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사흘 앞둔 지난 토요일, 폐쇄 예정 석탄화력발전소가 밀집한 충남 태안과 경남 창원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5.31 노동자·시민 대행진’이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기후정의버스’를 타고 모인 2천 5백여 명의 노동자·시민들은 ‘공공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해 ‘발전노동자 총고용’과 ‘지역 주민 생존권’을 지키는 ‘정의로운 전환’에 나서자고 마음을 모았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올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 1호기를 시작으로 2038년까지 전국의 석탄화력발전소 37기 이상이 순차적으로 폐쇄될 예정이다. 현재 석탄화력 분야에는 약 2만 2천여 명의 발전 노동자가 일하고 있으며, 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사회의 발전산업 의존도는 50%에 달한다. 발전노동자들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일터와 삶터를 잃을 위기에도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동의하고 나섰지만, '전환' 정책을 주도하는 정부는 발전 노동자와 지역 주민들의 일하고 살아갈 권리를 지킬 구체적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5.31 노동자·시민 대행진, 태안. 청소년기후행동 제공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석탄발전의 대안으로 신속하게 추진되어야 할 재생에너지 전환 역시 더디고 부정의한 방식으로 초국적 에너지 자본들의 이윤에만 무게를 싣고 있다. 기후 에너지 분야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발전소의 대부분은 이미 민영화되어 있다. 풍력발전소 사업 허가의 93%가 민간사업자 소유이고, 이 중 66%가 외국자본이다. 대표적인 재생에너지 발전원인 해상풍력이 민간에 의해 개발·운영될 경우, 공공에 비해 1GW당 연간 약 1,920억 원이 더 소요된다. 2050년까지 100GW의 해상풍력 발전소를 민간자본이 운영하게 된다면, 연간 20조 원 규모의 '민영화 비용'이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결국 전기요금 인상과 국가 재정의 해외 유출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지면 결국 초국적 민간 에너지 기업들이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해", 에너지 민영화가 초래할 사회적 부담이 우리 모두에게 전가될 우려가 깊다.
노동자·시민들은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발전 노동자와 지역 주민, 정부와 시민사회의 민주적 협력으로 공공재생에너지를 확대해서 신속하고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의 자원인 햇빛과 바람을 민간자본이 독점하는 것을 막고, 발전 노동자의 노동권과 지역 주민의 생존권, 시민들 모두의 에너지 접근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계획이다.
5월 31일 태안과 창원의 대행진은, 이러한 절박한 요구를 위한 투쟁의 맨 앞에 나선 발전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다양한 이들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기후정의버스에는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도 함께 올랐다. 주민들은 531 대행진을 앞둔 지난달 28일 '쪽방촌 다크투어'를 열고, 기후재난이 일상이 된 주민들의 현실과 기후정의의 과제를 연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5.31 대행진 맞이, 동자동 쪽방촌 다크투어 현장. 참세상
서울역 인근에 위치한 동자동 쪽방촌은 1960년대부터 도시 빈민들이 모여 형성된 국내 최대 규모의 쪽방 밀집 지역이다. 그곳에서는 현재 약 850여 명의 주민들이 평균 1.5평 남짓한 방을 위해 30만 원이 넘는 월세를 내며 살아간다.
쪽방에서의 삶은 기후재난의 원인이자 결과인 잔혹한 불평등의 민낯을 드러낸다. 한여름 쪽방의 실내온도는 40도를 웃돌아 바깥보다도 무덥다. 한겨울 혹한에는 겹겹이 비닐과 커튼으로 창문과 입구를 덧대는 것이 방한 대책의 전부로, 전기요금과 연동된 월세에 대한 부담으로 전기장판조차 켜기 어렵다. 폭우에도 우산 하나에 의지해 공용 화장실을 오가야 하고, 낡은 건물에서 일상이 된 누수는 겨울철 고드름과 빙판을 만들어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지자체의 생색내기식 대책과 민간단체의 '시혜적 지원'들은 유명무실했다. 복도에 설치한 에어컨의 바람을 쐬려면 방문을 모두 열어놔야 해 여성 주민 등은 "시원함과 안전"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집 밖 동네 공원 등에 천막과 선풍기를 설치해 놓은 것이 전부인 무더위 쉼터, 받기도 쓰기도 어려운 에너지 바우처, 연탄 난방 시설이 없는 곳이 대다수인 곳에서 철마다 반복하는 연탄 봉사 등 주민들에게는 하나 도움 될 것 없는 대책만 거듭됐다.
추위를 막기 위해 쪽방 입구 덧댄 비닐과 커튼. 동자동사랑방 사무국 제공
누수된 물이 고드름으로 얼어붙은 쪽방 건물 내부. 동자동사랑방 사무국 제공
주민들은 오래도록 누구나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라고 말해왔다. 마침내 2021년 정부는 이러한 쪽방촌 주민들의 절실한 요구에 화답한다며 동자동 공공주택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에 따르면 2026년 1월까지 공공주택을 지어 쪽방 주민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사업의 첫 단계인 지구 지정조차 4년째 미뤄지고만 있다. 쪽방촌 토지와 건물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셈하면서 민간개발을 고집하며 사업에 반대하고 나섰고 정부는 수년째 손을 놓고 있다. 지난 4년간 "희망고문"을 당하던 고령의 쪽방촌 주민들 중 백여 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공공이 책임있는 개입을 회피하고, 민간의 이윤 다툼만 남아있는 자리, 동자동 쪽방촌은 '에너지 공공성'과 '정의로운 전환'의 절실함을 가장 뼈아프게 증언하는 또 하나의 현장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5.31 노동자·시민 대행진에 참여한 쪽방촌 주민들과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들. 참세상
5월 31일, 동자동 쪽방촌을 출발해 태안의 뜨거운 거리에 선 한 주민의 손에는 “공공재생에너지는 기후정의와 평등으로 함께 가는 길”이라 쓰인 피켓이 들려있었다.
행진에 함께한 차재설 동자동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공동대표는 행진을 마친 뒤 기자에게 "정부에게 버려진 쪽방촌 주민들과 발전 노동자들의 삶이 꼭 닮아있다"면서 "우리가 함께 힘을 합해 사람답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집, 가난해도 돈 걱정 없이 필요한 전기를 쓰며 여름과 겨울을 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고 힘 주어 이야기했다.
동자동 쪽방촌에서 태안 석탄화력발전소까지, 소수의 이윤이 아닌 모두의 존엄을 향하는 우리들의 연대는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