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7일 삼성전자의 성실한 사회적 대화를 촉구하며, 삼성전자 본관 앞에 반올림이 농성장을 설치했다. 삼성에 대한 강도 높은 규탄과 사회적인 압박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긴 반올림 투쟁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해 왔던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뒤로 빠져 팔짱만 끼고 있는 형국이다.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유지・증진시켜야 하는 사업주의 의무를 다하도록 산업안전・보건정책을 수립・집행하고, 사업주를 관리・지도 ・감독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고, 재해근로자의 재활 및 사회 복귀를 촉진하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8년간 전혀 달라지지 않은 직업병 인정 제도
지난 8년간 공단과 노동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 8년에 걸쳐, 200명이 넘는 전자산업 노동자가 자신의 질병과 업무관련성을 문제제기했고, 그 중 76명이 사망했지만 정부와 근로복지공단이 직업병을 인정하는 체계와 절차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직업병 인정 기준과 절차를 점검하고 관리・감독하며 대안을 마련해야 할 고용노동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1월 28일 법원에서 행정소송 중이던 반도체 산업 노동자에게 최초로 난소암을 직업병으로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그동안 뒷짐 진 태도를 보여 온 노동부와 공단에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난소암이 발병한 원인 및 발생기전이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공적 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하도록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에 따르면, 이 불명확성이 노동자 책임이 아닌 이상 이를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현재의 업무관련성 평가 기준과 절차의 문제점을 인정한 것이다.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뿐 아니라, 산재보상 과정 전체에서 노동자의 입증 책임 문제,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질병의 보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공적 보험은 어디로?
지난해 11월 25일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작업장 노동자의 직업병 의심질환과 관련해 전·현직 임직원은 물론 협력사 직원까지 포괄적으로 보상하겠다고 밝혔다. 반도체 작업장과 직업병 의심질환의 인과관계에 대해 입증하기 어렵지만, 산업보건검증위원회 장재연 위원장의 말처럼 ‘직장에서 일하다가 암에 걸렸다면 사회가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측면에서 폭넓은 보상 방침을 채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SK하이닉스에서 일하다 질병에 걸려 투병・사망한 노동자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결과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과정에서도 근로복지공단과 고용노동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개별 기업의 ‘선처’로 논의가 마무리된 점은 못내 아쉽다. SK하이닉스 산업보건검증위원회는 발생 기전이 복잡한 암이나 발생률이 극히 낮은 희귀질환들은 인과관계 평가 자체가 근본적으로 어려워, 인과관계를 따지면 보상받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해 해법으로 ‘포괄적 지원・보상 체계’를 제안했다. ‘공적보험’의 관리자인 공단과 노동부는 이에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응답해야 한다.
직업적 유해요인에 대한 조사와 연구
희귀질환과 직업병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렵고 현재 그만한 과학적 근거가 축적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근거의 부족함이 산재불승인을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과학적 근거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용노동부 소관인 산업안전보건공단은 2011년 반도체 사업장의 암 발생에 대한 역학조사 이후 이렇다 할 대책이나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8년간 제기된 직업병 의심 질환에 대해 진행되고 있는 연구의 내용을 투명하게 밝히고, 노동자들에게 이 결과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앞으로 이를 위한 예산과 인력은 얼마나 투입할 계획인지를 밝혀야 한다.
산재보험 부정수급에만 관심 있는 근로복지공단
근로복지공단은 2015년 산재보험금 부정수급이 421억 원이고, 그 원인으로 각 개별 노동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꼽았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부정수급액을 따지기 전에 비일비재한 산재보험 적용 무시, 산재 미보고, 노동자 산재 청구 방해 등 ‘산재은폐’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업주의 부정행위로 인한 노동자들의 피해실태를 제대로 파악하려 한 적은 있는지 묻고 싶다.
산재보험 부정수급에 대한 광고는 전체 산재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조장하고, 노동자들의 산재신청을 위축시킨다.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인 사업주의 보험사기를 외면하면서 잘못된 정책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하고, 결과적으로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재해, 질병, 사망 비용과 부담을 다른 사회보장제도로 떠넘긴다. (존 우딩, 찰스 레벤스타인. 김명희 등 옮김, 노동자 건강의 정치경제학) 실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방기하고, 노동자들에게 '도덕‘ 운운하며 주눅들게 하는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는 삼성 직업병 문제를 8년째 끌어가게 만든 주요한 당사자이자 행위자이다. 이제, 너희의 책임에 대해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