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Unsplash+, Valeria Nikitina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새로운 기술이 주는 영향을 무심히 넘길 수 없다. 내가 보기엔 그 영향력이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강하다. 그중 일부는 외국인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인과 외국어를 모르는 중국인 모두, 서로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자연스럽게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기술 장치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변화는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보다 나아진 점이긴 하지만, 때로는 손짓이나 몸짓, 소리를 흉내 내는 예전 방식이 오히려 더 정확할 때도 있다. 현지인이 스마트폰으로 번역해 보여주는 정보보다 그 단순한 제스처가 더 효과적일 때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은 서방 언론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인데, 바로 새로운 기술이 사회 통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방문자 입장에서 이것은 구글, 야후, 소셜미디어 같은 일반적인 인터넷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다는 사실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거의 불편하지 않다. 그들은 애초에 중국의 검색엔진과 중국 소셜미디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웨이보(Weibo)가 구글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래도 내 생각에, 중국에 몇 주 머무는 동안 이런 불편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서방의 주류 언론(MSM)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이트들이 접속 가능한지 여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월스트리트 저널>과 <파이낸셜 타임스>는 약간 그리웠지만, 어차피 평소에도 종이 신문으로만 읽었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었다. 그 외에도 <르 피가로>, <라 방과르디아> 같은 주요 서방 매체는 전부 접속이 가능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언어의 매체만 확인했다.) 물론 <차이나 데일리>도 볼 수 있었다. 나는 뉴욕에서도 가끔 읽는데, 이 신문은 논평 없이 단순한 소식만 놓고 보면 꽤 괜찮은 편이다. 다만 모든 논평은 당연히 중국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다. 또한 서브스택(Substack)도 접속할 수 있었는데, 다만 사용하는 검색엔진에 따라 접근 가능 여부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나는 ‘중국의 만리방화벽(Great Firewall of China)’의 작동이 완벽하지 않으며, 다소 무작위적이라고 본다. 다른 인간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도 예외는 아니다(이 상황은 내가 18개월 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러시아판 <파이낸셜 타임스>인 <코메르산트>(Kommersant)는 차단되어 있지만, 다른 러시아 매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기타 발칸 국가들의 매체는 완전히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아마 원문으로 세르비아 뉴스를 읽고 싶어 하는 중국인은 열 명도 안 될 것이다. 발트 3국, 중앙아메리카, 아프리카 같은 소규모 국가들의 매체 상황도 비슷할 것으로 추측하지만, 실제로 확인해 보진 않았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새로운 기술의 요소가 있다. 중국은 이 길 위에서 (예컨대 뉴욕보다) 훨씬 더 앞서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정보에 전적으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의존하면서, 상식적이고 명백한 ‘현실 세계’의 정보를 무시하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이제 두뇌와 상식을 버리고, 손 안의 작고 밝은 화면이 말해주는 것에만 의존하는 듯하다.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삶의 양식이 극도로 분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런던과 휴스턴에서 거의 우스꽝스러웠던 두 장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떤 장소가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 그곳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완전히 당황한 표정을 보였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좁다. 출근하거나 (원격 근무로 집에 머물거나), 퇴근하고, 쇼핑몰에 가고, 아마존에서 물건을 주문하고, 그 외 주변의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한 채 살아간다(종종 레스토랑까지 운전해서 가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식사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룻밤의 즐거움’이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도시의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한다. 도시의 삶이란 본래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장소를 알고 관계 맺는 것인데, 그것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기기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 더욱 심화되어 있다. 이제는 어떠한 관계(‘intercourse’라는 단어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만, 머지않아 파생된 의미로도 쓰이게 될지 모른다)라도, 처음 단계에서—그리고 그 이후 여러 단계에서도—항상 제3자, 즉 인공지능(AI)과의 ‘상담’을 거치지 않고는 진행되지 않는다.
AI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면 장기적으로 분명한 영향이 생길 것이다. 나는 지식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직관이 크게 약화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나에게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를 판단하거나, 어떤 사건을 해석할 때 직관에 의존한다. 그런데 이 능력이 퇴화하면 판단의 정확성이 크게 떨어질 것이다. 학습 능력도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사회 전체의 지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사실 그런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동시대인들은 기술 변화의 부정적 영향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기계가 사람 대신 목화를 따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신체적으로 약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목화 따기를 대신해 헬스장에 가는 것으로 그 기능을 대체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책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다른 형태의 지적 활동으로 대체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무엇일지 알기 어렵다.
정정: <코메르산트>(Kommersant)는 차단되어 있지 않다.
[출처] Note on new technologies in China and on our human future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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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