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국회에서 있었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 국내 유수의 재벌대기업 총수들이 나란히 출석했다. 주류 언론들은 재벌 총수들이 청문회 증언대에 오른 것은 근 30년 만의 일이며, 한국 경제의 거물들이 여야 정치인들의 호된 비판과 질타에 직면해야만 했다고 전했다.
주요 외신에서도 이번 청문회를 비중 있게 다루며 재벌 총수들이 대거 청문회에 출석하게 된 경위를 소개했다. AP통신은 “한국의 가장 힘 있는 기업 총수들을 상대로 공개 심판(public reckoning)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도 청문회 상황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표현했는데, 교도통신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9명의 경영 총수가 청문회에 불려나갔다”고 전했다.
한국사회의 ‘상층 계급’이 결탁해 저지른 거대한 규모의 부정부패, 곧 정경유착의 실상이 이렇게 국제적인 관심사로 주목받는 이유가 사뭇 궁금해진다. 한 외신보도가 그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아 마저 소개한다. 후지뉴스네트워크의 보도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경제를 이끄는 유명한 대기업 총수가 증인석에 잔뜩 모여 있는 것은 색다른 모양의 풍경”이며 “이 문제가 한국 전체를 흔들고 있는 큰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금 보여 준다”고 했다.
이보다도 적나라하고 간명한 분석이 또 있을까?
촛불의 힘이 아니었던들
제조업에서 불법인 사내하청 인력을 남용해왔을 뿐 아니라, ‘창조컨설팅’이라는 노조파괴전문기업을 동원해 부품사 노조문제에 부당 개입한 현대기아차 정몽구 회장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나라…. 반도체․LCD공장의 유해한 작업환경 속에서 76명의 노동자들이 끝내 사망했음에도, 직업병 문제를 은폐하고 산재인정을 방해하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나라…. 그런 재벌공화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능을 지닌 총수들이 대거 국회 청문회에 출석했으니, 어느 누가 보더라도 이례적이라 할 만한 ‘사건’임엔 틀림없는 일이다.
그동안 재벌 총수들은 각종 비리 혐의에 연루될 때마다, 청문회는 ‘해외 출타’를 이유로 불출석하고, 법원은 총수들 사이에서 ‘애장품’이 된 휠체어에 의지해 등장하는 수순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답습해왔다. 과거에는 이런 속보이는 행태들도 법원이 솜방망이 처벌로 화답해주었으므로, 여론의 비판을 감수하는 편이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재벌 총수들도 적당히 넘어가기 어려운 국면임을 직감한 듯하다. 벌써 6주에 걸쳐 대규모 거리시위가 폭발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근혜정부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하한선인 줄로만 여겨졌던 5%마저 이미 2주 전에 붕괴, 4%를 찍고 있는 현실을 그들도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도심을 가득 메운 광장의 압력이 뒷걸음질 치는 재벌 총수들을 청문회로 끌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꼼수는 여전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뻔뻔하기로는 재벌 총수들도 박근혜 못지 않았다. 청문회 질의자로 나선 국회의원들은 ‘미르․K스포츠 재단 기금 출연은 대가성이 아닌가?’, ‘최순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박근혜대통령과 독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등 관련 의혹을 따져 물었지만 결국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총수들이 정권에 뇌물을 공여한 혐의에 대해 철저히 부인하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교묘하게 빠져나온 덕분이다. 그들은 거대한 기업집단을 수십 년 간 지배해온 권력자답게 노련미가 넘쳤다.
특히, 이 날 청문회에서 집중포화의 대상이었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태도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법하다. 청문회 내내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의원들의 공세적인 질문이 쇄도하자 몹시 버거운 듯 답변을 머뭇대기 일쑤였다. 이재용 부회장은 의원들의 잇따른 질문에 시종일관 몸을 낮추며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답변을 되뇌었다. 어쩌면, 이것은 잘 짜인 각본에 따라 계산된 움직임이었을 수도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 씨를 아느냐’는 정의당 윤소하 의원의 질문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그렇다고 말했다. “두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가슴이 아프다”고도 했다. 반면, 고 황유미 씨의 목숨 값으로 단 5백만 원을 삼성이 건네준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윤 의원의 질문에는 ‘잘 모르겠다’는 답으로 어물쩍 넘겼다.
고질적인 정경유착 문제로 만인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된 삼성전자의 오늘은 그야말로 사면초가나 다름없다. 유미 씨 죽음 이후 9년 넘게 직업병 문제를 방치한 책임을 과연 덮어두고 갈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지난 십 수 년 간 직업병 문제를 왜곡, 은폐하기 위해 삼성전자가 기울인 노력들은 결국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재벌도 공범이다!’
