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트럼프의 혼란 속에서, 중국의 일대일로(BRI, Belt and Road Initiative)가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는 시점에 있다.
나는 다음 차트북에서 중국의 ‘신(新) 일대일로(BRI 2.0)’에 대해 다룰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초안을 구상하면서, 나는 ‘경제 질서(economic order)’와 ‘경제 재편(economic ordering)’이라는 개념 사이의 차이로 다시 생각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올여름 초, 베를린의 ‘신경제 포럼(Forum for a New Economy)’에서 내가 발표했던 기조연설을 떠올렸다.
던컨 그랜트(Duncan Grant)가 1917년에 그린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초상화
발표는 짧다. 존경하는 토마스 프리케(Thomas Fricke)의 소개가 끝나고 약 5분쯤 지나면 내 발표가 시작된다.
2025 베를린 정상회의: 아담 투즈(Adam Tooze) 기조연설. “새로운 질서를 향하여 – 이제 누가 그것을 만들어갈 것인가?”
인터이코노믹스(Intereconomics)는 그 발표를 정리해 다듬은 녹취록(transcript)을 아래에 실었다. 몇몇 농담과 생동감 있는 표현은 빠졌지만, 매끄럽고 빠르게 읽히는 내용이다. 나는 여기에 파워포인트 자료를 삽입하고, 몇몇 문장을 더 명확하게 다듬었다.
초록(Abstract)
새로운 세계 질서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누가 그것을 형성하게 될까? 브레턴우즈 체제라는 역사적 선례를 살펴보면, 질서, 안전, 공정성이라는 개념이 권력, 위계, 주체성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알 수 있다. 지정학적 긴장과 중국의 부상을 포함한 오늘날의 글로벌 과제들은 관점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고정된 구조를 찾기보다는, 세계를 끊임없이 재편해 나가는 과정, 실용적 협력, 전략적 관여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세계는 점점 더 상호 연결되면서도 경쟁적인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 질서가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누가 그것을 만들어갈 책임을 질지는 결코 단순하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하지만 그 해답이 향할 수 있는 몇 가지 방향은 제시할 수 있다.
브레턴우즈: 역사적 선례이자 오늘날의 신화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상하려는 시도는 이전의 질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구축된 질서, 즉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형성된 체제가 하나의 선례가 된다. 이 체제는 세계 경제의 지도와 국제 통화 체계를 형성했다. 미국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와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 같은 핵심 인물이 중심 역할을 했다.
브레턴우즈에 대한 일종의 집착마저 존재한다. 2024년, 브레턴우즈 회담 80주년을 맞아, ‘새로운 브레턴우즈’를 주제로 한 회의가 급증했다.

그와 동시에, 공화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커지며 불안감도 커졌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도, 대서양주의적이며 글로벌한 시각을 지닌 민주당 그룹이 이끌고 있었음에도, 세계 경제 안에는 이미 뿌리 깊은 긴장이 존재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은 더 나은 시스템을 요구했고, 중국의 부상과 러시아의 침략은 서방이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작년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다.
트럼프 집권에 가장 비관적이었던 이들조차, 무역 시스템에 대해 변덕스럽고 임의적인 공격, 외국인 투자와 달러 가치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 동시에 벌어질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우리가 새로운 세계 질서를 논의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 어쩌면 어불성설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 질서’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왜 이 개념은 브레턴우즈라는 순간과 자주 연관되어 언급될까?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역사적인 것이며, ‘브레턴우즈’라는 용어 주변에 반복적으로 응집됐다. 한편으로는 이 응집이 어떤 가치들을 반영한다. 예컨대, 혼돈보다 질서를, 무질서보다 이해할 수 있음을 중시한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마치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불투명한 현실을 투명하게 만들고자 했던 꿈을 실현해 주는 듯했다. 보안에 대한 약속이 있었고, 더 넓은 대중에게는 안전이라는 감각도 제공했다. 이 주제는 오늘날 포퓰리즘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실질적인 공정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규칙 기반 질서에 대한 약속도 있었다.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이 투자를 촉진하고, 안정을 확립하며, 불확실성을 줄인다는 기능적인 주장도 있었다. 이는 계량경제학의 연구로 뒷받침되며, 독일 사회 이론 전통에서 막스 베버(Max Weber)로 거슬러 올라가는 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브레턴우즈라는 순간이 매력적인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역사적 혼란 앞에서 유능한 주체들이 모여 체제를 설계했던 ‘행위성(agency)’의 순간이라는 감각이다. 동시에 그것은 단순한 행위성이 아니라, ‘질서를 창출하는 행위성’이자 스스로를 절제하는 행위성이었다. 세계에 이해관계를 강압적으로 각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제약하려는 의지를 가진 주체들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 브레턴우즈의 순간을 오늘날까지도 감동적인 모델로 남겨 두는 이유다.

