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교육>, 2004년 11월 8일
뉴욕의 아일랜드계 카톨릭 배관공에서 미국노동운동의 수장으로 등장한 조지 미니는 제이 리투아니아 출신 유태인 러브스톤과 거의 30년간 긴밀히 협력했다. 러브스톤은 1927∼29년 시기에 미국공산당의 총서기였다가, 스탈린과의 대립에서 패배하면서 당에서 축출당했다.
이 관계는 참 기묘한 협력관계였다. 항상 시가를 물고 있는 풍채 좋은 조지 미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로널드 레이건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고, 러브스톤은 수완 좋고 막후공작가로 소련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실제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한데 묶어준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전 세계 노동조합을 자신들의 통제아래 두려는 야심이었다. 1941년 10월 전미여성의류노동조합(ILGWU) 위원장인 데이비드 두빈스키가 두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는데, 이 때는 미니가 미국노동연맹(AFL) 사무총장인 된 직후였다. 러브스톤의 후견자였던 두빈스키는 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개자식은 괜찮아. 전향했으니까."
워싱턴의 AFL 본부에 신경중추에 두고 전 세계 노총을 연결시키는 꿈을 가지고 있던 미니는 국제사업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러브스톤을 고용하였다. 이는 과감하고 비정통적 임명이었지만, 사실에 대해 알던 소수의 지도자들도 감히 반대를 제기하지 못했다.
뉴욕 시립대출신인 러브스톤은 1917년 17세의 나이로 공산당에 가입했고, 미국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1929년 미국공산당의 일정한 독립성을 요구했다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회의에서 스탈린의 명령으로 축출 당했다. 이후 그는 이후 10여년 간 새로운 공산당을 건설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41세의 나이에 러브스톤은 새로운 사명을 발견했다: 미국 노동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것. 그는 시각을 공산당원들과 "동조자들"이 지도부에 있거나 약 18개 전국적 산별노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산별조직회의(CIO)에 맞추었고, CIO내 제2노조인 전미자동차노조(UAW)를 타겟으로 삼았다.
러브스톤은 ILGWU 제22지부 책임자인 사라 지머먼과의 우정을 통해 노동조합운동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는 곧 완고한 반공주의자인 두빈스키의 관심을 끌었고, 두빈스키는 UAW에서 좌파를 숙청할 상당한 비자금을 제공했다. 2년 동안 러브스톤은 UAW 수석부위원장 호머 마틴의 참모로 활동하면서, 유명한 좌파의 해고를 조종하고 그들을 뉴욕출신 "러브스톤파" 심복들로 대체했다.
자동차노조에서 좌파축출시도의 실패
1937년 8월 UAW 총회에서 러브스톤은 두 명의 좌파 부위원장과 사무총장을 제거하기를 희망했지만, 존 루이스의 반대에 부딪혀서 실패했다. 존 루이스 위원장은 대회에서 통합지도부를 촉구했다. 루이스는 공산주의자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들은 최고의 조직가들이자, "루이스의 마음에 들도록" 일했기 때문이다.
러브스톤은 UAW 개입과 쿠데타 시도 때문에 나중에 위원장이 된 월터 루써에게 강렬한 미움을 받게 되었다. 루써는 러브스톤을 파괴자이자 훼방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미니의 지지를 받는 러브스톤은 노동운동에서 더욱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1944년 AFL 총회에서 해외의 자유노동조합, 특히 유럽노조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유노동조합위원회(FTUC)이 설립되었고, 러브스톤은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2차대전 말,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서독과 프랑스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간에 강력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 투쟁에서, 미국무부는 FTUC가 중요한 파트너임을 알게 되었고, 상당한 자금과 접촉선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6년경 국무부와 22명의 노동관련 수행원들이 전 세계의 미국 대사관에 상주했다. 러브스톤은 미니가 트루먼 대통령과 갖는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AFL 출신들을 그 지위에 임명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국무부에 보고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러브스톤에게도 보고하였다. 러브스톤은 반소신념을 공유하는 국무부 고위관료들과 동맹을 맺었고, 그들은 러브스톤에게 첩보보고서를 제공했다.
