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민 담화! 즉각 퇴진하라는 요구가 다시 들끓는다. 이쯤 해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봤다. 본인 입으로 지금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충분하나? 탄핵으로 일단 정지시키고 뒷방으로 보내면 되나? 구속영장을 청구해 감옥에 가두면 되나?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는 …… 사과 받고 싶었다.
‘사죄’라는 말 따위야 박근혜의 입에서 이미 쓰레기가 되었다. 그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가 제 한 몸 추스르는 일에 바쁠 때 제 한 몫 챙기려고 분탕질을 하는 자들은 이 사회에 설 자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축제와도 같은 광장에서 겨우 만나게 된 우리의 민주주의가 다음 세상의 기초가 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광장의 외로움
박근혜를 어떻게 퇴진시키는지가 박근혜 이후를 결정할 것이다. 끌어내릴 방법이야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변하겠지만 방법이 만들어지는 장소가 ‘광장’일 것임은 분명하다. 촛불이 들불로 번지는 광장에서, 불씨를 지켜왔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기적인 듯 광장을 칭송하는 말들이 많지만 광장은 새롭게 열린 것이 아니다. 더욱 크게 열리고 더욱 널리 뻗어가고 있을 뿐이다. 주말마다 모이는 광화문광장만 하더라도 세월호 유가족들이 2년 넘도록 버텨온 곳이다.
물리적 공간으로서 광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광장은 아무 목적도 지니지 않는 공공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어떤 목적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소가 된다. 함께 하기 위해 그곳에 ‘있음’ 외에는 아무런 자격도 요구되지 않는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으며 누구나 떠날 수 있다. 그래서 광장은 직접민주주의의 공간일 수 있었다.
국회도, 법원도, 언론도 외면하는 사람들이 무언가 도모할 수 있는 곳은 광장밖에 없었다. 목소리를 들어줄 누군가와 마주치기를 기다리는 장소. 거리의 분향소들, 찬 바닥의 농성장, 전철역의 포스트잇들, 여기에 광장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 않을 수 있고, 누구는 먼저 떠나갈 수도 있다.
외롭고 쓸쓸했던 시간이 더욱 길었으나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길 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길을 따라 우리는 광장에 닿을 수 있었다. 이제 광장으로 더욱 많은 길을 내고 더욱 많은 광장이 만들어져야 한다면,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외로움으로부터 우리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장에서 광장까지
광장으로 가는 길은 왜 그리 멀었을까? 광장으로 나오기 전 우리는 시장에 내던져진 개인들일 뿐이었다. “이 일을 겪기 전까지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 세상을 보지 못했어요.” 세월호 유가족들의 뼈아픈 고백은 그보다 앞서 광장으로 나왔던 이들의 고백이기도 했다.
재벌이 수백억 원의 돈을 최순실에게 건네고 그 대가로 수조 원의 돈을 벌어들이는 동안 우리는 먹고사는 일에 바빴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에도 불이익을 받을까 하는 걱정과 나서지 말라는 핀잔이 우리를 가만히 있게 했다. 그러나 뒤늦게 광장으로 나온 사람들이 떠안을 책임은 아니다.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며 노동개악을 밀어붙인 정부, 재벌들에게는 언제나 솜방망이였던 검찰, 번번이 기업 편을 들었던 사법부가 있다. 이들은 기업을 살려서 나랏님을 살리고 있었다.
음지에서 국정원도 거들었다. 대선 개입 논란을 거뜬히 돌파한 국정원이 최순실 관련 정보를 통제해온 꼬리가 밟혔다. 이번에는 몸통까지 끌어낼 수 있을까? 그들이 기획한 어버이연합이 광장에서 난동을 부릴 때 국정원은 컴퓨터 앞에서 광장을 난도질하며 권력을 엄호했다. ‘북한’을 들먹이면 게임은 끝났다. 광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종북’ 낙인을 감수해야 했고 광장으로 나올까 망설이는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광장을 고립시킨 물리력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들 때에도 고립되기 일쑤였다. 차벽은 벽처럼 세운 차가 아니라 차로 세운 벽이다. 광장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외치든 목소리는 갇혔다. 벽을 깨지 않고서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때 가까스로 넘어섰으나 멈출 수밖에 없었던 자리에 경찰은 훼손된 차를 전시했다. 그러나 훼손된 것은 벽에 막힌 우리의 존엄이었다.
어떤 물리력이 폭력인지는 국가가 정해왔다. 국가가 조직한 물리력인 ‘공권력’의 폭력은 법질서로 둔갑하고 집회시위의 자유는 폭력의 누명을 써야 했다. 경찰은 물대포로 사람을 죽여 놓고도 당당하게 평화시위를 훈계했다. 최근 법원은 경찰의 집회 금지 관행에 제동을 걸고 있다. 마치 자유가 확장되는 것 같다. 그러나 신고한 범위에서 일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법원이 허용한 신고범위에 경찰은 다시 벽을 친다. 자유가 벽 앞에 멈춰있음은 여전하다. 아직 광장은 자유롭지 않다.