· 질서(Order) - 무질서(Disorder):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 대 혼돈(chaos) – 미적 비전
· 안전(Security) 대 불안정(insecurity): 안전성
· 게임의 규칙, 공정성(Fairness)
· 기능주의(Functionalism): 질서가 있었을 때 상황은 더 나았음. 1945년 이후, 불균형은 갑작스러운 붕괴(seudden unwinding)를 위협함
·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은 ‘주체성(agency)’임. 창조적이고 상상력 있는 주체성
· 그리고 자기 부정(Self-negating): 질서를 만들 만큼 강력하지만, 자신을 제약할 만큼 지혜로운 주체성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절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영국과 미국은 단순히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대신, 체계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분명 주목할 만한 미덕이었다. 하지만, 이 미덕이 브레턴우즈에 집약되어 있고, 브레턴우즈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제 경제를 사고할 때 일종의 상징물이나 심리적 위안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은 내가 ‘금융 판타지(financial fiction)’라 부른 개념을 떠올리게 만든다. 동화(fairy tale)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브레턴우즈 신화를 해체하기
동화는 본래 다양한 기능을 가지지만, 실질적인 조언을 기대하고 찾는 이야기는 아니다. 늑대가 할머니로 변장했을 때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와 유사하게, 브레턴우즈 모델은 청사진이 아니라 국제 경제 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참조 지점으로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분석은 심리적, 역사적, 정치경제적, 그리고… 니체적(Nietzschean)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심리적 관점에서 보면, 브레턴우즈에 대한 집착은 그것이 집단적 정서의 닻(anchor)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왜 담론은 반복해서 그 시점으로 돌아가며, 그 회귀는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 하나의 단서는 회담 시점을 잘못 인식하는 데 있다. 브레턴우즈 회의는 종종 전후 합의로 잘못 불리지만, 실제로는 전쟁의 폭력이 최고조로 치닫던 1944년 여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Operation Bagration)을 통한 독일 중부군 붕괴 사이에 진행되었다.
이런 반복적인 (잘못된) 구도는 미국을 선의의 강대국으로 상정하게 만든다. 브레턴우즈는 미국을 인도적 패권국으로 묘사하는 단순화된 서사를 제공하면서, 미국 권위의 기원을 흐리게 만든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브레턴우즈 체제의 이행 과정은 수많은 실패와 난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실제로 존재했던 브레턴우즈 체제
1944년 회의 개최
1947년 영국 통화 위기
1947~1950년 마셜 플랜 → 플랜 B
1949년 평가절하 계획 → 플랜 C
1950~1958년 유럽지급동맹(EPU) → 플랜 D
1958년 통화 태환성 확보 → 실제 브레턴우즈 체제 시작
1960년대 통화 위기 → 1962년 스와프 라인 도입
1967년 경기 침체
1971년 닉슨, 달러 금 태환 중단
1973년 브레턴우즈 체제 완전 해체
1944년 회의 이후, 1947년 영국의 통화 위기가 발생하면서 브레턴우즈 체제의 실행은 연기되었다. 이에 따라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 등장했는데, 사실상 브레턴우즈를 실행하지 않기 위한 플랜 B였다. 이어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파운드 스털링과 다른 모든 유럽 통화가 평가절하되었고, 이는 각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1950년부터 1958년까지 유럽지급동맹(European Payments Union)이 설립되었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원래 구상된 형태로 실제 도입된 시점은 1958년이었다. 이때까지 가는 데에는 군사력이 필요했고, 프랑스에서는 제5공화국이 수립되어야 했다. 프랑의 태환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크 뤼프(Jacques Rueff)의 계획이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과의 협력을 통해 추진되면서, 프랑스는 마침내 브레턴우즈 체제에 합류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에는 체제의 압력이 높아지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임시 조치로 통화 스와프(swap line)가 도입되었다. 이는 일종의 반창고 같은 역할을 했다. 1967년에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처음으로 심각한 경기순환 위기를 겪었고, 1971년에는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했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 브레턴우즈는 전후 성장을 부드럽게 견인한 체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 만약 우리가 진짜로 ‘새로운 브레턴우즈’를 시작한다고 가정하고, 역사적 전개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그 일정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 일정?
