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갑선생 |
팔순의 나이답지 않게 정정하신 선생은 메이데이를 맞는 소회를 묻자, 민주노총과 현 노동운동에 대한 쓴소리부터 날리신다.
민중연대의 건설과정에 참여했지만, 민주노총 변절, 어용화를 충실히 추종하고 노동운동의 진정한 뜻을 대변하는 것 같지 않아 관여하지 않습니다. 해방직후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과 같이 민중세력이 자본과 권력에 투쟁하는 그런 방향이 아니어서, 변질된 민주노총을 추종하며 노동자 대중의 조직과 투쟁의 원칙을 저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참여하지 않고 있고, 잘못을 누차 지적했어요.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노동운동의 출발인데, 시카고의 피맺힌 투쟁으로 노동운동을 국제적으로 확인한게 메이데이죠. 그러나 오늘날 메이데이 정신에 이탈된 기만적인 노동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메이데이 정신에 의거해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민주노총에 쓴소리를 해야겠는데, 언론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민주노총 상층은 파벌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파벌이 노동운동의 현실인양 되어 있는데 이를 타파해야 진정한 노동운동이 될 수 있습니다. 중앙파, 국민파, 현장파 등 파벌은 원래 존재할 수 없는 것이예요. 노동자계급이 투쟁으로 자본가계급을 깨부수는 게 노동운동인데, 노동운동의 본령에서 계급전선에서 이탈한 분자들이 노동운동을 개량화해서 파벌로서 존재하는 거예요. 노동운동에서 파벌은 자본과 권력이 노동자계급전선을 분열시켜 파괴하기 위한 공작의 결과입니다. 파벌 자체는 반노동적, 반조직적 행위죠.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독점자본에 맞서 노동자계급이 단결해서 투쟁해야 합니다. 사회적 교섭이나 자본 및 국가와의 노사정협상은 계급전선에서 이탈한 반조직 행위예요.
해방직후 전 조선의 노동자계급을 대변했던 전평의 노동운동과 메이데이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해방직후 전평은 대중투쟁의 선봉으로, 메이데이 정신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자본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해 투쟁했어요. 오늘날 노동운동의 당면과제는 노동조합 상층부, 즉 전위의 개량화 내지 자본의 프락치 역할을 하고 있는 게 큰 문제예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기업 중심의 노동조합, 기아나 현대자동차 노조상층부가 자본과 결탁해서 취업비리가 발생했어요. 거기다가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금품수수를 했죠. 이건 어용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층부가 자본의 프락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거죠.
각 연맹의 지도부가 어용화되었다고 하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잘못된 것입니다. 그 본질은 자본의 프락치예요.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자본의 요구에 결탁하는 것입니다. 어용은 소극적 의미이고, 노동운동 내부에 깊숙이 파고 들어 있어요. 비리사건은 노출된 것 뿐이고, 심각한 부분은 노출되지 않은 프락치의 역할이예요. 자본의 침투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노동운동이 상층부 프락치를 숙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직적 과제입니다. 프락치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파괴적 역할을 수행해요. 충실한 역할을 가장하면서 활동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두면 노동자 계급전선의 분열로 인해 운동을 전개할 수 없습니다.
8·15 이후 전평에서도 메이데이 정신을 실천했지만, 투쟁에서 프락치들이 조직을 파괴하는 엄청난 사례를 봤습니다. 우리는 프락치를 색출을 주요한 과제로 설정했어요. 계급투쟁은 권력과 자본에 대한 투쟁과 함께, 조직 내부의 프락치 색출하는 운동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규탄하고 제거해야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치열하게 개량주의, 프락치 색출투쟁을 전개해야 합니다.
해방공간의 전평과 메이데이
메이데이는 어땠나요?
8.15이후에 메이데이 정신이 파괴되고 노동조합이 무너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8.15 이후에 전평이 파괴되는 과정은 미제와 미군정의 무력적 탄압이 주원인이지만, 노동운동을 가장한 대한노총(오늘날의 한국노총)이 노동운동을 가장해, 권력의 앞잡이로서 전평을 파괴하고 학살했어요.
예를 들면, 1946년 8.15 1주년 기념행사가 광주에서 열렸을 때 화순탄광 전평노조원 1천여명이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미군은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대한노총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이 앞장세워 화순탄광 노동자 300여명을 학살하고 수백명을 부상시켰습니다. 엄청나게 당했어요. 그 이후에 미제, 대한노총 테러단과 투쟁이 본격화되었지요.
