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댓돌위 신발이... 양말이... 장갑이... 두 눈이...
노래와 단어를 배우는 재미에 빠진 조카들과 부르던 노래다. 나도 그만한 나이에 저런 노래를 부르며 자란 기억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짝이 있는 양, 꼭 짝을 찾겠다는 듯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지금도 내 짝 타령은 끝나지 않았지만.
짝이라서 신경 쓰이는 것들, 장갑, 양말, 귀고리... 한쪽을 잃어버리면 남은 한쪽도 버려지기 쉽다. 특히 양말은 내 걸음걸이 때문인지 아니면 튼실하지 못한 실 탓인지 유난히 구멍도 잘 난다. 재활용하겠다며 모아둔 양말 더미 속에서, 급할 때는 비슷한 것끼리 색이라도 맞춰 신고 나간다. 양말 보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꼭 신발을 벗는 식당에 가거나 알아보는 어린이를 만난다. 설령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스스로 머쓱해진다. 차라리 양말을 신지 않아도 되는 여름이면 마음이 편하다.
학생 때는 꼭 흰 양말을 신어야만 했다. 색 양말을 신었다고 복장 불량으로 이름 적히고, 교문 앞에 서 있고, 교사에게 핀잔받은 적도 여러 번이다. 엄마가 신으려고 얻어온 색 양말 때문에 몇 개 안 되는 흰 양말이 분홍색으로, 연두색으로 물이 든 적도 있다. 세탁도 어려운데 왜 꼭 흰 양말을 신으라고 했는지. 일제의 영향인지, 순결의 상징인지 불편하기만 했던 흰 양말은 습관이 됐다.
샘은 엄마에게 왜 양말은 짝을 맞춰서 신는지 묻는다. 어린이의 엉뚱한 질문? 나도 정말 궁금하다. 왜? 꼭 짝을 맞춰서 신을 필요는 없지. 작가도 이런 고민을 했었나? 이 영리한 아이는 좋아하는 색을 골라서 양말을 신겠다고 한다. 빨간색과 초록색, 파란색과 노란색, 땡땡이무늬랑 줄무늬.... 하나만 선택하는 대신 오늘 적어도 두 개를 선택할 수 있다. 골라 신을 뿐인데 양말이 많아진 것 같은 효과가 있다. 똑똑하네.
나는 버리지 못해 아까운 마음으로 짝짝이 양말을 집지만, 샘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샘은 똑같이 짝을 맞추어 신는 양말은 지겹고, 심심하다고 말한다. 짝짝이 양말이 더 예쁘고 재미있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같지 않아서 오는 엉뚱함의 재미! 옥수수도 자세히 보면, 각각의 알맹이들이 조금씩 다른 제각각의 색으로 아름답고 재미있다. 다양함이란 바로 이런 것!
짝짝이 양말을 신고 간 샘은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친구들은 짝짝이 양말을 알아보고, 놀이를 하듯이 서로 양말을 바꿔 신는다. 부모님도, 가족들도, 양말에는 별로 관심 없어 보이는 이웃가게 아저씨들도, 모두 짝짝이 양말을 신는다. 짝짝이 양말은 유행이 되었다. 다들 짝짝이 양말의 재미에 빠진 듯. 물론 각자가 생각하는 재미와 멋은 분명 다르겠지만.
심지어 임금님은 모든 양말을 짝짝이로 만들라고 명령한다. 이제 멋과 재미는 법이 된다. 재미있을까? 누구보다 더 기발해야 재미있을까? 재미가 일상이 되면 행복할까? 이 책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까?
샘은 짝짝이 양말이 지겹다며 짝을 맞춰 신은 양말을 친구들에게 보여준다. 처음 짝짝이 양말을 신었을 때도 의자에 올라가서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마지막엔 서커스를 하듯이 책상과 의자를 높이 쌓고 그 위에 올라가서 양말을 보여준다. 높은 의자 위의 샘은 아슬아슬해 보인다. 높이 쌓아진 것을 바꾼다는 것이 그런 아슬아슬함을 만드는 것일까? 또 한 번의 전환이지만, 보는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심지어 샘이 우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달라서 차별받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주인공 샘만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다른 인물들은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해볼 대로 다 해보면 제자리에 돌아온다는 말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소재가 양말이라 그런지 끊임없이 외모를 다르게 꾸미고, 남들의 시선에 자유롭지 않은 모습들도 떠오른다.
양말이나 외모를 통한 다름의 추구는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정치적으로 불안할 때, 그 사소한 옷차림이나 외모에 대한 갖가지 규제를 만든다. 군사독재 정권들이 여성의 치마 길이나, 남성들의 머리 길이, 학생들에게 속옷 색깔과 양말 색도 맞추라고 했던 것처럼. 지금도 사회 전반의 부조리를 고쳐낼 생각은 안 하고 개개인의 인성과 도덕을 들먹이며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작태는 반복된다. 늘 새로운 정보와 유행은 법칙처럼 우리 주변을 채우고, 다름과 ‘왜?’라는 질문은 생각도 못하게 만든다. 아주 일상이 된 습관에 샘처럼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익숙해진 기존 구조와 체계에 의혹을 던질 수도 있다. 장난처럼 보이지만, 거꾸로 살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 입장도 알게 될 수 있다.
나는 이 책 덕에 삐삐처럼 짝짝이 양말이 편안해질 것 같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삐삐처럼 자유롭게 뛰어보고 싶다.
출처: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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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 님은 인권교육센터\'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