2026년 베를린 브레턴우즈 3.0
2040년 전면 시행
2051년 최종 위기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취약성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체계는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시달린다. 첫 번째는, 강대국들이 공동의 규칙에 자신을 묶는 순간, 그들의 주권이 약화한다는 ‘원초적 죄(original sin)’다. 예외는 없었다. 1944년의 주도국이었던 미국조차 그 체제에 느슨하게만 묶였을 뿐이었다. 미국은 엄청난 자율성을 유지했고, 달러는 금에 고정되었으며, 다른 모든 통화는 달러에 연동되었다. 미국은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을 누렸고, 그 체제를 출범시킨 것도 미국이었으며, 끝낸 것도 미국이었다. 이것이 브레턴우즈 질서의 근본적인 정치다.
그렇다면 왜 더 약한 국가들은 이런 일방적인 체제에 동참했을까? 그들이 약하고, 무력하며,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니체적 관점에서 이것은 열등한 위치, 즉 보호받기 위해 기독교를 선택했던 니체식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같다. 힘없는 국가들은 강자의 분노 앞에서 질서와 규칙이 최소한의 보호막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체제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런 체제에서 진짜 문제는 바로 이 ‘분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두 번째 근본 문제가 발생한다. 권력 없음으로 인해 받아들인 체제 내에서 분노를 품은 약소국들은 언제든지 규칙을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규칙이 명확하고 체계가 고정될수록 무임승차하려는 유혹은 더 강해진다.
독일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80년간,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체제 내에서 지속적이고 성공적으로 무임 승차한 중간 규모 국가는 독일이었다. 특히 서독은 1960년대 브레턴우즈 체제하에서 막대한 무역 흑자를 누리며 체제에 부담을 주었고, 결국 체제 해체에 일조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에서 무임 승차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독일은 주변이 모두 우호국이기 때문에 방위 정책을 절제할 수 있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미국의 시각에서는 그것이 곧 무임승차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미국 정부가 제기하는 비판이다.
독일이 권력을 쥐었을 때 보인 태도는 이 인식을 더 강화했다. 1970년대, 국제사회가 도이치 마르크를 기축통화로 만들자고 요구했을 때, 본(Bonn)과 프랑크푸르트(Frankfurt)는 그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중 하나가 유럽통화동맹(EMU)의 창설이었다. 책임을 유로존 전체로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유로존 위기 동안 독일의 태도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게 완곡한 표현이다.
지난 80년 동안 독일은 종종 협력적이지 않은 플레이어로 비쳤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었으며, 성공적이었지만 거시경제에는 매우 서툴렀다. 2025년 베를린에서 세계 질서를 논의하면서 생기는 아이러니 중 하나는, 만약 누군가가 지금 새 체제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면, 아마도 독일부터 포함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현실에 천착하는 언론인 친구에게 세계 경제 질서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의 대답은 짧고, 어쩌면 냉소적일지도 모른다. “지금? 분위기 파악 좀 하지 그래?”
과연 지금이 글로벌 경제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기처럼 보이기는 하는가? 당신도 내가 읽는 뉴스 헤드라인들을 보고 있나? 지금은 임의적 폭력이 일어나는 시기이고, 의도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려는 선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트럼프의 무역 전쟁, 브렉시트 모두 저마다의 분노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분노가 선택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전략적 딜레마도 중동에서 벌어지는 광폭한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지금 규칙을 폐기하고, 폭력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만들려는 강대국들의 선택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까’라는 이 순진한 질문은 결국 아찔하고 피로 얼룩진 공허함을 향해 있다. 지금은 달래는 듯한 동화를 나눌 때가 아니라,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때다. 만약 동화로 사고하고 싶다면, 지금 우리는 마치 빨간 모자다. 우리는 이미 큰 나쁜 늑대에게 삼켜졌고, 배 속에 갇혀 있다. 사냥꾼이 와서 우리를 꺼내줄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이 갑갑한 공포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질서를 꿈꾼다. 그러나 그 꿈들은 결국 진정 효과를 기대하는, 달콤한 환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질서의 미덕(자기 절제를 전제로 한 주체성, 투명성, 공정성, 기능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 브레턴우즈든 해밀턴식 체계든, 시간을 분기점으로 나누는 새로운 ‘토대의 순간’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는 연속적인 흐름과 행동의 네트워크,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선택·계획·동맹의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토대적 순간보다 ‘국면(conjuncture)’에 주목해야 한다.
· 질서(order)가 아니라 “거래(deals)”에 집중해야 한다!
· 질서가 아니라 재편(ordering)이다.
· 주어진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만들어가는 행위(world-making)이다.
· 제약을 통한 확실성에 의존하기보다, 목적·약속·행동의 규모를 통해 미래에 대한 공동의 기대를 만들어야 한다.
