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6년 당시 대영제국의 영역을 보여주는 세계 지도. 보스턴 공공도서관 노먼 B. 출처: 레벤탈 지도·교육센터(Norman B. Leventhal Map & Education Center). Wikimedia Commons, CC BY
거의 4세기 동안, 세계 경제는 점점 더 통합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조차도 이 흐름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이 오랜 세계화의 행진은 국제 무역과 투자의 급격한 증가, 국가 간 인구 이동의 확대, 운송 및 통신 기술의 획기적인 변화가 이끌었다.
경제사학자 J. 브래드퍼드 드롱(J. Bradford DeLong)에 따르면, 세계 경제의 규모(1990년 기준 고정가격)는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1650년 당시 817억 달러(615억 파운드)에서 2020년에는 70조 3천억 달러(53조 파운드)로 증가했다. 이는 약 860배 성장한 셈이다. 가장 급속한 성장이 이뤄진 시기는 세계 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두 시기로, 하나는 프랑스 혁명 종결부터 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이어진 ‘긴 19세기’였고,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무역 자유화가 확대된 1950년대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다.
하지만 지금,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후퇴하고 있다. 세계화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쇠퇴하고 있다.
이것은 환영할 일일까, 아니면 우려해야 할 일일까?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와 그가 일으킨 대규모 관세 충격이 백악관을 떠나면 상황이 다시 바뀔까?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한 BBC 경제 전문기자로서, 나는 트럼프 이후에도 탈세계화된 미래에 대해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충분히 우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세계 경제의 문제를 악화시켰지만, 그것이 근본 원인은 아니다. 그의 접근은 수십 년간 점점 더 분명해졌지만, 이전 미국 정부들과 세계 여러 정부가 인정하기 꺼렸던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세계 1위 경제 강국이자 세계 성장의 엔진이라는 위치에서 점차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17세기 중반 이후 세계화의 시대마다, 하나의 국가는 전 세계의 경제 질서를 규정하려는 명확한 패권국의 자리를 노렸다. 각 시대의 패권국은 군사력, 정치력, 금융력을 통해 그 질서를 강제할 수 있었고, 다른 나라들에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선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이 트럼프 아래서 고립주의로 기울면서, 가까운 미래에 그 자리를 대신할 준비가 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목한 중국은 진정한 국제 통화의 부재를 포함한 수많은 경제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또한 일당 국가인 중국은 세계의 새로운 지배 강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민주적 정당성도 결여되어 있다.
세계화는 항상 승자뿐 아니라 많은 패자들을 낳아왔다. 18세기의 노예무역부터 20세기 미국 중서부의 해고된 공장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그러나 역사는 탈세계화된 세계가 훨씬 더 위험하고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19세기 세계 패권국이었던 영국의 자리를 대신하길 거부했던 시기다.
1919년부터 20년 동안, 세계는 경제적·정치적 혼돈에 빠져들었다. 주식시장 붕괴와 전 세계적인 은행 부실이 대규모 실업과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고, 그 결과 파시즘이 부상했다. 각국은 무역 장벽을 세우고 자국 수출을 늘리겠다는 헛된 희망 속에 통화 전쟁을 벌였고, 세계 무역은 급격히 위축됐다. 그 결과, 세계 경제 성장은 사실상 멈춰 섰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탈세계화가 진행 중인 세계는 다시금 취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비슷한 혼란과 불안정한 미래로 향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놀라운 글로벌 프로젝트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임박한 몰락의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프랑스 모델: 중상주의, 화폐, 전쟁
160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했고, 프랑스는 자국에 유리하게 세계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 이론을 개발했다. 거의 400년이 지난 오늘날, “중상주의”의 많은 요소가 트럼프의 미국 전략에서 다시 등장했고, 이는 마치 ‘경쟁국을 약화해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법’이라는 책처럼 읽힌다.
