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은 어렵다
농성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몸으로 버텨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종종 오래 매달리기처럼, 싸움의 상대방보다는 두 팔에 걸리는 내자신의 무게와 싸워야 한다. 반올림의 삼성전자사옥 앞 농성 1년도 그러했다.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와 조정을 약속해놓고는 뻔뻔스럽게 약속을 깨버린 삼성의 불의를 인정할 수 없어 농성을 시작했지만, 정당한 명분만으로는 노숙농성을 이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삼성에게 이 농성이 과연 얼마나 압박이 될지 언제쯤 삼성이 대화에 다시 나올지는 모호한 반면, 비닐 한 장으로 버텨야 하는 길바닥 위의 온도, 습도, 풍속과 강우량이나 우리들의 체력의 한계는 아주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을 버텼다
1년을 버틴 건 순전히 ‘그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농성장 바닥에 깔 팔렛트나 그 위에 올려 냉기를 막아줄 스티로폼을 트럭에 싣고 멀리서 왔다. 그들은 겨울을 대비해 히말라야에서도 잘 수 있는 겨울 침낭들과 핫팩 상자들을 차고 넘치게 보내 왔고, 여름이면 얼음봉지들과 아이스커피를 농성장에 밀어넣고 갔다.
그들은 물과 도시락, 과자와 라면을 보내오기도 했고, 일부러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싸들고 오거나 아예 조리기구를 싸들고 와 요리를 하기도 했다. 어떤 날엔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 박카스 몇 병이나 달콤한 도너츠 상자를 농성장에 쓱 밀어넣고 달아났고, 다른 날에는 이어말하기 게스트가 되어 마이크를 잡았으며, 또 어떤 날에는 36.5도의 난로가 되어 추운 밤 농성장을 덥혔다.
그들은 농성장 앞에서 판자를 자르고 붙여 선반을 만들고 하얀 고무신에 초록 식물들을 심었다. 그들은 물동이를 들고 강남역 지하 화장실에서 물을 길어다가 그 식물들을 살렸다. 그들은 굳이 어수선한 농성장에 와서 시험 공부를 하거나 회의 자료를 만들었고, 일부러 농성장에 와서 낮잠을 자거나 독서를 했다. 그들은 길을 가다 말고 농성장에 들러 무심하게 반올림 책을 샀고, 이천원 짜리 뱃지를 두 개 사면서 오천원을 넣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애초 ‘그들’은 황상기, 김시녀, 한혜경, 반올림 교섭단이나 상황실 멤버 정도였다. 그런데 2015년 10월 7일 노숙 농성을 시작하던 첫날부터 ‘그들’이 하나 둘 늘더니, 이제는 그 이름을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들은 농성이 1년을 이어올 수 있는 원동력인 동시에 1년의 노숙 농성을 통해 거둔 가장 큰 성과다. 그들은 바로 ‘더 많아진 우리’다.
삼성도 버티고 있다
반올림이 ‘더 많아진 우리’의 힘으로 1년을 버티는 동안, 삼성도 버티는 중이다. 사실 삼성이 반올림과의 대화를 깨고 조정으로, 다시 조정을 깨고 독단적 보상위원회로 몰고 간 까닭은 단순하다. 반올림의 요구를 들어주기 싫어서다. 직업병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사과는 하기 싫은 거다. 모든 피해자들을 배제없이 충분히 보상하거나 실효성 있는 재발방지대책을 투명하게 이행하기에는 돈이 아까운 거다. 그런데 하기 싫다고 말하기에는 삼성의 명분이 없다. 그러니 단 한번도 반올림의 요구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채, 대화를 깨고 조정을 깨는방식으로 도망쳐온 것이다. 그 대신 삼성은 이를 변명할 두 가지 논리를 만들었다.
‘이 문제는 다 해결이 종료되었다’는 주장과, ‘반올림은 직업병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나쁜 집단’이라는 주장이다. 삼성을 위해 이 논리를 주장하며 버텨 줄 근육으로‘가족대책위원회’와 삼성을 위해 허위 왜곡 보도도 불사하는 소위 ‘기레기’들을 활용했다.
버틸수록 위험해지는 삼성
그런데도 삼성은 아직 반올림을 정리시키지 못했다. 피해 가족들과 활동가 고작 몇 사람이던 반올림의 ‘그들’은 날마다 늘어나고 있는 반면, 삼성의 ‘근육’들은 처음보다 더 늘어나기 어렵다. 사실 시간이 갈수록 더 힘들고 위험해지는 건 삼성이다. 이미 이재용 삼대 세습 문제나 갤럭시 노트7 폭발 사고 등이 있고, 이런 일들은 조기에 수습되기 어려운 사안들이다. 게다가 앞으로 이 큰 기업 안팎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위험은 상존한다. 그러니 삼성 입장에서는 직업병 문제에 대하여 대화를 미루고 오래 버틸수록 더 힘들고 나빠질 수 있다.
이제 이재용이 답하라
그런 삼성을 위해(?) 반올림은 다시 한번 너그러운 손길을 내밀고 있다. 10월 27일 삼성전자는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이재용을 등기이사로 뽑을 예정이다. 이에 반올림은 이재용에게 10월 27일 전까지 반올림과의 대화를 재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만일 이를 거부할 경우, 반올림과 국내외 여러 단체들은 함께 힘을 모아 이재용 퇴진운동을 나설 참이다. 부디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노동자의 인권과 생명을 경시하는 악덕 3세 기업인’이라는 오명을 벗을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