· 규범이 아니라, 사실(facts)을 창출하라.
브레턴우즈나 해밀턴 체제 같은 역사적 결정적 순간들, 즉 역사 속의 마침표로 새겨지는 새로운 토대의순간을 찾기보다는, 우리는 지속적인 연속, 행동의 네트워크,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토대적 순간보다는 국면(conjuncture)에 주목해야 한다. 헌법이나 질서보다, ‘거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집권 시기 이후 ‘거래’라는 용어가 오염되긴 했지만, 양측 모두 자기 이해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거래’는 최악의 결과는 아닐 수 있다.
세계 질서보다 세계 재편(world ordering)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의 세계를 전제로 하기보다는, 다양한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규칙과 헌법에 기대어 확실성과 장기적 계획 가능성을 확보하려 하기보다, 공동의 계획, 프로그램, 정치적 약속, 실천의 규모, 명확한 비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낫다. 우리는 규범을 걱정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성과를 만드는 데 더 집중해야 한다.
유럽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 모든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결국 우리는 한동안 ‘주권’에 대해 이야기해 왔기 때문이다. 주권이란 스스로 규칙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것은 질서와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 있다. 주권자는 예외를 선언할 수 있는 자이며, 동시에 다른 주권자들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우리는 유럽이 전략적 선택, 동맹, 거래 같은 분야에 발을 들여야 한다는 논의도 오랫동안 해왔다. 뼈아픈 진실은, 이 길이 옳고 필연적이라는 점은 명확한데도, 이런 주장들이 끝없이 반복되기만 할 뿐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17년 마크롱 대통령은 오늘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예견했지만, 독일 쪽에서는 그 제안들이 공허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냉엄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이 자리에 있었고, 사실상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 왔다. 2025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면,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지만, 실행하지 않거나, 너무 늦게 행동한다. 이미 열차는 출발했다.
세계 재편의 미래
일부는 미국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니냐고 걱정한다. 나도 그 생각이 그럴듯하면서도 끔찍하다고 느낀다. 내가 더 걱정하는 건 유럽마저도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까?
답은 명확하게 중국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꺼내는 순간, 즉각적인 반발이 나온다. 중국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마치 전쟁광처럼 비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미국의 군사 지출 확대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생각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베이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국이 미국식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 한다는 증거도 부족하다. 그런 구상은 애초에 베이징의 의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의 전환이 중요해진다. 중국이 미국식 세계 질서를 만들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 재편’에는 분명히 관여하고 있다. 중국은 서구가 만든 세계를 단순히 물려받는 데 그치지 않고(제국주의를 통해 만들어진 세계까지 포함해) 그것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방법론적 구분이 아니다. 이 차이는 우리가 세계를 더 명확히 보는 데, 그리고 그것과 덜 대립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중국은 사실상 새로운 브레턴우즈 체제를 만들어냈다. 일부는 이것을 ‘브레턴우즈 2.0’이라 부른다. 중국은 독자적으로 위안화를 달러에 고정했고, 그것도 저평가된 환율로 설정했다. 이 고정 환율은 쉽게 깰 수 없는 구조였다. 중국 내부에서는 여러 부작용이 있었지만, 중국은 그것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 체제는 중국이 글로벌 시스템 내에서 자기 주권을 주장하는 방식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이 전략을 잃고 유럽이 스스로를 얽어매는 사이, 중국의 움직임은 훨씬 넓어졌다. 그 결과 세계 무역은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 삼극 체제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미국 축이다. 하지만, 이 미국 축은 무역 정책에서 나오는 소란스러운 수사와 달리, 실제로는 훨씬 더 소규모다. 중국의 대미 수출은 세계 무역의 약 2.5%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수치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영역도 아니다.
