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이라는 인류학자 겸 사회학자가 있다. 캐나다 출신인 고프만은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무대에 비유해 설명한다. 우리네 모든 살림살이는 무대 위와 무대 뒤를 지닌다 한다. 그리고 그 둘은 은밀한 관계가 있다 한다. 무대 위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는 무대 뒤에서 각본을 수십 차례 반복해서 읽고, 실수 연발을 거듭한 끝에 마련된 것들이다. 그리고 수많은 스탭들의 의상, 소품, 조명, 음향, 세트 준비가 무대 뒤에서 준비되었기에 무대 위의 화려한 모습이 드러날 수가 있다. 무대 위란 항상 무대 뒤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펼치는 모습들 역시 이면을 가진 무대 위 연기에 해당한다. 살림살이를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기만큼이나 무대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일상적 관습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프만이 일러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고프만 만큼이나 지혜롭게 무대 위와 뒤를 동시에 살피는 일에 익숙해 있다. 사람을 만날 때도 그 사람의 무대 위와 뒤의 이야기들을 종합해 판단하는 영리함을 발휘한다. 그런데 유독 먹고사는 일에 대해서는 무대 뒤를 까맣게 잊어버림을 반복한다. 유독 먹고 사는 일에 관해서만 무대 위를 볼 뿐이란 말은 그냥 해보는 지적이 아니다. 정치에 대한 우리의 감상법을 보자. 정치를 말할 때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히 나래를 편다. 신문 지상의 일면에 등장하는 무대 위 정치 보다는 칼럼이나 피쳐 기사로 드러나는 정치의 이면에 대해 더 많은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정치에 관한 한 무대 위 정치는 무대 뒤 정치에 압도를 당하고, 우리의 상상력 발동 방식에 그에 훨씬 더 익숙해있다. 무대 위와 무대 뒤의 균형이 뒤 바뀌기는 일이 정치 영역에서는 잦다 (물론 한국의 정치가 무대 위와 뒤가 분간이 되지 않는 이른바 난장인 까닭도 있겠다). 하지만 경제에 이르면 감상법은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한다.
재벌의 추억
이 땅에서 경제를 바라보는 감상법은 몇 가지 독특한 버릇을 동반한다. 첫째는 세계 속의 한국 경제라는 스펙타클을 기대하는 감상 방식이다. 세계 무대 위에서 벌이는 한국 경제의 성과를 늘 기대한다. 이는 일종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감상법이다. 어떤 기업이든 이와 같은 스펙타클을 펼치면 그 이상이랄 것도 없는 환호를 받는다. 둘째는 무대 뒤는 무대 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하거나 감추어져야 한다는 무대 뒤 희생 감상법이다. 이는 첫 번째의 감상법과 연관되어 지기도 하는데 스펙타클의 창출 및 지속을 위해서는 무대 뒤란 감추어져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셋째는 무대 위만 좋다면 무대 뒤는 어떤 모습이어도 좋다는 ‘묻지 마’ 감상법이다.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탈법 등에 대해서는 정치와 관련된 부분만 언급할 뿐 경제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이 같은 경제 감상법은 무대위에서 화려한 연출을 펼치는 재벌의 부활을 용인해주었다. IMF 통치 경제를 맞으면서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 지적되었던 재벌들은 ‘재벌의 추억’ 속에 파묻혀 버렸다. 더 나아가 온 나라가 재벌들이 펼치는 경제 무대 위의 스펙타클에 매혹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총 수출액의 22%, 세수의 8%, 2004년 총 수익 10조 등의 삼성의 무대 위 화려한 연출에 매혹 당한다. 그 뿐만 아니다. 심지어는 무대 위 화려한 연출에 자발적 동참의 줄도 이어진다. 경제를 망치는 것은 정치라든지, 경제를 죽이지 말라든지, 경제를 위해서 다른 일들은 미뤄두어도 된다든지 등의 여론에 만들거나 혹은 그에 쉽게 손을 들어준다. 화려한 연출을 트집 잡는 무대 뒤의 목소리들은 못난이들이 불만쯤으로 치부하는 일에도 익숙하다. 무대 위의 스타들은 각광을 받는 것을 넘어서 신앙적 대사에까지 이른다. 어느 틈엔가 삼성이 만들면 ‘떡볶기도 맛있다’라는 신화까지 생겼고, 우리는 그에 온 몸이 젖어있기도 하다.
경제사회, 기업사회 그리고 위험사회
특이한 버릇을 동반한 경제 감상법을 문제 삼는 이유는 그것이 갖는 사회적 효과 때문이다. 무대 뒤를 괄호쳐버리는 경제 감상법은 무대 뒤의 고통을 눈감는 폭력을 수반한다. 관객들과 비평가들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무대 뒤는 훨씬 더 처절하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공 크레인에 오르고, 분신을 꾀하고, 회사 본관 앞에서 자살을 꾀하고, 단식을 벌이고, 거리를 막고, 감옥 가기를 각오하며 ‘불법’ 시위를 벌이고..... 무대 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 양, 무대 위 스펙타클은 몇몇 스타에 의해서만 연출되는 것인 양 인식하는 경제에 대한 사회적 태도에 점점 더 처연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처절한 호소에 화들짝 놀라 무대 뒤로 돌아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려다가도 무대 위가 벌이는 화려함에 이끌려 발길을 돌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경제 무대에 관한 한은 무대 뒤에 대한 관심도 -정치를 대할 때의 그 풍부했던 - 상상력도 발휘되지 않고 있다. 오직 스펙타클에 대한 관심뿐이다.
