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폭동을 포그롬이라 부르는 것은 역사 모독이다

출처: Alexandre Brondino, Unsplash

지난주 바리 와이스가 이끄는 신문 프리 프레스(The Free Press)는 “지난 밤 암스테르담에서의 포그롬(Last Night’s Pogrom in Amsterdam)”이라는 헤드라인을 실었다. 이틀 후, 폭스 뉴스(Fox News)는 온라인 독자들에게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가 “암스테르담에서의 반유대주의적 포그롬""비난"했다고 보도했다.

현재, '포그롬(pogrom)'이라는 단어를 구글에 검색하면 같은 사건에 대한 수많은 헤드라인이 나타나며, 그중 다수는 암스테르담 거리에서 마카비 텔아비브(Maccabi Tel Aviv) 축구팀 팬들이 공격당하는 영상을 동반하고 있다.

서사적 논리는 비교적 간단해 보인다. 마카비와 암스테르담의 아약스(Ajax) 간 경기 이후 일어난 일은 (a) 폭동이었고, (b) 피해자는 유대인이었으며, (c) 가해자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는 '포그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암스테르담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를 '포그롬'이라고 할 유의미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그롬은 실제로 무엇이었는가

'포그롬'이라는 용어는 유대인들의 깊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며, 지배 민족 집단의 손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최근 사건에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포그롬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는 심각한 오류이며, 특히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기 동안에 두드러졌던 포그롬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포그롬은 단순한 폭력 사건이 아니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사회적 위치에 굳건히 고정되도록 하는 계산된 공격이었다. 포그롬은 다수 집단이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온전히 갖지 못한 소수 인종 집단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도구였다.

포그롬의 주요 목적은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지만, 포그롬 연구자들, 특히 한스 로거 교수는 포그롬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법적·제도적 시스템이 약화되거나 붕괴될 때였다고 주장한다. 소수 집단은 “자신의 위치를 넘어선다”는 이유로 다수 집단의 분노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요컨대, 포그롬은 급변하는 시기에 기존 사회 체제의 기초를 강화하는 공포의 도구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계산된 폭력 패턴은 억압을 정당화하는 법적 구조가 약화되던 다른 역사적 순간들과도 유사하다. 예를 들어,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들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가한 잔혹한 폭력은, 비무슬림의 낮은 지위를 의미하는 '디미튜드(dhimmitude)'의 법적 기반이 해체되던 시점에 발생한 과정이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의 털사 학살(Tulsa massacre)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흑인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종화된 폭력의 포그롬으로, 백인들이 기존의 인종적 위계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던 시기에 인종적 계층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예들은 포그롬이 소수 집단에 대한 권리를 체계적으로 부정하여 그들이 다수 집단의 폭력에 취약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틀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는 근본 원칙을 보여준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러한 구조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이들은 종교적이거나 인종적 억압에 기반한 공격이 아니었다. 이는 서로 다른 민족주의 집단 간의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일어난 일을 포그롬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반유대주의와 반시온주의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여, 각각의 고유한(때로는 겹칠 수 있는) 특성을 가리고, 현대 유럽의 물질적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일일 뿐이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포그롬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러시아 제국에서, 유대인들은 차르 정부의 당국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대개 잘 알고 있었다. 고전적인 포그롬에서는, 차르의 당국은 대체로 개입하지 않고 폭력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나 그들의 공동체에 미칠 결과를 두려워하여 반격을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최선의 선택은 문을 잠그고 버티거나 도망치는 것이었다. 운이 좋다면, 포그롬이 일어나지 않는 미국과 같은 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참고로, 이 글의 저자 중 한 명의 가족이 미국으로 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일어난 일의 역학은 이러한 역사와 거의 닮은 점이 없었다.

세계 여러 팀들과 마찬가지로, 마카비 텔아비브의 팬들 중 일부는 흔히 '풋볼 훌리건'으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몇몇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듯이, 이러한 폭력성에는 민족주의적 정치 요소가 있다. 암스테르담 경기에서 훌리건들은 특히 과격하게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역전되기 전, 일부 마카비 팬들은 팔레스타인 국기를 내려 불태우고, 무슬림 택시 운전사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했으며, 아약스 경기에서 스페인 홍수 피해자들을 위한 묵념 시간 동안 환호하고 구호를 외쳤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이들 중 일부의 민족주의적 구호는 “가자에 더 이상 아이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발언을 포함하여 “자극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이어졌다.

그 후, 자전거를 탄 가해자들에 의한 뺑소니 공격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팬들에 대한 공격이 발생했다. 피해자들 중 일부는 초기 훌리건 행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마카비 팬들이었다. 즉, 이는 전형적인 민족주의적 축구 폭동처럼 진행되었다. 한 팬 그룹의 위협적인 성향을 가진 일부가 폭력에 가담하고, 추악한 공동체 간 갈등으로 가해자들뿐 아니라 전체 팬 그룹(또는 같은 배경이나 국적을 공유한다고 잘못 추정된 무작위 사람들)까지 공격당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만약 예를 들어, 맨체스터 시티(Manchester City) 훌리건들이 마드리드에서 폭력에 가담한 후, 무고한 맨 시티 팬들(혹은 심지어 무작위의 영국인들)이 보복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라면, 아무도 이것을 “포그롬”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축구 폭동이라고 부를 것이다. 또한, 차르 당국이 포그롬 당시 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도, 암스테르담 경찰은 폭동의 첫 단계에서 폭력을 시작한 인종차별적 마카비 훌리건들보다는 마카비 팬들을 공격한 자들에게 훨씬 강경하게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마카비 훌리건들의 자극적인(그리고 일부 실제로 폭력적인) 행동이 이후에 발생한 일을 정당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우리의 매우 강렬한 견해는 축구 폭동은 나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더 큰 요점은, 표준적인 민족주의 간 축구 폭동을 '포그롬' 범주에 억지로 끼워 넣으려는 것은 큰 무리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 용어를 이용하여 가자에서의 이스라엘의 잔혹 행위에 대한 전 세계적인 반대를 전형적인 반유대주의로 공격하는 것은 진정으로 참혹한 사건들을 사소화하는 일일 뿐이다. 역사에 무지한 이러한 혼동은 진정으로 반유대주의를 우려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거부되어야 한다.

[출처] Calling a Football Riot a Pogrom Insults Historical Memory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벤 버기스(Ben Burgis)는 자코뱅(Jacobin)의 칼럼니스트이자 럿거스 대학교에서 철학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네 리스 바잘란(Djene Rhys Bajalan)은 미주리 주립대학교 역사학과의 부교수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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