프랑스식 중상주의는 한 나라가 자국으로 들어오는 수입을 제한하는 무역 장벽을 세우는 동시에, 자국 산업을 강화해 더 많은 자금(금 형태)이 유입되도록 해야 한다는 개념에 기반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이미 이러한 중상주의 정책을 일부 채택했고, 전 세계에 식민지를 세워 강력한 독점 무역회사를 통해 스페인 제국을 약화하려 했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금과 은을 약탈해 부를 축적해 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과 인도 같은 동방의 거대 제국들은 자체 자원을 바탕으로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기에 국제 무역이 번성하긴 했지만, 그들의 번영에 필수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정부 전체의 정책 전반에 중상주의를 체계적으로 적용한 최초의 국가였다. 루이 14세로부터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받은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61–1683)가 이끄는 가운데, 프랑스는 국가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이 전략을 적극 추진했다. 콜베르는 무역이 국가의 금고를 채우고 프랑스 경제를 강화하며 경쟁국을 약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상주의를 설계한 프랑스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Wikimedia
“국가의 위대함과 힘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화폐의 유무뿐이다.”
콜베르는 무역을 제로섬 게임으로 간주했다. 프랑스가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많이 낼수록, 정부는 더 많은 금괴를 축적할 수 있었고, 반대로 경쟁국은 금이 고갈되며 약화한다고 봤다. 그는 수입 관세를 세 배로 인상해 외국 상품의 가격을 폭등시켰고, 프랑스는 보호무역주의를 선도했다.
동시에, 그는 국내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독점권을 부여하면서 이를 지원했다. 식민지와 정부 무역회사를 설립해 향신료, 설탕, 노예 등 수익성이 높은 무역에서 프랑스가 이익을 챙기도록 했다.
콜베르는 프랑스 산업을 레이스와 유리 제조 같은 분야로 확장했고, 이탈리아에서 숙련공들을 초빙해 신설 기업에 국가 독점권을 부여했다. 그는 미디 운하(Canal du Midi) 같은 인프라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프랑스 해군과 상선단 규모도 크게 늘려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상 경쟁력을 견제했다.
이 시기의 세계 무역은 착취적 성격이 강했다. 스페인이 신세계에서 했던 것처럼 금과 원자재를 강탈하는 방식이었고, 노예무역을 통해 인간을 거래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노예들은 카리브해와 기타 식민지로 강제로 이송돼 설탕 등 작물을 재배했다.
이 중상주의 시대에는 무역 전쟁이 실제 전쟁으로 자주 이어졌고, 각국은 무역로를 장악하고 식민지를 차지하려 세계 곳곳에서 싸움을 벌였다. 콜베르의 개혁 이후, 프랑스는 해양 경쟁국의 제국에 도전하고 유럽 대륙 내에서도 정복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성공을 거뒀지만, 결국 프랑스가 운영한 국영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영리 추구에 철저했던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들 회사는 주주와 정부에 막대한 수익을 안겨줬다.
네덜란드가 극동 향신료 무역에서 벌어들인 엄청난 수익은, 그들이 북아메리카의 작은 식민지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을 기꺼이 영국에 넘기고, 그 대가로 현재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향신료 섬의 작은 거점을 되찾는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1664년, 뉴암스테르담은 ‘뉴욕(New York)’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 세기의 갈등 끝에, 영국은 프랑스를 점차 압도했고, 인도를 정복했으며, 1763년 7년 전쟁 후 프랑스로부터 캐나다를 양도받았다. 프랑스는 끝내 영국의 해군력을 극복하지 못했다.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이 이끄는 함대에 대패했고, 유럽 연합군에게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면서, 프랑스의 유럽 패권은 막을 내렸다.
1805년 10월 스페인 남서부 앞바다에서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은 프랑스의 지배 시대를 끝낸 결정적인 전투였다. 출처: 예일 영국미술센터(Yale Center for British Art)/Wikimedia
하지만 프랑스식 세계화 모델이 세계 경제를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들이 (그리고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조차) 그 원칙을 다시 받아들이고 있다.
