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평범한 김촛불이 폭력시위대가 되기까지

평범한 김촛불이 폭력시위대가 되기까지

김촛불이라고 한다. 오늘 법무부 장관의 대국민 담화라는 것을 보고 너무 열받아 오랫만에 글을 써본다. 폭력시위로 변질했다고? 그렇다면 당신들, 그간 우리가 지키기 위해 애써왔던 비폭력시위에는 얼만큼 귀를 기울였는가? 우리가 거리로 뛰쳐나가기 시작한 것은 5월 24일. 촛불집회가 시작되고 23일 만이었다. 처음 촛불집회에 나가게 된 것은, 쇠고기 협상 내용을 듣고 이대로 두어서는 큰일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런 힘도 조직도 없는 일개 개인인 나는, 퇴근하고 몇시간이라도 머릿수를 보태 애타는 마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광장에 앉아 촛불을 흔들며 노래를 불러도, 우리는 존재감이 없었다. 그때 높으신 나으리들은 우리를 지나가는 가십거리 정도로 취급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우리는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그 6월 1일 새벽. 나는 오한이 오를 정도로 찬물을 뒤집어 쓰고, 온몸이 욱신거릴정도로 짓밟혔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재협상, 그 한마디 뿐인 우리 주장 어디가 그렇게 대역죄인가? 국민이 뽑은 인물들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 커녕,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했다. 지들 가야 할 길에 걸치적 걸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낸

폭력시위? 여기가 프랑스였다면…….

폭력시위? 여기가 프랑스였다면…….

정부는 오늘(29일) 긴급담화를 통해 촛불집회를 과격폭력시위로 규정하고 더욱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천명했다. 더 이상 자제하지 않고 “최루액”도 사용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선진국에서도 시위 진압에 최루액을 사용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정부가 밝힌 “폭력시위”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일부 시위대가 쇠파이프와 망치로 경찰버스를 부수고 쇠줄까지 사용해 경찰버스를 탈취 및 전복하고, 새총 등을 동원해 전경을 공격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황당하다. 폭력이 없어서는 아니다. 정부와 경찰이 보기에는 야간에 시청광장에서 촛불을 들고만 있는 것도 불법폭력이니 시위대를 가로막고 소통을 거부하는 ‘차벽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유리창 몇 개 깨고 줄 메달아 차를 빼려 한 것쯤이야 당연히 폭력일 테다. 내가 황당한 것은 “선진국”이라는 말 때문이다. 경찰이 시위진압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몇 나라의 시위 모습을 안다면 저걸 가지고 과격 폭력시위니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 나라만 예로 들어보자. 프랑스다. 교외의 게토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한다. 일단 차가 불탄다. 경찰차가? 아니다. 주변의 승용차들이 불탄다. 유리창이 깨진다. 경찰차 유리창이? 아니면 언론사 유리창이? 아니다. 주변의 상점가 유리창이 깨진다. 상점 안으로 들이닥친 일부 시위대는 유유히 물건들을

충성된 말은 귀에 거슬린다네

충성된 말은 귀에 거슬린다네

한`미간 광우병위험쇠고기 협상이 잘못되었으므로 국민의 뜻을 따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들도 이 나라의 국민인가?

이들도 이 나라의 국민인가?

비정규직 투쟁의 불씨를 지피게 했던 E그룹계열의 한 유통매장에서 미국산 쇠고기 살치살(등심 부위) 양념육을 호주산으로 표기해 불고기용 양념육으로 팔다가 현장에서 적발이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혼란과 대책

우리나라의 혼란과 대책

이명박정권이 역사의식이 없기때문에 역사의 방향을 역류하므로 시정하려고 쓴 것이다.

08년 촛불, 87년과의 단절과 새로운 민주주의 쟁취의 시작

08년 촛불, 87년과의 단절과 새로운 민주주의 쟁취의 시작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표 선출과 통치의 위임이 핵심 원리이지만 이명박 정권은 ‘위임’에 대한 개념을 거의 모르는 것 같다. 그것은 국가수반으로서의 대표성과 함께 국민의 요구를 책임감을 갖고 민주적으로 실천하라는 의미인데, 기업의 CEO로서의 인식과 국민 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특히 국민의 생명권까지 위임받은 것으로 인식하는 무지의 소치를 드러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일방주의적·권위주의적 국정 운영은 당연한 것이며, 그에 대한 대중들의 저항 또한 당연한 것이다.

미래가 과거가 되어버린 촛불의 시간을 살기 위하여

미래가 과거가 되어버린 촛불의 시간을 살기 위하여

사건 5월 2일, 여고생들이 중심이 된 광우병 쇠고기 반대시위가 시작된 이후로 이전에 지식인들이 쏟아냈던 수많은 미래에 대한 전망(그것이 희망이든, 절망이든)들은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전망이 \’해석\’이 되어버린 이 난감한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 할아버지 음성을 꿈결에 들었다. \”그동안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빨리 우리의 신체를 바꾸는 일이다. 전망하고 해석하는 신체에서, 변혁하는 신체로. 그러나 변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 한 달여의 경험 속에서 수도 없는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랑시에르적 의미에서의 \”정치의 주체\”론에서부터 네그리의 다중론까지, 혹은 웹 2.0이라는 틀로 분석한 세대론적 고찰까지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으로는 전망과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지언정 변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인들은 질문을 바꿔야 한다. \”변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변혁은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 질문 위에서 다시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 이 사건에 참여하는 너, 나, 우리 모두가 변혁의 주체일 것이다. 사건이 존재에 우선한다. 물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정 촛불이 비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진정 촛불이 비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광우병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두 가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생명존중\'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고, 둘은 초국적 자본이 강요하는 질서와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바로 진보(進步 : 차차 더 좋게 되어 나아감)다.

운동권과 좌파지식인의 이야기 매력없다.

운동권과 좌파지식인의 이야기 매력없다.

채진원(6.19)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정치 시위를 ‘직접민주주의’라고 아전인수로 평하는 것은 지식인 관념의 넋두리이고, 이번 기회에 현재의 민주주의를 넘는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정국에 강령을 갖다붙이는 운동권의 버릇이다. 한편, ‘제도정치가 중요하다.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단순 반복은 구체적 정세와 현실 주체를 묻어버린 일반론일 뿐이다.\” 이재영, “[최장집 비판] 진보정당이 거리에 남아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 레디앙(6.19) 위 이재영의 최장집 비판의 글을 역으로 해석해보면, 요즘 운동권과 좌파지식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촛불시위 이후 정국과 역할과 관련하여 요즘 운동권과 좌파지식인들은 본성상, “좌파(左派)는 좌파(座波)로 끝나선 안된다”, “정당정치를 강화해야 한다”, “정권퇴진으로 나가야 한다”, “주체의 재형성이다” 등의 논리를 피는 것 같다. 이런 고민들과 제안들은 옳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적절한 것인지를 판단하는데, 필자가 본 것들을 고려해 주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촛불시위에 3번 참가했었다. 촛불시위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필자가 중요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은 촛불집회에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열리고 형성된 시민들의 ‘자유발언대 운영’과 관련된 부분으로, 필자는 이것을 소통으로 표현되는 대안권력의 맹아(즉,

좌파(左派)가 좌파(座派)로 남지 않으려면

좌파(左派)가 좌파(座派)로 남지 않으려면

좌파(左派)가 좌파(座派)로 남지 않으려면 촛불의 심지에서부터 촛불의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나머지는 모두 촛불의 외부에 서서 외부 나름으로 일을 해 나가야 한다. 촛불이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횃불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촛불 외부의 투쟁은 투쟁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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