그당시 22살이었는데, 부산에서 철도 공작창 지구조직을 담당했어요. 미군이 조선노동자들을 학살하고 대한노총이 그 선두에서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어요. 1946년 9월 23일 부산철도 7천명이 일어나서 전국적 총파업을 선도했습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노동자적 대한노총 분쇄운동이 부산에서 시작되어 서울로, 출판과 화학노조 등 각연맹의 동맹파업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전국으로 확산된 파업은 10월 대구인민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남조선에 수많은 학살과 투옥이 있었지만, 대한노총이란 반노동 조직이 노동조합이란 이름으로 노동조합 파괴의 선봉에 섰습니다. 이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보다 가장 충실한 역할을 한 것이 대한노총이었어요. 이들은 전평의 노동전선을 파괴했습니다. 전평의 각급 조직에 프락치를 대량 침투시켜서 전평을 파괴했어요. 무력만이 아니라, 내부의 변절분자들에 의한 조직파괴가 심각했어요. 표면적, 공개적 행위 외에도 노동자계급전선을 파괴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프락치의 본질은 조직에 침투하여 충실한 조직원으로 가장한다는 것이죠. 많은 노동자조직에 프락치가 잠복해 있지만 발견하기 힘들어요. 변절, 프락치, 개량주의는 노동대중 사이에 거의 없고, 항상 전위, 상층부에 있습니다. 오늘날 노동자계급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프락치를 색출하는 것을 조직투쟁의 당면한 우선적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현장은 치열하게 투쟁하지만, 상층부는 투쟁을 가장합니다. 비정규직 노동현장투쟁을 마치 선도하는 것처럼 가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정규직 현장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결의 힘은 주로 현장에 있어요.
전평의 메이데이 행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죠?
전평은 건설되자마자 사실상 불법화되었죠. 46년부터는 전평은 사실상 반지하화했고, 대중투쟁만 지상에서 수행했어요. 공식적인 메이데이 행사는 46년과 47년에 열렸는데, 대한노총이 계급전선을 실질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1946년 부산에서는 토성국민학교에 7만명이 모여서 메이데이 행사를 했는데, "세계 노동자는 하나다.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해서 자본가계급을 깨부수자!"가 핵심적 구호였습니다. 메이데이 정신을 계승하는 행사가 전국에서 열렸고, 구호는 전국적으로 같았어요.
이미 탄압이 전개되고 있어서 우리는 지하에서 활동했어요. 집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우리들은 약한자 프롤레타리아. 착취받고 억압받는 우리들이다. 노동자들아 단결하여라 우리가 피흘리는 곳에 자유의 사회가 보인다"라는 투쟁가를 불렀죠.
선생님께서는 당시에 어떤 역할을 하셨죠?
남노당의 상층부는 프락치 때문에 무너졌고, 1953년까지 극소수만이 남았습니다. 저는 전평의 경남도 노책이자 철도노조 경남위원장이었습니다. 17개 산별 가운데 철도노조가 선봉적 역할을 했어요. 주로 지하에서 활동했는데, 마산시당, 부산시당 등의 상층부가 프락치 때문에 무너져서 지하조직활동을 하면서 최대한 노출을 피했어요.
표면적으로 대한노총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전평이 있었죠. 외형상 대한노총이 동원하지만, 노동조합과 대중집회는 전체적으로 전평 정신을 갖고 있었어요. 7만 집회에서 '만국의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공공연하게 선동했으니까요.
46년 철도파업을 할 당시에 저는 자동차 수송부 조직의 핵심이었지만, 외형상 대한노총 북부지구회 감찰부장이었어요. 대한노총은 위에서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식이었지만, 전평노조는 살아있었습니다. 기적소리를 신호로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비록 상층부는 프락치 때문에 무너졌지만, 48년 정부수립 이후에도 전평의 정신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혼란스런 시기였는데, 남노당과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남노당은 프락치 때문에 무너졌어요. 민전, 남노당, 전평에 관련된 동지들에게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지침이 지도부에서 내려왔어요. 저는 가입하지 않고 튀었죠. 그래서 살아남았어요. 조직선에서 이탈하지 않은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조직을 재건했지만 다시 프락치가 침투했고, 그 결과 각급조직의 전열이 또 무너졌어요.