프랑스는 관세만으로 전쟁 자금을 충분히 조달하거나 산업을 부흥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광범위한 중상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한 끝없는 전쟁을 초래했다. 각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보복했고, 영토를 차지하려 들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트럼프가 벌이는 끊임없는 관세 전쟁이 초래할 결과와 경쟁적인 무역 블록의 형성 가능성은 불편한 평행선을 이룬다. 또한 트럼프가 제안하는 보호무역만으로는 미국의 국내 산업을 부활시키기에 부족하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영국 모델: 자유무역과 제국
자유무역이라는 이념은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가 처음 명확히 정립했다. 이들은 콜베르가 주장했던 것처럼 무역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지 않았고, 모든 나라가 상호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미스의 고전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1776)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외국이 우리보다 더 저렴하게 어떤 상품을 공급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산업으로 생산한 것 일부를 그들에게 넘김으로써 그 상품을 사는 편이 더 낫다.”
세계 최초의 산업국가였던 영국은 1840년대까지 증기기관, 공장 시스템, 철도를 기반으로 한 경제 강국을 만들어냈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무역을 통제하는 국가 독점의 창설에 반대했고, 산업에 대한 국가 개입을 최소화할 것을 제안했다. 그 이후로, 영국의 자유무역에 대한 신념은 다른 어떤 주요 산업국보다도 더 강하고 오래 지속되었으며, 영국의 정치와 대중 상상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이런 확고한 신념은 1840년대 제조업자들과 지주들 사이의 정치적 투쟁 속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국 정치를 지배하던 지주들은 고율 관세를 지지했고, 이는 그들에게 유리했지만 빵과 같은 생필품의 가격을 높였다. 1846년, 곡물법(Corn Laws)의 폐지는 영국 정치를 뒤흔들었고, 권력이 제조업 계층에게 이동했으며, 이후에는 이들이 참정권을 얻은 노동자 계층과 손을 잡게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은 자유무역을 통해 자국 제조업의 힘을 전 세계 시장으로 확장했다. 자유무역은 빈곤층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제시되었고(이는 자유무역이 노동자에게 해를 끼친다는 트럼프의 주장과 정반대였다),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1906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자유무역을 포기하겠다는 견해를 내놓자, 그들은 참패했고, 이는 2024년까지도 가장 큰 선거 패배로 남아 있다.
무역과 함께, 영국이 새로운 세계 패권국으로 자리 잡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는 런던 금융가(City of London)가 세계 금융 중심지로 부상한 것이었다. 영국은 금본위제를 채택하며 자국 통화인 파운드의 가치를 일정량의 금에 고정했고, 이를 통해 통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덕분에 파운드는 세계적인 교환 수단이 되었다.
이 조치는 영국중앙은행(Bank of England)이 금융 위기 시 최후의 대부자로서 신뢰를 쌓으면서 강력한 은행 부문이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국제 투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영국 기업과 개인 투자자들은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런던 금융가는 글로벌 금융을 지배했고, 아르헨티나 철도, 말레이시아 고무 농장, 남아프리카 금광 등에 투자했다. 금본위제는 영국이 세계 경제를 지배할 수 있는 상징이 되었다.
영국의 세계 경제 지배를 떠받친 기둥은 세 가지였다. 효율적인 제조업 부문, 전 세계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자유무역 정책, 전 세계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제 성장을 통해 이익을 얻은 고도로 발달한 금융 부문이다. 그러나 영국은 외국 시장을 개방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예컨대 1840년대 아편전쟁 당시, 영국은 중국에 인도산 아편 무역을 개방하도록 강요했다.
19세기 말이 되자, 영국 제국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지배했고, 이는 값싼 노동력과 안정적인 원자재 공급원일 뿐 아니라 영국 제조업 제품의 거대한 시장 역할도 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엔 부족했다. 영국은 인도 직물 산업을 약화하고 인도 화폐를 조작하는 등, 현지 산업이 자국 이익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세계화는 소수 유럽 부국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지역의 경제 발전은 이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한되었다. 영국 통치하에 있었던 1750년에서 1900년 사이, 인도의 세계 산업 생산 비중은 25%에서 2%로 급감했다.