더욱 많은 나라에서 정보원 네트워크와의 끊임없는 교신에서, 러브스톤은 뉴욕시의 ILGWU 본부의 사무실에서 몇 명의 비서들과 함께 비밀작전을 수행했고, 보고를 받고 지침을 내리고, 전 세계 체스판의 정치적 사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그는 미니, 두빈스키, AFL 서열 3위이자 사진제판노조 위원장인 매튜 월에게 사업진행보고서를 제출했다.
넉넉한 정부자금으로, 러브스톤은 외국노조 지도자들을 매수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전국적 시위를 지시하거나 미국의 대외정책을 지지하지 않는 정부들에 대한 파업을 지시할 수 있었다. FTUC는 주류노조가 친 공산계인 나라들에게 경쟁 노조를 지원할 수 있었다. FTUC는 사실상 국무부의 앞잡이가 되었고, 이로써 국무부는 외국 노동운동의 내부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미니와 두빈스키, 월의 충분한 지원을 받았던 러브스톤의 최대 사명은 모든 나라에서, 특히 소련의 지배 하에 있던 나라에서 친 공산계 노조를 제거하고, 그들을 자유시장경제의 규칙을 존중하는 미국 스타일의 "자유"노조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외국노조 활동가들의 유인
외국의 노조활동가들은 초청 받아 3개월 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경제와 민주적 정치제도를 배우고 소련모델과 비교하였다. 그들은 여러 도시에서 미국의 노조 지도자들과 만났다. 그들은 미국의 노조가 작동하는 방식과 자국의 노동운동에 적용할 수 있는 특징들을 배웠다. 러브스톤은 각국에서 미래에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미국식 사상을 주입 받은 외국 노조지도자들은 자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FTUC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러브스톤이 좋아했던 외국 노조들은 인쇄시설, 사무집기, 교육프로그램 지원금을 받았다. 미국의 정치경제적 이익과 관계된 미래의 분쟁을 대비하여 FTUC에 대한 충성심을 키울 모든 노력이 경주되었다.
러브스톤은 해외의 개입에 공격적으로 임했고, 프랑스, 이탈리와 서독에 벌어진 노조 지배권을 둘러싼 전투에 뛰어들었다. 1946년 1월의 FTUC 회의에서, 러브스톤은 그의 오랜 동료인 어빙 브라운에게 프랑스 최대노조인 좌파 노동총동맹(CGT)의 다가올 총회를 방해할 반공주의 대의원 블록을 조직할 계획에 총액 10만 달러를 지불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러브스톤에게, "서유럽 노동운동을 전체주의의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관점에서 프랑스는 유럽 제1의 나라이다."
CFT 총회를 방해하려던 브라운의 끈질긴 노력은 실패했다. 공산주의자들은 4대1의 다수를 차지했고, 자신들을 통제를 공고화하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브라운은 단념하지 않았다. 1947년 초, FTUC는 CGT에서 이탈노조인 노동자의 힘(Force Ouvriere) 결성을 돕기 위해 5만 달러를 파리에 보냈다. 이 새 노조인 FO는 1947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전국회의에서 250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1월 7일, 브라운과 긴밀하게 협동했던 미국 대사 제퍼슨 캐퍼리는 국무장관 서리 로버트 로베트에게 FO의 CGT 탈퇴는 "프랑스의 해방이후 잠재적으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라고 전보보고를 보냈다.
