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한국영화의 빠른 성장에 힘입어 영화에 대한 관심도 사회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배우나 영화감독 같은 이들이 일반 시민들과 뭔가 다르다는데 초점을 맞춘 통속적인 방향에 치우쳐있거나, 근엄한 도덕주의자들이 가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범적 정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데 맞추어져 있거나, 관객 수의 기록갱신을 통해 특수한 이해집단들의 성공사례를 전형화하는데 주로 맞추어져 있다. 즉 영화의 사회적 연결망이 더욱 확대되고 촘촘해지면서 증진되는 관심이라기보다는, 배제와 축출에 기초한 분리주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배타적으로 조장된 관심이 영화를 통한 복잡한 사회문화적·윤리적·정치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생산적이고 개방적인 사회적 대화와 교류를 왜곡·축소시키고 있다. 사회적 이슈들이 주된 동력이 되는 진보적인 영화작품 생산에서조차 감독이나 배우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작품의 주제가 빛을 얻게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영화제작이 추진력이나 비전을 갖춘 개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영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주체로서의 관객도 헛된 수사에 머물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적 잠재력을 지닌 영화의 독특한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수용하고 해석하는 매개과정, 즉 영화가 이루어지는 기술적·제도적·사회적 맥락에는 어떤 미디어보다도 강력하게 동시대적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계기와 기회들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가 함께 관여할 수 있는 보다 참여적이고, 보다 평등주의적인 문화적 실천, 즉 다양한 정체성들과 다양한 지식형태들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적 역량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에너지는 능동적 수용자의 잠재력으로부터 발견된다.
대중이 단순히 주어진 문화산물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를 독해하고 변형하며 저항하기도 하는 능동적 존재라는 시각은 영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관객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대중의 주체적인 문화실천의 사회적 토대들을 조직하게 한다. 이에 대한 성과가 최근들어 수적으로 증가한 영화제로 확인된다. 대중들의 접근과 참여를 촉발하면서 생산적 에너지를 활성화하려는 이들 영화제는 권력과 정체성의 문제들을 문화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으로 넓혀놓았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여성영화제, 청소년영화제, 인권영화제, 독립영화제 등과 작년에 새로이 생겨난 환경영화제, 올해부터 시작된 음악영화제, 어린이영화제 등은 단일문화의 억압을 벗어나고자하는 욕망이 다양한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
영화제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기억들을 생성시키고, 저장하고, 전달하고, 확산하는 사회적 공론장이다. 이 공론장은 영화의 형태가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소비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판촉활동과 구별된다. 영화를 상품으로 포장하고 판매하는 효과적인 활동들은 비주류문화, 주변문화, 하위문화, 소수자문화 등 사회의 주변공간을 문맥없이 광범위한 소비자층과 매개함으로써 피상적인 경험을 확대시킨다. 물론 이러한 경험이 관람자의 감각을 확장시킬 수 있는 속성도 있어서 삶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교류가 상호적 긴장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일방적일 경우 관람자가 욕망과 감각을 스스로 창출해낼 수 있는 자치력의 증대를 지속적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관람자 개인 또는 집단이라는 상이한 주체들간의 접합을 도모하고 이들이 사회적 교류에서 긴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적 입지를 구축하는 것은, 이윤의 극대화 추구라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논리를 따라가는 판촉활동이 배제하거나 왜곡시켰던 사회적 공간의 활기와 섬세함을 되찾는 길이다. 영화제는 공적 토론으로부터 얻어지는 개인 또는 집단들의 경험과 창조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즉 대화와 참여를 강조함으로써 영화를 분과적 지식이나 특수한 이해관계 속에 가두어버리지 않고 전문성과 대중성을 결합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통로로 활성화하여야 한다.
3 .
사회의 상호 교류를 촉진하고 매개하는 영화제는 단순히 수용자들이 배타적으로 조장된 관심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즐거움을 진작시킬 수 있다. 영화제가 지니는 관객 참여와 의미 공유의 저변에는 문화시민권의 형태와 연결될 수 있는 보다 직접적인 생산형식들, 즉 세계를 경험하는 새로운 수단과 방법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엄격한 지침과 관습적 절차를 벗어나, 수용자들의 실제적인 필요와 욕구를 직접 반영함으로써 살아있는 경험과의 소통을 더욱 활성화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보수적인 문화엘리트주의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동경해야할 표준으로서, 그리고 오직 소수들만이 이룰 수 있는 것으로서 고급문화를 고수하는 것이다) 기존의 문화예술적 실천들이 제한해 온 가능성들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능동적인 수용자 대중들에 의한 생산은 창조적 발전을 함축하고 있다. 영화제가 영화인들만의 특권적 위치를 고수한다거나, 영화를 둘러싼 세계를 망각하게 하는 분리적 문화공간이어서는 사회적 평등을 강화하는 영화의 해방적 잠재력은 발현되기 어렵다.
능동적인 수용자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영화제, 시민들-어린이거나 청소년, 여성이거나 성적 소수자, 외국인노동자이거나 비정규직노동자, 실험적 예술가이거나 대안적 사회운동활동가, 장애우이거나 노인 등으로 주체위치에 따라 다중적 성격을 지닌-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쳐내고, 자신들의 꿈을 꿀 수 있도록 하는 출발점으로서의 영화제에서는 과잉결정된 사회적 의견과 주장들 사이를 헤집고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한 새로운 방식, 목소리가 건네는 낯선 이야기들은 확장된 의미에서 사회문화교육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나이나 성별, 취향이나 직업,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모두에게서 삶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육적 능력의 함양이 사회를 민주적으로 진화시키는 것 아닐까?
임정희, 문화연대 시민자치문화센터 소장/ 연세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