하지만 영국의 공식적·비공식적 제국의 중심에 있었던 중산층 런던 시민들에게는 이것이 황금기였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이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중상류층은 극소의 비용과 노력만으로도 과거 어떤 왕조의 군주들도 상상할 수 없었던 편리함, 안락함,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런던의 거주자는 아침 침대에서 차를 마시며, 전화로 전 세계의 다양한 물품을 원하는 양만큼 주문했고, 그 물품이 그의 문 앞에 곧 도착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미국 모델: 보호무역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영국이 한 세기 동안 세계 패권을 누리는 동안, 미국은 1776년 건국 이후 다른 어떤 주요 서방 경제국보다도 오랫동안 보호무역주의를 유지했다.
미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보조하기 위해 관세를 도입했고, 이는 1791년 초대 재무장관이자 카리브 출신 이민자였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는 미국의 건국자 중 한 명이었고, 나중에는 기록적인 흥행 뮤지컬의 주인공이 되었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가 이끌던 휘그당과 그 후신인 공화당은 19세기 내내 이 정책을 강하게 지지했다. 미국 산업이 전 세계를 압도하게 되었을 때조차도,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세 장벽 중 일부를 유지했다.
1890년대에는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의 지지 아래 관세율이 50%까지 올라갔다. 이는 산업계의 지원뿐만 아니라,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2백만 명의 퇴역 군인과 그 가족에게 후한 연금을 제공하기 위한 재원 마련도 목적이었다. 이들은 공화당의 핵심 유권자층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곳곳을 해밀턴, 클레이, 매킨리의 초상화로 장식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 모두가 보호무역주의와 고율 관세의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미국이 오랫동안 자유무역을 거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자국 내 원자재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민을 통해 급격히 증가하던 인구는 외국과 경쟁하지 않고도 미국 내 시장에서 자생적인 성장을 가능케 했다.
19세기 말까지 미국은 세계 최대의 철강 생산국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철도망을 보유했으며, 전기, 내연기관, 화학 등 제2차 산업혁명의 신기술을 빠르게 활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전쟁을 겪고도 경제와 인프라가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은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유럽과 아시아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뒤, 미국은 정치적·군사적·문화적·재정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미국의 세계화 비전은 영국의 제국주의적 자유무역 모델과는 중요한 차이를 보였다.
미국은 훨씬 더 보편주의적이고 규칙 기반의 접근법을 취했고, 구속력 있는 규칙을 세우는 글로벌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통해 미국 상품과 투자가 세계 시장에서 제한 없이 활약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미국은 세계 경제 질서를 지배하기 위해 기축통화를 파운드에서 미국 달러로 바꾸려 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직후, 세계 금융 패권 수립을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당시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는 ‘연합국 안정화 기금’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고, 이는 전후 통화 체제의 청사진이 되었다.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둔 구조였다.
그 결과, 1944년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Bretton Woods)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이 창설되었다. 이 기관들은 미국이 주도했으며, 다른 나라들에 자유무역과 자유시장경제라는 미국식 모델을 따르도록 유도했다. 같은 시기, 연합국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 유엔 창설을 논의했고, 대공황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이들은 미국이 더 안정된 경제 질서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환영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경제국이었던 미국의 새로운 국제 질서 구상에는 초기에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동기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컸다. 미국은 주요 동맹국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공산주의 확산이라는 위협에 맞서기 위해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고자 했다. 이는 오늘날 트럼프가 주장하는 중상주의적 세계관, 즉 “모든 다른 국가들이 미국을 뜯어먹는다”는 관점과는 완전히 대조된다. 트럼프는 미국의 군사력만으로 동맹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전쟁이 마침내 끝난 후, 미국 달러는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금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되었고, ‘자유 세계’의 주 통화로 자리 잡았다. 미국 달러는 국제 무역 결제 통화로 사용되었고, 외국 중앙은행들이 보유하는 준비 통화가 되었으며, 미국 경제에 ‘과도한 특권’을 안겨줬다. 달러의 안정된 가치는 미국 정부가 국채를 외국인 투자자에게 팔기 쉽게 만들어줬고,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 적자를 유지하면서도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해줬다.