출처: UN Comtrade, EPG, MAS 추정치, 출처 문서: Macroeconomic Review | 2025년 4월호
<세계 주요 무역 회랑(Major Trade Corridors in the World)>
파란색: 중국-미국 간 무역 흐름, 주황색: 기타 미국 관련 무역 흐름, 회색: 미국 비관련 무역 흐름/ 가로축: 연평균 성장률(CAGR) 2017~2023 (%), 세로축: 2023년 기준 세계 무역에서 해당 회랑이 차지하는 비중 (%)
상위 주요 무역 회랑 (2023년 세계 무역 비중 기준)
EU27 ↔ EU27 – 18.0%, 중국 ↔ 기타 국가(ROW) – 9.5% , 미국 ↔ EU27 – 7.6%, 중국 ↔ ASEAN – 2.9%, EU27 ↔ 미국 – 2.9%, 중국 ↔ EU27 – 2.9%, EU27 ↔ 중국 – 1.5%, 중국 ↔ 미국 – 2.2%, 중국 ↔ ASEAN – 2.9%, ASEAN ↔ 중국 – 1.3%, 중국 ↔ 기타 국가 – 9.5%, 기타 국가 ↔ 중국 – 3.1%, ASEAN ↔ ASEAN – 1.8%, ASEAN ↔ 기타 국가 – 1.1%, 중국 ↔ 홍콩 – 0.9%, 홍콩 ↔ 중국 – 0.5%, 중국 ↔ 북동아시아(NEAS) – 1.7%, NEAS ↔ 중국 – 1.5%, EU27 ↔ 영국 – 1.6%, EU27 ↔ 기타 국가 – 2.6%, 기타 국가 ↔ 기타 국가 – 1.9%, 기타 국가 ↔ 중국 – 3.1%, 기타 국가 ↔ 기타 국가 – 1.9%, 미국 ↔ 멕시코 – 1.4%, 멕시코 ↔ 미국 – 2.1%, 미국 ↔ 캐나다 – 1.6%, 캐나다 ↔ 미국 – 2.0%, 미국 ↔ 기타 국가 – 2.6%, 미국 ↔ ROW – 2.6%, 중동 및 북아프리카(MENA) ↔ EU27 – 1.7%, MENA ↔ 기타 국가 – 2.6%, 중국 ↔ MENA – 1.0%, MENA ↔ MENA – 1.3%
주석: ⅰ)괄호 안 숫자는 해당 무역 회랑이 2023년 세계 무역에서 차지한 비중(%)을 나타냄. ⅱ)각 바의 길이는 2017~2023년 연평균 성장률(CAGR)을 뜻함. ⅱ)A에서 B로 향하는 무역 흐름을 ‘경제 A → 경제 B’로 표기함. ⅲ)도표에 표시된 주요 무역 회랑은 2023년 세계 무역의 약 73%를 차지함.
세계 무역의 또 다른 두 개의 주요 축은 유럽연합(EU) 내부와 그 주변, 그리고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련의 네트워크다. 이 각각은 연결의 체계이며, 세계를 만들어가는 행위이자, 세계를 재편해가는 실천이다. 우리는 이 흐름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며, 이들이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중국의 해외 투자, 소프트 파워, 기술적 연계, 확대되고 있는 군사적 존재감을 모두 합산한다고 해도, 그것이 미국식 신세계질서의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식의 접근 자체가 잘못된 프레임이다. 우리는 이제 그런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국이 실현하고 있는 것은 연결의 정책이다. 완전히 일관되지는 않을지라도, 매우 의도적이며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베이징에서는 이 다양한 요소들을 조직하고 조정하기 위한 복수의 논리적 근거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새로운 것은, 대국(大國)의 발전이라는 과제가 세계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형성되고 있는 이 미래는, 중국은 물론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같은 국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 나라들에는 ‘대국의 발전’이라는 주제가 국가 어젠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반면, EU는 중간 규모, 탈국가적 주제, 지속 가능성과 같은 문제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지금 실제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핵심 행위자들이 몰두하고 있는 의제는, 바로 이 ‘대국 발전’이다. 우리는 지금 중국이 여전히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는 데 불만을 품고 있지만, 이들이 집중하는 것이 발전(development)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추진하는 세계 재편 프로그램, 특히 재생에너지 분야의 프로그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 구상이 새롭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1944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 중심으로 구축된 기존 질서를 대체하는 ‘또 다른 질서’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적 차원에서 국가 발전 프로그램을 실현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
이런 의미에서, 이 흐름은 존 다윈(John Darwin)이 날카롭게 정의한 바 있는 ‘영국 제국 프로젝트(British Empire Project)’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이 대륙 국가로서 전 세계적 범위의 경제력을 구축하던 시기에 더 가깝다. 다만 1914년 미국의 인구는 9,900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약 5%에 불과했다. 현재 중국의 인구는 14억 명으로, 그 세 배에 달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의 범위와 영향력은 20세기 초 미국이 동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대하고, 파급력도 크다.
미국은 ‘전 지구적 글로벌리즘’의 지위를 획득했지만, 그 시점은 인류의 확장이 거의 끝나가던 시대였다. 반면 지금은 80억 인구가 거주하는 유한한 행성 위에서, 수십 개의 유능한 국가들이 복잡하게 얽힌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이징이 “세계적 규모의 대국 발전(Large Nations’ Development on a Global Scale)”이라는 전례 없는 과제에 그렇게 큰 중요성을 두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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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