민들은 프랑스 시민이지만, 마르티니크는 본토 프랑스보다 물가가 훨씬 높으며, 식료품은 40%, 의료는 13% 더 비싸다.
동시에 마르티니크 주민들의 수입은 훨씬 적다. 섬 인구의 약 30%는 빈곤선 이하에 속하며, 이는 유럽 본토 프랑스의 두 배에 달하는 비율이다.
가계 예산이 이미 빠듯한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은 최근의 시위 물결을 촉발시켰고, 11월 1일 또 다른 시위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은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주민들이 본토 프랑스와의 불공평한 관계에 대해 느끼는 분노의 최신 사례일 뿐이다. 비슷한 시위는 2009년과 2021년에도 발생했다.
대부분의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최근 몇 주간 이러한 분노는 폭력과 기물 파손으로 이어졌다.
불평등의 식민지적 뿌리
인플레이션과 높은 생활비의 압박은 프랑스 해외 영토들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와 같은 카리브해 소앤틸리스 제도나 최근 독립과 원주민 카낙족의 대표성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난 남서태평양의 누벨칼레도니 등지에서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오랜 역사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에 대한 프랑스의 직할 식민 지배는 17세기에 시작되었으며, 프랑스는 현지 사회 체계와 경제를 주로 프랑스의 경제적 이익에 맞게 구조화했다. 아울러 다른 서유럽 국가들처럼 아프리카인들을 노예화하고 이주시키며 플랜테이션 경제를 발전시켰다. 해외 영토에서 노예들은 설탕, 이후에는 바나나와 럼과 같은 상품을 착취당해 생산했다.
초기 프랑스 정착민들은 이러한 식민지에서 소수 백인 지배 계급을 형성했다. 그 후손들은 ‘베케(békés)’로 알려지며 깊은 불평등 사회의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가 1848년 노예제를 폐지했음에도 이러한 부와 권력 격차는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고, 오늘날에도 마르티니크의 재산과 사업 이익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으며, 많은 경우 초기 베케 가문들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가장 부유한 가족 소유 기업 중 하나인 그룹 베르나르 아요(Groupe Bernard Hayot)는 농업, 자동차, 소매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식민주의에서 신식민주의 주장으로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주민들은 자신들의 식민지 과거를 잘 알고 있으며, 이는 최근의 생활비 상승에 대한 저항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주민들은 프랑스 본토와의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격차에 계속 직면해 왔다. 이 섬들이 1946년 식민지에서 ‘데파르트망’으로 전환되어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주민들이 프랑스 시민권과 본토 프랑스와 동일한 권리를 갖게 되었음에도 이러한 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2024년 10월 19일, 프랑스령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섬 포르드프랑스에서 생활비 상승에 맞서기 위한 집회 중 ‘마르티니크인은 마르티니크인을 위해’라는 문구가 적힌 표지판 옆을 한 시위자가 지나가고 있다. 출처: 필리프 로페즈 기고자
34만 2,000명과 37만 5,000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는 현재도 프랑스의 보조금, 수입품, 유럽산 수입을 촉진하는 무역 협정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식량 공급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이러한 물품은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며, 그 결과 인근 카리브해나 중남미 국가들과의 지역 무역을 통해 들여오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게다가 식민지 시대에 섬들이 단일 재배 플랜테이션으로 전환된 결과, 지역 농부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충분한 물품을 생산하기가 어렵다.
수십 년간 클로르데콘(chlordecone)이라는 살충제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미국에서는 1970년대에 금지되었지만, 프랑스에서는 1990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으며,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에서는 1993년까지 사용이 허용되었다. 1970년대부터 1993년까지 프랑스령 카리브해의 바나나 농장에서 클로르데콘은 특히 높은 사용률을 보였다.
이것이 물에 섞여 유출되어 두 섬 인구의 약 90%가 혈액에서 클로르데콘 양성 반응을 보인다. 한 연구에 따르면 발암성 살충제와 관련된 전립선암 발병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결과적으로 많은 프랑스 해외 영토 주민들은 자신들이 처음에는 노예로 취급되었고, 그 후에는 독살당했다고 느끼며, 이는 많은 시위자들이 신식민주의의 지속적인 사례로 보고 있다.
탈식민적 관점
식민주의의 유산과 그로 인한 프랑스 해외 영토의 삶의 질과 평등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때, 많은 시위자들은 탈식민적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독립에 대한 논의가 증가함과 동시에 마르티니크의 행정 의장인 세르주 레치미(Serge Letchimy)가 동카리브해 국가기구와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령 카리브해는 지역 협력을 향해 뚜렷하게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 경제 모델로의 전환은 프랑스로부터 더 큰 자율성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부의 격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관점을 반영하듯 마르티니크의 사회학자 말콤 페르디낭(Malcom Ferdinand)은 2022년에 프랑스령 카리브해의 지속적인 경제적 어려움이 “단순히 식민주의, 노예제, 가부장제에 의해 형성된 현대 세계와 연결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다”라고 관찰했다.
더 나은 미래의 비전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주민들이 계속해서 거리로 나서고 있는 가운데, 시위가 3개월째 이어지면서 그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최근 마르티니크의 소매업 관련 민간 부문과 합의해 일반 품목 가격을 20% 인하하기로 했다.
많은 프랑스 카리브해 주민들은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조치로 여길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이것이 더 공정한 미래에 대한 지역의 열망을 진정시키기에는 부족할 것으로 본다. 많은 해외 프랑스 시민들의 견해를 대변하며, 마르티니크의 작가 파트릭 샤모아조(Patrick Chamoiseau)는 최근 유럽과의 의존적 순환을 넘어서는 더 큰 사회적 및 환경적 개혁을 주장했다.
이러한 개혁 없이는, 샤모아조가 쓴 바와 같이, 프랑스령 카리브해는 “식민주의에 의해 세워진 인위적 경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으며, 마르티니크 주민들은 “식량 안보나 비극적이지 않은 미래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출처] The colonial legacy lurking beneath economic unrest in the French Caribbean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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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A. 비비안(David A. Vivian)은 미국 소카대학교(Soka University of America)에서 프랑스어 및 문화의 방문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