이로써 미국은 정치, 금융, 문화의 측면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고, 맥도날드와 코카콜라 같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동시에 할리우드라는 강력한 마케팅 수단도 미국이 지배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캘리포니아의 자유롭고 자금이 풍부한 대학 캠퍼스가 냉전 시기 군사투자에 기반한 컴퓨터 기술 발전의 실험실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 기술은 수십 년 후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빅테크 기업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세계화 접근은 영국의 자유무역+제국 모델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개입주의적이었다. 미국은 형식적인 제국을 만들기보다는 전 세계 경제에 접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를 원했고, 미국 제품과 서비스의 시장을 확보하고자 했다.
미국은 이 규칙을 감독할 세계 경제 기관들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국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세계화의 혜택은 여전히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다. 일본, 한국, 독일처럼 수출 주도형 성장을 수용한 국가는 번영했지만, 자원이 풍부하지만 자본이 부족한 나이지리아 같은 국가는 오히려 더 뒤처졌다.
꿈에서 절망으로
미국식 꿈(American Dream)의 신화가 점점 커졌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 경제는 점점 더 심각한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전쟁에서 회복하고 산업을 현대화한 독일과 일본의 도전이 두드러졌다.
무역 적자가 확대되고, 경쟁국의 위협이 커지자, 1971년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로써 미국의 국제수지 불균형 문제의 부담을 다른 나라들에 떠넘겼다. 다른 나라들은 자국 통화를 평가절상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조치는 세계 금융 시스템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10년이 채 되지 않아 대부분의 주요 국가는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이는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사실상 종말을 의미했다.
고정환율제가 끝나자, 세계 경제의 ‘금융화(financialisation)’가 시작되었고, 이는 전 세계 투자와 대출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그 중심에는 미국의 금융회사들이 있었다. 이 흐름은 세계 금융 질서의 규칙을 다시 쓰려는 신자유주의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 정책들은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외국인 투자 개방, 규제 완화, 민영화 같은 조치를 포함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서 지원받기 위해, 위기에 처한 개발도상국들은 이 정책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금융과 첨단기술 부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불평등이 심화했고, 미국 사회 곳곳에서 분노가 자라났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받아들였고, 미국의 정책은 이들 하이테크 및 금융 엘리트의 이익에 맞춰 조정되었다. 실제로 1990년대 금융 규제 완화에 핵심 역할을 한쪽은 민주당이었다.
동시에 미국의 제조업 붕괴는 가속화되었고, 산업 기반이 있던 내륙 지역 주민들과 대도시 거주자들 사이의 소득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2023년 기준으로, 미국 하위 50% 인구가 전체 개인 소득의 13%만을 차지했고, 상위 10%는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7%를 차지했다. 부의 격차는 더 심각했다. 하위 50%가 보유한 부는 전체의 6%에 불과했고, 상위 1%는 전체의 36%를 차지했다. 1980년 이후, 하위 50%의 실질 소득은 40년 동안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미국 인구 하위 절반은 이른바 ‘절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의 물결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Angus Deaton)이 사용한 표현으로, 젊은 미국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마약 중독, 자살, 살인으로 인한 높은 사망률을 지칭한다.
주거비, 의료비, 대학 등록금의 상승은 광범위한 부채와 경제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2019년 한 연구에 따르면, 파산 신청자의 3분의 2가 의료 문제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에 가입한 이후, 미국 제조업의 쇠퇴는 더 가속화되었고, 미국의 무역수지 및 재정 적자는 한층 더 심화했다. 미국의 정치 및 경제 엘리트는 이 조치가 미국 상품과 투자가 거대한 중국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중국은 산업을 빠르게 현대화하며 여러 분야에서 미국 기업보다 더 경쟁력 있는 위치를 차지했다.
