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스스로 ‘살아남기’를 멈추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린다. 혼자 살아가던 노인이 목숨을 끊고, 일하던 청사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는 공무원의 소식도 들린다. 새해 벽두 배달된 신문에서는 살아간다는 것이 버겁고 절망적이기만 한 청년들의 주된 정서가 ‘무기력’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기사가 있고, ‘행복’을 주요한 국가지표로 삼아 정책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기사도 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24392.html?_fr=st1)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24349.html)
아마도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자신의 삶에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멈춤’ 버튼을 누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기력과 멈춤에는 ‘경제생활문제(21.1%)’와 ‘직장 또는 업무상의 문제(4.0%)’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정신적, 정신과적 문제(28.6%)와 가정문제(8.0%)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자살 원인이다. (경찰청. 경찰통계연보 제58호. 2014.) 실로 제 정신을 차리고 사는 게 버겁고 어려운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와 노동시장의 유연화, 그리고 그 성장이 더디기만 한 사회적 안전망 속에 내쳐진 인간에게 ‘백세 시대’라는 말은 오히려 잔혹하기만 하다. 도대체 백 살까지 뭘 해서 먹고 살란 말인가. 노동자들은 서비스업의 급격한 성장과 서로가 서로에게 ‘갑’이 되고자 하는 팍팍한 현실 속에 자신의 감정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내일을 계획할 수 없는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고용불안정에 떨어야하고, 고용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서 윗분들에게 자신의 속내가 들키지 않도록 감정을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 성실하고, 착하며, 능력이 있는 노동자로 보이기 위해 자신을 돌볼 틈 없이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며 살아가는 현실에서 행복하고 편안한 정서를 가지는 건 어찌 보면 더 이상 한 일이다. 우울감에 빠졌다가 어느 순간에는 ‘이러지 말아야지’하며 스스로를 다독여 억지로 활기찬 상태로 만들어가는 정서적 롤러코스터는 그 진폭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태와 의학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질병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이러한 정서적 상태에 대한 관리에 실패를 하면 노동자들은 자살을 하기도 하고 실제 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우울장애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노동부는 2015년 산재보험법 시행령 별표에 ‘업무와 관련하여 고객 등에 의한 폭력 또는 폭언 등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 및 이와 직접 관련된 스트레스에 의해 발생한 적응 장애, 우울병 에피소드’를 추가하는 입법예고를 발표하였고, 고객응대업무를 하는 근로자의 스트레스 예방을 위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도 준비하고 있다. 아주 작은 걸음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보상과 예방을 고민한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정신건강의 예방과 관리는 원인에 대한 접근, 중재요인에 대한 접근, 질병 자체의 조기진단과 관리, 질병이 있는 사람의 사회 적응에 대한 문제 등 다양한 층위에서의 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부족하다.
‘감정노동’을 화두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이는 비단 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감정노동’ 문제로 묶인 일련의 사건들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고객을 만나면서 받는 스트레스, 계약을 연장하고 매출을 높이기 위한 매출압박, 노동의 가치를 무시하는 경쟁적 상황, 불안정한 노동에서의 기본적 삶의 안전망 파괴 등 다양한 원인들이 중첩되어 있다. 즉, 원인적 측면에서 보자면 노동의 가치에 대한 존중, 고용불안정의 완화, 경쟁적 노동시장 구조의 개선 그리고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의 확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증상의 발현을 줄이
기 위한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의 개선과 지지적 조직 문화 확립도 필요하다.
또한 이 사회 전체 인구 중 일정한 비율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정신질환이 있는 이들이 어떻게 일하고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2년마다 해고되던 노동자가 4년마다 해고된다고 해서 그들의 삶의 불안정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질환이 있어서 또는 다른 만성 질병 때문에 제대로 일을 하기 어려운 노동자는 이제 저성과자가 되어 노동시장에서 퇴출될 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병들면 당장의 벌이가 걱정이 되고 큰 병이라도 앓게 되면 순식간에 빈곤의 나락으로 빠지게 되는 것은 여전하다. 건강보험이 의료비를 보전해 줄 뿐 건강보험 가입자의 소득을 보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백세 시대에 정년퇴직을 하고도 이삼십년을 살아내야 하는 노동자들이 영세자영업자가 되어 최저임금에 알바를 고용하며, 그 동안 쌓인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하는 것도 여전하다. 노후의 삶에 대한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고령의 노동자들은 날품이라도 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도 여전하다. 금 수저와 흙 수저로 대비되는 헬조선의 새로운 계급은 기회의 평등을 앗아가며 무기력을 재생산하는 것도 여전하다.
스트레스는 항상 부정적인 효과만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예측 가능하고 스스로 조절이 가능하다면 삶에 자극이 될 수도 있다. 평생 노동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일생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예측가능성과 자신의 삶과 노동을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신건강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