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당원 공판 관련 기사, 1927년 9월 13일, 조선일보
1925년 4월 17일 식민지 조선의 한복판인 경성의 중국요릿집에서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당되었다. 올해는 그로부터 딱 100년이 된 해다. 식민지 시절 가장 선두에 서서 치열하게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중심에는 조선공산당이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비록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1928년 해산하였지만, 그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당의 재건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당의 재건 방식도 20년대의 그것과는 달랐다. 당 해산의 결정문인 12월 테제를 바탕으로 지역과 노동자, 농민에 뿌리를 내린 당을 건설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하였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당 해산이 결정된 28년 이후부터 곧바로 진행되었다. 1929년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회,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등을 시작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당 재건 운동은 전국 곳곳에 수십 개의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과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운동을 전개했다. 대략 29년부터 36년경까지 지속된 이러한 형태의 당 재건 운동은 노동자, 농민의 권리의식을 광범위하게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은 그들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당의 필요성과 근본적 해방을 위한 정치적 전망을 선전하였다.
적색노동조합과 적색농민조합은 파업, 소작쟁의, 일제의 통치기관에 반대하는 각종 시위, 폭동과 메이데이, 3.1운동 기념일, 10월혁명 기념일 등에 유인물과 격문 등을 배포하는 투쟁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노동자 농민대중과의 결합 속에 진행되었던 당 재건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킬 수 있었으며, 대중투쟁과 비밀결사 활동으로 단련된 다수의 공산주의 활동가를 양성할 수 있었다.
이들의 이러한 투쟁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직면하였다. 적색노동조합의 경우 1931년에서 1935년 사이에 검거 사건만 70여 건, 투옥자는 1,759명에 달하였고 같은 기간 적색농민조합 은 검거 사건 103건, 관련자는 4,121명에 달하였다.
한편, 1930년대 중반 이후 대공황 이후에 번지는 파시즘에 대한 대응의 필요 속에 코민테른 7차 대회가 열린다. 7차 대회는 그 이전의 결정이었던 ‘계급 대 계급 전술’을 변화된 정세에 조응하여 ‘반파쇼 인민 전선 전술’을 채택하였다. 또한 국내에서도 만주사변, 중일전쟁등 엄혹해지는 일제의 탄압과 대중에 대한 수탈속에서 사회주의운동의 조직 노선의 변화를 불러왔고 지역별로 일정한 오류와 성과들을 내면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양상은 기존이 적색노조, 농조를 강화하면서 통일전선을 확대하거나, 거꾸로 기존의 적색농노조를 해산하고 새로운 통일전선조직을 구성하거나, 아니면 기존의 공작위원회를 반일민족해방동맹으로 전환하는 등 여러형태의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분산적인 실천의 원인은 전국적 수준의 지도력을 갖는 당의 부재가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판단하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이후로 일제의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은 가혹해지었다. 즉 일제의 침략전쟁의 격화에 따라 조선민중들의 생활고는 악화되었고 대중들의 광범위한 반전사조의 확산은 일제로 하여금 식민통치를 위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는 요인이었다. 이 시기 많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운동일선에서 이탈하거나 심지어 전향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함경남북도 일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원산, 흥남, 청진 등지의 대규모 공장지대와 문천, 명천, 정평등등에서 농민운동을 지속하였다. 이 지역들은 대중조직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운동을 1930년 전시기에 걸쳐 치열하게 지속하였다. 또한 경성지역을 중심으로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등에 의해 주도된 경성콤그룹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사회주의 운동은 과거 분파적 관계에서 벗어나 전투적 운동가들이 결집하여 1939년~1941년 시기에 국내최대규모의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조직운동은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의 전시 계엄하에서도 그치지 않고 활동을 지속하였다. 일제는 치안유지법과 사상전향제도등을 적극 운영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식민지 시절 사회주의 운동의 대가는 혹독했다. 검거가 되면 길게는 2년~3년에 이르는 취조를 받게 되며 취조과정은 상상을 넘는 고문과 악행이 자행되어 취조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운동을 하여야 했지만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대부분의 민족주의 운동계열과 상당수의 사회주의자가 독립운동의 대열에서 이탈하고, 변절하여 심지어 친일파로 행세하는 과정에서도 굽히지 않고 투쟁하였던 사회주의자들은 바로 그 이유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세력은 해방 이후 한동안 국내 정치세력의 다수로, 혹은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1946년 4월 17일 서울 종로기독회관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창당 21년 기념행사에서 박헌영의 연설은 이 시기를 압축하여 보고하였다.
“거의 4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우리 당은 식민지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완강한 투쟁을 전개해 왔다. 수천수만의 공산주의자들이 국내에서 국외에서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형무소, 고문실에서도 이러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어떠한 희생도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목표는 독립 너머에 있었다. 해방된 조선은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가가 독립 너머의 사회구상이었다. 그들이 요구했던 해방된 조선은 전체 민중의 민주적 제권리 보장과 특히, 노동자와 농민의 완전한 해방이 전제되는 사회여야 했다.
물론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첫 번째 목표는 일본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독립된 새로운 국가가 해방된 사회이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여야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대다수 농민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해방시기인 1945년에 와서는 전체농민 중 18%만이 자기소유의 토지를 가지고 있고, 4%의 대지주가 전체 토지의 60%를 소유하여 전체 농민의 82%가 소작농, 빈농, 농업노동자의 처지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소작료 3할요구와 대토지소유자, 은행 회사의 토지 몰수, 국유토지의 농민교부 등을 골자로 하는 강령을 가장 먼저 내걸었다. 노동자의 처지도 다르지 않았다. 하루 14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노동과 기아임금 문제해결을 위한 8시간 노동과 파업의 자유,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규정 노동시간을 넘는 초과노동금지, 산업재해의 사업주 부담, 노동자의 임금삭감 금지, 여성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산전 산후휴가, 유해노동 금지노동의 보호를 위한 아동노동의 제한 등을 내걸었다.
이들이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건 이러한 요구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지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절까지 외면되거나 무시되었다. 그러한 현실이 이른바 민주화운동 기간중에 사회주의 이념이 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사회의 절대다수가 된 노동자의 권리는 87년 7월 8월 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서 겨우 기본적인 노동기본권이 확보되었을 뿐이고 아직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유지하는 것, 안정된 고용을 보장받는 것, 여성 노동자의 모성보호, 비정규노동자, 이주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기본권은 요원하다. 100년 전 사회주의자들의 요구가 아직 유효한 것이라면 이 시대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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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선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연구원이며, 한국지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