결국, 이 시기 세계 경제의 과도한 금융화는 지역 위기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로 이어졌고, 이는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 정점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으며, 이는 미국 금융기관들의 무분별한 대출이 촉발했다. 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10년 넘게 저성장, 낮은 생산성, 감소한 무역이라는 상황 속에서 회복에 애를 먹었다.
이를 제대로 읽은 이들에게는 수십 년 전부터 미국의 세계 지배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징후가 분명히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명확히 드러난 계기는 2016년 트럼프의 대선 승리였다.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 엘리트’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고, 미국이 세계를 뒤흔들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위험한 현실을 더 위험하게 만들다
내 생각에, 트럼프는 전후 미국의 엄청난 경제 성장으로 주로 도시 중산층이 혜택을 누리는 동안 자신들은 소외되었다고 느꼈던 수많은 미국 노동계급 유권자들의 소외감을 처음으로 완전히 이해한 현대 미국 대통령이다.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은 대졸 학위가 없는 농촌 지역의 하위 중산층 유권자들이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핵심 정책들은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한 고율 관세, 수백만 명의 불법 이민자 추방,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프로그램 반대를 통한 소수자 보호 정책 해체, 정부 규모의 급격한 축소 같은 조치는 앞으로 점점 더 부정적인 경제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미국 경제를 과거의 지배적 위치로 되돌리기는 매우 어렵다.
2025년 4월 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관세 ‘타격 명단’을 공개했다. 출처: BBC 뉴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오래전부터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국 무역적자를 싫어했다. 그는 사업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관세를 미국의 경제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무기로 여겼다. 또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축은, 미국의 전후 세계화 전략의 핵심이었던 국제 협정을 폐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첫 임기 당시, 트럼프는 당선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 장악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들이 수년간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미국 경제 정책의 급진적 전환을 실행할 핵심 인사들을 선별해 두었다.
트럼프 2.0 체제에서는 17~18세기 프랑스를 떠올리게 하는 중상주의적 관점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하는 국가들이 “우리를 뜯어먹고 있다”고 주장한 그의 발언은 무역이 제로섬 게임이라는 중상주의 신념을 반영한다. 이는 미국이 20세기에 주창한, 무역의 균형과 무관하게 세계화는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는 기존의 관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트럼프의 세금 및 관세 정책은 부유층에게는 세금 감면을 확대하면서, 복지 삭감과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을 통해 빈곤층의 혜택은 줄이는 방식이다. 이런 조치는 미국 내 불평등을 더 심화시킬 것이다.
한편, 트럼프가 ‘위대하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이라고 이름 붙인 예산 법안의 통과는 미연방 정부 부채를 약 3조 5천억 달러 더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이끄는 ‘정부 효율성부(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가 워싱턴의 여러 부처에 대해 삭감을 단행한 이후에도 그렇다. 이런 재정정책은 세계 금융 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미 재무부 국채 시장에 압력을 가하고, 막대한 미국 재정적자에 대한 자금 조달 비용을 높이며, 미국의 신용등급을 약화한다. 이런 정책이 지속되면 미국이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이는 전 세계 금융 시스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트럼프와 지지자들이 아무리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도, 그의 경제정책은 미국의 힘이 아니라 약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나는 그가 미국 경제의 병폐 중 일부를 조명한 점은 시의적절했다고 보지만, 그는 미국이 전후 수십 년간 쌓아온 경제적 신뢰와 국제적 호의, 문화적·정치적 패권을 빠르게 낭비하고 있다. 미국 안팎의 사람들에게 그는 이미 나쁜 상황을 더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들조차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트럼프의 경제 및 사회적 혼란이 없었다 해도, 미국의 패권 시대는 결국 끝났을 것이다. 세계화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모두 직면한 불편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출처] The rise and fall of globalisation: the battle to be top dog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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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시퍼레스(Steve Schifferes)는 런던시립대학교 세인트조지 캠퍼스 시티 정치경제연구센터 명예연구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