이탈리아에서 AFL의 분열전술
러브스톤과 브라운은 프랑스에서 성공한 동일한 전술을 이탈리아에서도 이용했다. 지배적인 공산당계 노총인 CGIL로부터 경쟁노조를 분열시키는 전술을 이용했다. CGIL은 3대 주요정당(공산당, 사회당, 기민당)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대표조직이었다. AFL의 전략은 노조를 분열시킬 목적으로 CGIL내 반공주의세력을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국무부는 이탈리아에 대한 마샬플랜 원조의 댓가가 정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것임을 알렸다. 1948년 4월 총선에서 공산당의 결정적 승리를 막기 위해, 1947년 새로 창설된 중앙정보국(CIA)은 비밀 선거운동에 10만 달러를 제공했다. 기민당은 48%의 득표로 승리했고, 이는 공산당에 치명적 타격이었다.
1948년 6월, 러브스톤과 두빈스키는 로마에 가서 CGIL의 비공산계 그룹의 분열을 도모했다. 이들은 카톨릭계 기민당, 중도파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단위로 분열하면 적절한 자금제공을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오직 기민당원들만이 이탈하여 이탈리아 자유노동총동맹(LCGIL)을 결성했다. 노동담당관 탐 레인의 자금지원을 약속 받은 쥴리오 파스토레는 처음 9개월 간 운영비로 15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는 쉽사리 국무부의 승인을 받았다.
1949년 공화당계와 사회당계 노조들은 CGIL을 이탈하여 FIL이라는 노총을 결성했고, 마침내 1950년 메이데이에 러브스톤과 비공산계 3대 노조의 통합이라는 목표를 성취했으며, 이 새 노총은 이탈리아노동조합연맹(CISL)으로 알려졌다.
독일 노동조합의 재건을 둘러싼 AFL과 CIO의 분열
2차대전 말, 패전국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점령국에 의해 4개 구역으로 분할되었다. 미국구역의 주요한 문제는 독일노조를 부활시키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 였다.
미국구역의 노조를 어떻게 복구·재건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AFL과 CIO 전략가들 간의 심각한 견해차이가 발생했다. 노동문제를 담당한 프랭크 맥셰리 준장의 지지를 받는 CIO의 입장은 노동조합이 "풀뿌리"로부터 재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브스톤이 표현한 AFL의 입장은 "FTUC는 과거의 독일노조에 어떤 방해도 없이 노동조합운동에서 사업을 재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우리 또한 히틀러가 몰수한 재산의 즉각적인 노조반환을 찬성한다."였다.
각 이방간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고, 양측은 미군정 사령관인 루시어스 클레이 장군에게 빈번하게 호소했다. 1945년 10월경, 미국구역의 3천 개 공장에서 현장대표들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11월경, AFL은 이미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노조를 운영하던 전쟁 전 노동지도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AFL은 전쟁 전부터 독일 노동지도자들과 친밀한 연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신뢰했다. AFL은 "아래로부터의" 접근으로 소련이 독일노동운동을 장악할까봐 두려워했다.
조지 미니 AFL 위원장은 백악관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했고, 국무부는 1946년 3월 "군정은 이미 검증된 반나치 인사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도록 허가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한달 뒤, 독일노동자들은 모임을 통해 13개 노조를 설립했고, 1949년 10월 서독노총(DGB)가 여기에 5백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16개 자주적 산별노조가 참여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열었다.
러브스톤은 1947년 11월 조지 미니와 매튜 월에게 보내는 FTUC의 성과에 관한 보고서에서, "우리의 노동조합 프로그램은 유럽 모든 나라에 침투했다.…AFL은 국제노동에 영향을 주는 모든 영역에서 세계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세계적 세력이 되었다"라고 썼다.
한편, 미국의 노조와 조합원들은 AFL이 유럽에서 벌인 비밀작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좌파노조를 방해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뿌린 엄청난 자금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 시점에, 역설적으로 공화당은 미국 내에서 CIO 조합들이 "노예노동법"이라고 부른 1947년 태프트-하틀리법의 통과와 함께, 노동조합에 대한 반공주의 캠페인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