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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산… 내가 본 야만

농민이 죽었다. 이 죽음 앞에 떳떳한 이는 누구인가?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공권력에 의한 폭력은 공식적인 무대에서 퇴장했다(고 믿어졌다.) 군부·독재 정권의 퇴진과 시민사회의 성장이 폭력의 퇴장에 대한 설득력있는 근거로 제시되었다. 절대적 권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폭력을 확대 재생산하던 국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인권’을 외치기 시작했다. 국가에 의한 폭력을 반성하고 이를 재평가하기 위한 법률까지 제정되었다.

폭력에 대한 국가 구성원들의 의식은 끊임없이 계몽되어 왔다. 민주주의는 폭력을 비이성적 감정의 폭발로 정의하고, 이성의 영역 밖으로 추방하고자 했다(고 선전되었다.) 이것은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이제 폭력의 심층은 깊어질대로 깊어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 모든 폭력은 개별화되었고, 언젠가부터 국가/제도는 자신들은 결코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며, 폭력은 언제나 개인적인 차원의 우발적인 사건일 뿐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농민이 죽어간다. 그리고 죽었다. 2명의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명의 농민은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스스로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농민들에 대한 애도가 채 식기도 전에 정권은 한명의 농민을 때려 죽였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우기고 발을 빼려해도 소용없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이용했던 사인 바꿔치기는 이 정권의 염치가 바닥부터 썩어있음을 극렬하게 드러냈다. 주류 매체들은 농민의 요구가 자유화와 개방에 대한 거부이자 세계적 추세를 외면하는 집단 이기주의일 뿐이라며 문제의 본질을 축소, ·왜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자의 몫은 있다. 이 준엄한 죽음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숭고한 죽음이 무엇에 의한 것인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농민들의 죽음은 화폐의 가치가 생존의 권리에 근본적으로 무관심함을 폭로한다. 정치가 생존의 권리를 시장에서 흥정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국익’이라 불리우는 추상적 말장난이 실존적 가치로서의 ‘생존권’을 간단히 짓밟는 폭력임을 폭로한다. 국익을 위한 정권의 결정에 농민들은 죽어가고 있고 정권은 농민을 물리적 폭력으로 해산시키고, 그 과정에서 한 명의 농민이 경찰의 방패에 살해됐다. ‘참여정부’라 명명됐던, 아니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던 정권은 농민을 때려 죽이고 있다.

민주화의 진전과 시민운동의 성장은 반폭력의 좋은 근거로 활용되었을 뿐이었다. 폭력을 지극히 반체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정권은 과연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시민 운동은 폭력적 투쟁과의 단절을 체계화했다. 운동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참여와 개입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시민운동은 너무 일찍 평화의 형식에 도취되었다.

최근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 공세와 자본의 난동에 운동은 너무나 무력하다. 농민들의 죽음에 시민운동은 무기력하고 또 무기력하다. 농민대회에서 벌어진 정권의 야만적 폭력에 맞설 뾰족한 대안은 보이지 않으며, 분노마저 억누르는 합리적 이성의 강조는 비겁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참여와 개입을 통해 정권의 입에 ‘인권’이라는 단어를 달았지만 권력의 근본적 속성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이제 대답을 해야 한다. 평화적인 수단, 대안의 제시, 참여와 개입의 전략이 두 달 넘게 이어진 뜻밖의 열사정국에서 유의미했는가를 진심으로 고민해야 한다. 그 흔한 성명서 하나 없었다. 농민은 고립되었다. 고립 속에서 공권력에 의해 죽어갔다.

이 죽음 앞에 떳떳한 이는 누구인가? 영혼없는 경제 동물로 살아가길 원치 않는 자, 누구라도 이젠 산 자의 책임을 져야 한다. 노무현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 폭력의 심층을 파헤치고,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명백백하게 따져야 한다. 국민을 때려죽이는 정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반성하는 것만이 참을 수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이다. 고 전용철 열사의 명복을 빈다.


완군, 문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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