내가 재건수습책으로 활동할 때 아지트 집주인을 살해하라는 지령이 내려왔어요. 왜 조직선에서 그런 일을 시키느냐? 그런 의문이 들어서 조직선에서 이탈했습니다. 왜냐면 정상적인 조직선이 아니였다고 판단했으니까요. 당시에 조직의 지침은 "좌익 소아병적 행동을 하지 말라"였어요. 지하활동, 북파, 빨치산 등의 특선은 있었지만. 조직이 무너질 땐 처참했습니다. 나는 다행히 지하에 들어가 있어서 노출되지 않았어요. 프락치 공작으로 조직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박헌영, 이승엽 같은 사람들이 북에서 숙청 당했는데, 그 근거는 믿을 수 없어요. 이들이 미군정과 결탁해서 이적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죠. 당시 기본 기조가 대중화였고, 실질적으로 반미투쟁을 치열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이적행위를 했다는 증거를 해방공간에서 발견할 수 없어요. 미군이 노동자·민중을 학살하던 시기였고, 국제적인 반미투쟁이 절실했으니까요.
직선제와 민주주의로 계급전선을 복원해야
자본과 어용세력은 깊숙히 침투해 있습니다.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8.15이후 우리는 독립국가를 정신적으로 완성했고, 모든 민중이 독립국가를 쟁취했다고 믿었어요. 그러나 자주적 민중세력이 처참히 학살당하고 있을 때 우리 노동선배들이 그 당시 얼마나 분노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자본의 영향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
현재 제가 82세입니다. 눈감기 전에 노동운동을 빙자한 프락치를 철저히 척결해야 합니다. 단순한 어용이 아니라 프락치예요. 어떤 사람들은 '너무 심하다!'라고 하지만, 심각한 문제입니다. 전선을 두고서 상층부가 단결을 가로 막고 있는 거죠.
작년에 비대위에 공식적으로 제안했어요. '현장의 대표를 선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정당성이 없다.' 한국노총 노동귀족의 논리나 전술이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어요. 전노협 지도부는 투쟁하고 구속당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에서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어요. 노동조합법 17조와 18조에 나와있는 조합원의 권리를 불법적으로 박탈한 민주노총은 민주노총이 아니예요.
많은 연맹들이 직선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핑계를 대지만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직선제를 안 하는 것은 조합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에요. 보궐선거에서 지도부를 선출했지만 누가 지도부를 하더라도 조합원의 직선이 아니면 정당성이 전혀 없습니다.
전위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지도부지, 비정상적으로 지도부를 선출하면 민주노총이 아니예요. 그래야 프락치의 침투를 막을 수 있습니다. 노동귀족을 도태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민주주의 원칙입니다.
전평의 정신을 계승해야 노동운동이 바로 선다
전평은 1945년 11월 5∼6일에 17개 산별 50만 조합원으로 건설되었는데, 일제 때 노동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때도 상층부의 분열, 파벌조성, 전선교란이 있었지만, 지하에서 옥중에서 선배들의 조직화가 있었고, 독립투쟁과 항일투쟁의 정신을 계승해서 전평이 탄생한 것입니다.
1948년 5.10선거 저지투쟁도 있었지만, 1946년 전국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이 가장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 인천, 신의주, 부산 등지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어요. 오늘날의 노동운동은 조국해방투쟁의 제1의 과제로 삼았던 일제 아래에서의 노동운동, 전평의 노동운동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철도노조가 민주화되었습니다. 53년 동안 대한노총 철도노조의 기념일, 즉 치욕의 날을 창립기념일로 삼았어요. 2005년 11월 1일 대의원 대회에서 전평 철도노조의 창립일로 철도노조 기념일을 바꾸었죠. 전교조나 공무원노조를 제외하면, 모든 전평시의 산별입니다. 그러나 전평을 계승한 산별은 없어요. 모두 전평 산별의 창립기념일로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 계승이 안돼요. 진정한 민주노총이라면 선배들의 노동운동을 계승해야 합니다.
가장 어용이었던 철도도 했어요. 노동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계승해야 합니다. 그래야 민주노총이 될 수 있어요. 조합원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간접선거,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어떻게 노동자계급전선이 강화되겠습니까? 현재 노동운동은 조직이기주의로 타락하고 있어요. 역사의식도 없고, 계급의식도 없는데, 어떻게 연대투쟁을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