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법인 필 노무사 유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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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학기 초,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만34세의 젊은 초등학교 교사가 퇴근 후 가족과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 날 아침, 숨을 멈춘 채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긴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사망하였고, 부검결과 사망원인은 심장질환(관상동맥경화증 등)으로 추정되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6월, 고인이 일했던 초등학교를 찾았다. 해당 교사의 업무내역을 파악하기 위해 이런저런 상담을 하며 60여장의 확인서를 검토하게 되었다. 휴직이나 전근을 간 몇몇 교사들을 제외하고, 교장을 비롯하여 모든 교사들이 작성한 확인서에는 고인의 일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한 박스 분량 자료의 상당부분은 다양한 교육활동을 위한 각종 제안들, 담당 업무들의 일정 및 진행경과, 수업준비 자료 등 고인이 꼼꼼하게 메모한 자료들이었다. 2009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고인이 각종 업무에 따른 과로 및 스트레스에 시달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고인의 과로 및 스트레스에 대한 수치화된 자료가 다소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2008년 학업성취도 평가부터 시작하여 2009년 1학기 초반까지의 과로 및 스트레스가 고인이 사망에 이르게 된 주요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인은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소신이 뚜렷하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수업을 준비하고 다양한 교육활동을 시도했던 점, ▲사망한 3월은 학교 업무가 가장 많은 시기인데 당시 5학년 담임 ․ 인성교육부장 ․ 교육복지투자우선사업 관련 심리정서발달지원사업 등을 맡아 고인의 업무가 폭증한 상태였던 점, ▲2008학년도 학업성취도 평가결과에 대한 교육청 감사 준비 업무를 담당한 점, ▲그 과정에서 해당 초등학교의 성적조작, 통계오류 등의 문제가 드러나 고인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과 자책감을 가졌던 점, ▲사망 직후 개최 예정이던 학교운영위원회 회의 준비 업무 등을 수행한 점 등에 비추어 고인의 과로와 스트레스가 가중된 상황에서 심장질환으로 급사한 것이었고 고인의 사망과 공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유족보상을 청구하였으나, 2009년 8월 공무원연금공단은 이에 대해 부지급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2009년 9월 공무원연금급여재심위원회 또한 ‘기각’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2010년 8월 행정법원은 “과중한 업무수행으로 인한 과로와 스트레스가 망인의 고혈압을 자연적인 진행 속도 이상으로 악화시켜 관상동맥경화와 그로 인한 심근경색을 유발하여 망인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을 것으로 추단된다”는 이유로 유족보상 부지급 결정을 ‘취소’하였다. 여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알았다.
공무원연금공단은 항소기일 마지막 날에 고등법원에 항소를 하였고 2011년 6월에 유족이 승소하였다. 그나마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아 2011년 6월에서야 비로소 유족보상이 확정된 것이다. 고인의 사망이 공무상재해로 인정받기까지 2년 3개월이 걸렸다.
문제는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당연히 공무상 재해로 인정해야 할 사건에 대하여 부지급 결정을 하였던 것에서 시작된다. 상당기간이 경과하여 유족보상을 받게 되었지만 공단의 그 누구하나 진정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업무지침에 따랐을 뿐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은 2명(고 황유미, 고 이숙영)에 대하여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며 반올림 동지들이 공단 본부에서 농성을 하였고, 근로복지공단이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듣고 농성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검찰의 지시(?)에 의해 항소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소송을 한 전부가 직업병으로 인정되지는 못했지만 이 소송은 지난 4~5년 동안 힘겹고 숨 가쁘게 달려온 유족과 연대 동지들의 주장, 다시 말해 반도체/전자산업이 노동자들에게 야기하는 직업병에 대한 문제제기와 요구가 타당하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 되는데... 그들이 그럴 리가 없지!
근로복지공단이든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이든 사립학교교직원연금관리공단이든 직업병 등 업무상 재해와 관련된 행정기관은 불필요한 소송을 남발하지 말고 인정할 것은 제대로 인정하여 재해 노동자들과 유족들이 고통받는 일이 없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