광장은 신고범위를 넘어서는 우리의 권리다. 벽이 허물어지든, 벽을 걷어내든, 벽을 부수든, 광장의 고립을 해제시킬수록 광장이 넓어진다. 고립을 막 벗어난 광장에서 폭력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비폭력으로 더욱 강해지기를 다짐할 때, 저 벽이 이미 폭력이라는 점은 분명히 짚어져야 한다. 폭력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평화를 배격할 이유도 없다. 주권자가 조직하는 물리력은 폭력이 아니라 평화를 향할 것이다.
광장의 환상
광장이 고립을 벗어나는 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누구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대체로 환상이다. 혐오와 차별이 누군가를 밀어낼 때 광장은 광장일 수 없다. 박근혜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도 혐오는 사라져야 한다. 박근혜가 ‘여성’이 될수록 ‘대통령’의 문제는 사라지고, 박근혜를 대통령씩이나 만들었던 ‘남성’들은 유유히 시야를 벗어날 것이다.
지난 26일 예정되었던 DJ DOC 공연 취소를 두고 논란이 이어졌다. 강남역 살인사건 발생 후 만들어졌던 광장도 그랬다. 여성들이 절박한 마음으로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외칠 때 사회는 여성혐오를 부인하거나, 수긍하더라도 대항 전략을 제한했다. DJ DOC의 노랫말이 여성혐오냐 아니냐, 여성혐오라 해도 공연 취소가 바람직하냐로 논란은 재현된다.
혐오는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밀양 할매들이 박근혜 찍은 걸 땅을 치며 후회할 때 이년 저년 욕하는 것을 나는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삶을 모욕할 리 없기 때문이다. 표현의 맥락을 결정하는 힘이 우리에게 있는가? 이것이 혐오의 문제다. 어떤 표현이 혐오냐 아니냐 따지는 동안 혐오는 이미 피라미드를 타고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말‘뿐’인 것에서 폭력‘씩’이나 예감해야 하는 것이 소수자들의 삶이다.
누군가 ‘미쓰 박’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을 때, 그/녀는 언제라도 자신이 모욕당할 수 있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여전히 성폭력이 남아있는 광장에서 ‘미쓰 박’을 듣고 싶지 않다는 요구는 더없이 정당하다. 그것이 왜 혐오인지 해명을 요구할 때, 여전히 ‘미쓰 박’의 맥락은 우리가 결정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광장이 가뿐히 여성혐오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DJ DOC의 공연은 취소될 이유가 없었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박근혜 퇴진 농성촌에서 공연과 자유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광장에서 일상으로
관치경제로 배를 불려온 재벌은 이제 돈을 벌어서 돈을 쌓지 않는다. 손실을 떠넘겨서 재산을 쌓는다. 메탄올에 중독돼 실명한 노동자는 삼성 휴대폰을 만들다가 그렇게 됐고, 실외기를 수리하다 추락해 사망한 노동자는 삼성전자의 애프터서비스를 하다가 그렇게 됐다. 그러나 삼성은 그들을 고용한 적이 없었다. 다단계 하청구조와 파견을 통해 힘없는 노동자들에게로, 빽 없는 중소영세업체 사장들에게로, 이미 손실은 떠넘겨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사건의 가장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국정원과 검찰일 것이다. 이들은 과거처럼 제왕적 대통령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지휘되지 않는다. 저마다 법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권력의 카르텔에서 지분을 늘려 왔다. 안보와 외교도 달라졌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며 조공을 요구하기만 하지 않는다. 일본의 군사력을 끌어들이고 있다. 미-일 동맹이 ‘북한’을 제물 삼아 동아시아 대결구도를 고조시킬수록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
광장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광장은 이제 일상으로 이어져야 한다. 더욱 많은 일상의 장소들에서 광장이 열려야 한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에 다름 아니다. 체제를 뒤흔들수록 박근혜가 물러나는 시간은 앞당겨질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참았던 목소리를 내고 머뭇거렸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우리를 모욕하고 곤란에 빠뜨리고 혹사시키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상을 바꿔야 한다.
광장에서 인권하자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 보이는 지금의 광장도 어딘가에서 만들어지고 이어진 작은 광장들로부터 왔다. 일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한 걸음 먼저 걷기 시작한 사람들의 지혜와 용기가 그곳에 있다. 인권은, 앞서 광장을 지키며 길을 열어온 사람들의 삶과 만나는 방법이다. 외면하기도 했던 고통과 외로움을 보고 들어야 하는 고된 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존엄을 지켜온 이들의 시간에 빠져드는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광장은 고립과 분할을 넘어 체제를 겨냥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여기에서 인권하기를 시작한다면, 우리는 끝내 이룰 것이다.
인권10대뉴스 투표가 12월 1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다. 올 한해도 한국사회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국의 인권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이미 광장에 접속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광장으로 이끌었던 사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정말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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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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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