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연말 즈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노동시간센터에서는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삶을 소진시키는 노동시간의 문제를 건강, 가족, 청소년, 시간제 노동, 심야노동과 같은 다양한 매개로 풀어냈다. 여러 언론에서도 추천할 책으로 비중 있게 소개해주고 양대 인터넷 서점의 메인에 등장할 정도로 관심을 받았는데 이는 사실 저자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국사회의 장시간 노동 문제나 시간 주권을 찾고자하는 외침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데도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한 해가 시작되는지금, 노동자의 건강을 위한 투쟁 과제에서 노동시간 문제를 놓을 수 없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시간을 견디지 않기 위해 무언가 해야만 한다.
역시 노동시간 단축
지난 9월 노사정 대타협 혹은 ‘야합’ 이후 정부와 새누리당이 개악안을 밀어붙이면서 양보했다는 듯이 생색을 내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노동시간 단축’이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1주간의 근로시간은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으나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해’ 1주간에 12시간 한도 내에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 마치 일주일의 최대 노동시간은 52시간인 것처럼 보이나 휴일 근로는 연장근로에 포함 되지 않는다는 기괴한 행정해석 덕택에 토, 일요일 각각 8시간을 근무할 경우 1주 최대 노동시간이 68시간에 달하고 이 관행이 암묵적으로 묵인되어 왔다. 이번 개정안은 대단한 개선이 아니라 상식적인 해석대로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시켜 최대 노동시간을 진짜로 52시간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그냥 당연한 바로잡음이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생색내기에 한 술 더 떠서 새누리당이 내놓은 개정 법률안은 기업 규모별로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1주 8시간의 범위 안에서 ‘근로자대표와의 합의’로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자고 한다. 그동안 애매한 해석에 기대어 장시간 근로를 강행시키던 것을 이젠 법적으로 보장받겠다는 의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OECD에서 밝힌 국가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노동 시간은 OECD 국가 중 멕시코에 이어 2위로 길고, 2013년 연 2079시간에서 2014년 2124시간으로 더 늘어났다.
고용노동부가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각종 정책을 펴고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주간연속 2교대제도 도입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이 자랑하듯이 풀타임보다 짧은 노동시간의 ‘시간제 일자리’는 늘어났다.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오히려 평균 연 노동시간이 늘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 여전히 누군가는 어쩌면 꽤 많은 노동자들이 더 심하게 늘어 난 노동시간에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은 그래서 2016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구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질 좋은’ 노동시간 단축
2016년은 완성차 사업장에서 2013년에 도입된 주간연속 2교대제(8/8+1)의 노동시간을 1시간 더 단축하여 8/8 노동시간제를 시행하기로 한 해이다. 2015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에서는 금속노조 노동연구원과 함께 ‘자동차 부품사 주간연속 2교대 시행 현황과 교대제 변화에 의한 영향’ 연구를 수행했다.
이 조사에서 많은 자동차 부품사들이 완성차를 따라 주간연속 2교대제를 도입하고 야간노동과 노동시간을 줄여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만족은 하였으나, 노동시간의 질은 더욱 나빠졌다는 것이 드러났다. 특히 부품사의 경우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 이전부터 이미 노동 강도가 높은 경우가 많아 더욱 심각하였다. 게다가 일부의 경우에는 물량보전을 위한 사내하도급이나 비정규직 문제 등 의도치 않았던 쟁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아직은 견딜만해서 노동 강도를 높일 수 있었다고 응답했던 노동자도 이제 마지막 ‘1시간 단축’의 싸움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진행할 수도 없거니와 해서도 안 된다. "물량보전=임금보전"의 공식을 버리고 필요한 생활임금을 기준으로 한 월급제 도입, 적정 노동 강도와 적정 인력으로 생산할 수 있는 물량 책정,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의 표준적 노동시간을 요구해야 할 때이다.
‘좋은 노동시간’을 위해
노동시간 싸움은 갈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다. 모두 같이 출근해서 같이 일하고 같이 퇴근하고 노동조합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더 쉬운 출발이다. 한국사회는 고용의 유연화 뿐 아니라 노동시간의 유연화도 심해지고 있다. 문제는 노동자가 선호하는 시간대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인 시간에 노동을 배치하기 위해 쓰인다는 것이다.
반쪽짜리 시간제 일자리나 손님 이 뜸한 시간에 일을 못하게 하고 임금을 주지 않는 알바생들의 ‘꺾기’ 사례를 보라. 이메일과 스마트폰으로 어디서나 업무 대기 중이면 계약된 노동시간은 의미를 잃게 된다. 심지어 배달 앱 알바나 대리운전기사처럼 노동자로 인정 받기 조차 어려운 특수고용 노동자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노동시간 단축을 넘어 이들의 좋은 노동시간을 위해 새로운 전략이 필요할 때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노력해야 할 것은 결국 경계를 허무는 단결과 요구를 조직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