현재 사회에 팽배해있는 경제 감상법은 무대 뒤를 죽이는 인식적 폭력에 해당한다. 그 인식적 폭력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와서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폭력으로부터 구해줄 사회적 장치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 경제와 미국 경제를 비교하면서 -불행스러운 과거였지만- 한국 경제가 대자본, 대기업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았거나 국가가 견제해주고 있기 때문에 미국보다는 건강성이 더 있을 거라는 역설적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치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자본이 국가 우위에 들어섰음을 누구든 피부로 느낀다. 자본이 권력을 정치 권력을 선택하려 하고, 권력은 자본의 성취도에 따라 정당성을 갖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인식적 폭력을 막아줄 다른 사회적 장치들도 그 기능을 중지하고 자본 앞에 납작 엎드려 있다. 그 사회적 장치들은 이미 무대 위를 가능케 하는 각본 속으로 용해되고 말았다. 아니 모두 숨을 거두었는지도 모른다. 무대 위 스타들이 던져주는 광고에 휘둘리며 언론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지가 한 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적극적으로 무대 뒤를 숨겨주며 무대 위의 화려함만 강조하는 마름으로 전락했는지도 모른다. MBC의 ‘엑스 파일’ 지연 공개, 여타 언론들의 용두사미적 엑스 파일 논조, 무노조 경영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기사 실종 등이 기능 중지의 예들이다.
무대 뒤를 보라
비판 지성으로 무대 위를 견제하고 파헤쳐야 할 대학은 이미 스스로 무대 위의 공연자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삼성 회장의 박사학위 수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고려대 사건은 그 하이라이트에 불과하다. 고려대 앞의 김영삼 사건에 침묵했던 대학이 학생 징계와 보직 교수 사태를 운위했던 것을 떠올리면 대학은 경제 무대에서 작은 웃음을 주는 광대로까지 전락한 것 같기도 하다. 경제판을 심판하고 조정해야 할 이들은 같은 편이 되어 뛰기에 분주하다. 간혹 내미는 옐로우 카드도 여론에 마지못해 펼치는 제스추어로 그쳐 버릴 뿐이다. 시민사회도 경제에 대해서는 기업에 대해서는 정치권력을 대했던 만큼의 노력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초라함을 연출했다. 경제의 무대 뒤에 있는 노동자들이 처절하게 무대 뒤를 봐 줄 것을 요청했지만 공명을 일으켜야 할 각종 사회 제도들은 침묵으로 일관했을 뿐이다. 법조계의 대응, 공권력의 초점을 비켜가는 수사 진척, 그리고 조사는 하되 기업이 다쳐서는 안 된다는 다수의 여론, 이 모든 것들이 무대 뒤를 숨 막히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경제라는 무대 위에서의 동반 연출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틈엔가 우리는 자본과 하나가 되고 말았다. 무대 뒤를 버리고 무대 위에서 벌어질 화려함을 위한 공모자가 되고 말았다. 이른 바 한국 사회는 경제사회, 기업사회가 되고 말았다. 경제를 위한 일이라면, 기업을 살리는 일이라면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되는 위험천만의 위험사회가 되고 말았다. 기업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기업 도시가 건설되고, ‘경포대’라는 경제에 빚 댄 비아양이 난무하고, 거대 기업이 펼치는 스탠다드가 국가 스탠다드가 되고, 기업 연구소가 내놓는 의제가 국가 비전 의제로 바뀌는 사회 속 구성원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신발 끈을 고쳐 매며
경제사회, 기업 사회화되면서 사회의 가치관은 급속도로 바뀌고 말았다. 1등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은 만연해 거스르기가 만만찮다. 문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킬러 컨텐츠’ 등의 살벌한 전쟁 용어를 입에 올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교육의 성패 기준이 기업의 만족도가 된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기업이 손을 대면 대학 서열이 오르고, 기업이 손을 떼면 내리는 일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스포츠 팀 응원 때도 지역이나 엠블렘이 아닌 기업 이름으로 목청을 높인다. 경기 단체들도 대기업을 끼워야 경기력이 향상된다는 공식에 도취해 물주에 읍소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기업 문화가 온 사회의 문화로 바뀌어 버린 셈이다.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삼성이 위대한 퍼포먼스를 무대 위에서 펼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대 뒤 반칙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면 그에 대해서는 심판을 해야 한다. 심판을 자처하던 제도들이 모두 죽어 스러져 있다면 일으키는 일은 물론이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주체가 나서야 한다. 이번 엑스 파일의 문제는 정치, 경제, 언론, 공권력이 유착한 사태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그를 향해 손가락질 하면서도 경제가 펼치는 무대 위에서 공동으로 연기를 펼친 시민사회도 책임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 경제의 무대 뒤에서 처연하게 삶을 부르짖던 이들에 눈에 담지 않으려 했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문화가 우리 일상 안으로까지 들어 왔음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 모두는 이번 엑스 파일 사건책임으로부터 모면할 수가 없다.
재현과 표현을 담당하는 그러나 그 동안 경제와 관련해서는 정부, 공권력, 언론에 무대 뒤 이야기를 맡겨 두었던 문화예술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자기 본분을 구성해가려 한다. 기업 사회로의 진전이 얼마나 우리를 피폐화할 지를 알리고, 기업 문화의 일상으로의 침투가 우리를 위험사회로 끌고 갈 것임을 알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무대 뒤에서의 정당성이 무대 위의 연출을 한층 더 견고히 할 것이며, 우리 사회를 파국으로까지 몰고 가는 일을 막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천민자본주의를 역전시키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산업사회, 경제사회, 자본사회, 위험사회로부터 벗어나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풍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는 문화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어서 포기한 면도 적잖이 있음을 실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맞아 다시 신발 끈을 단단히 고쳐 매고자 한다. 다시 한번 온 역량을 결집하고 사회 내 진보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경제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신화를 깨고, 온 사회가 무대 뒤를 보듬어 내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원용진, 서강대 교수 / 문화연대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