불과 한 달여 전만 하더라도 대중의 관심은 최순실 모녀가 도처를 휘젓고 다니며 벌인 불법 행각들에 집중돼 있었다. 최순실 모녀의 부패 스캔들이 도화선 역할을 했다면, 이제 그 불길은 매우 급속도로 청와대와 재벌이라는 ‘뇌관’을 향해 타들어가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피해자’를 자처하던 재벌들이 실은 국정농단 세력과 한몸이었음이 세상에 환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제 광장에, 거리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재벌도 공범이다’라고 적힌 손 팻말을 들고 목청껏 구호도 외친다. 오죽하면 한 의원은 청문회 질의 도중 ‘이재용 구속’ 문구가 적힌 손 팻말을 꺼내 보이기까지 했겠나.
이 같은 장면들은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대중들의 분노가 단순히 박근혜의 계속된 거짓말과 위선 그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광범위하고 거대한 부패의 실체를 이대로 놓아두면 안 된다고, 상층계급들이 부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만든 질서를 아래로부터 허물어야 한다고, 대중들은 스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만이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청와대와 보수언론, 심지어 박근혜의 반대자를 표방하는 보수정당의 일부조차 박근혜가 정부의 수반으로서 정치적 권위와 국정운영능력을 상실했다고 단언한다.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가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박근혜체제는 더 이상 정부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와중에도 박근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마무리지었고, 사드 배치 강행, 역사 국정교과서 발행계획도 그대로 밀어붙였다. 게다가,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될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박근혜는 헌재의 최종 판단을 기다릴 것이라며 어떠한 경우에도 자진 사퇴는 없을 것이라고 버티고 있지 않은가. 재벌들 역시 위기감에 진땀을 빼고 있는 형국이지만, 어떻게든 법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잔꾀를 부리고 있다.
9명의 총수들이 불려나온 지난 6일 청문회는 장장 1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재벌 총수들을 향한 의원들의 공세적인 질문들과 꾸지람이 빗발쳤지만, 세간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았다. 변죽만 요란하게 울렸을 뿐, 즉답을 회피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한 재벌 총수들에게 속 시원한 증언 한 마디 이끌어내지 못한 탓이다. 권투 경기에 비유하면 싱거운 잽만 상대를 툭툭 건드리는 데 그쳤고, 교전 의사가 없었던 상대방(재벌)은 파이널 라운드까지 클린치(상대를 껴안아 방어하는 방법)를 집요하게 되풀이한 것 같았다.
재벌에 맞서 싸운 정의로운 사람들
헛심 공방에 그쳤던 ‘장내’와는 달리 ‘장외’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다. 재벌총수 청문회를 하루 앞둔 5일에는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재벌구속특별위원회 소속 회원들과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활동가, 유성기업 노동자들, 전경련 기습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국회에서도 재벌구속특별위원회는 청문회 출석을 위해 국회로비에 입장하는 재벌 총수들을 상대로 항의시위를 벌였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로비에 들어서자, 반올림 활동가들은 ‘직업병 문제해결’과 피해자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했다. 이들과 함께 항의시위에 나선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도 ‘이재용 구속’을 외치며 항의했다. 현대기아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입장할 때에는, 현대차 부품업체인 유성기업과 갑을오토텍 노동자들,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탄압 중단’, ‘불법파견 범죄자 정몽구 구속’을 외쳤다.
그러나, 이들의 절규는 사방에서 순식간에 몰려든 이재용, 정몽구 등 재벌 총수들을 경호하는 사설 경비대의 폭력으로 무참히 제지당해야만 했다. 재벌 총수들은 국회 청문회에서 한없이 몸을 낮추었지만, 이 날 아침 항의시위에 나선 이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황급히 출입 게이트로 몸을 뺐다.
돌이켜 보면, 이 날 하루 종일 재벌 총수들이 청문회를 통해 시인한 자신들의 ‘잘못’이란 공허하고 모호한 수사에 불과했다. 의원들의 집중 타격 대상이 된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9명의 재벌 총수들은 한결같이 ‘국민들에게 죄송하다’, ‘제 불찰이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등의 말을 마치 답안지를 외운 듯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두 재단의 출연금에 대해서는 뇌물 공여의 성격이 전혀 아니라고 잡아떼기 바빴다.
이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앞서 세 차례에 걸쳐 발표된 박근혜의 대국민담화 분위기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또다시 전 국민을 농락하는 거짓말과 위선을 목도하며, 허탈감과 분노가 교차하는 감정을 우린 이 순간 너나없이 공유하고 있다.
며칠 내로 박근혜 탄핵의 가부가 결정되겠지만, 이들 재벌을 단죄하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의 더 나은 앞날은 당분간 기약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박근혜정부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와중에도 “선의로 도움을 준 기업인들에게 큰 실망을 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발언으로 재벌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까닭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박근혜체제를 무너트릴 결정적인 균열은 바로 공고한 재벌체제를 뒤집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 싸움의 맨 선두에 섰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옥에 갇혀있다. 그리고 12월13일, 한상균 위원장의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돌아오는 주말 도심촛불에서는 “한상균을 석방하고, 박근혜와 재벌 총수는 감옥으로 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광장에 운집한 모든 이들의 가슴에 메아리치길 기대해본다.
출처: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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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현 님은 사회변혁노동자당의 조직국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