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준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먼저, 이번 판결(삼성반도체 백혈병사건)은 근로복지공단이 왜 존재해야하는가, 필요가 있나, 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전근대적인 과거 패러다임에 기초한 산재보험은 청산되어야 한다. 그런데 산재보험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논의는 계속되지만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산재보험 구조를 이제 정말 바꿔야한다.
최대 사회적 쟁점이 ‘보편적 복지’인데 그 측면에서 산재보험은 차별과 배제를 구조적으로 만들고 있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사회보험은 노령, 질병, 산재, 실업 등의 사회적 위험에 의하여 발생한 손실에 대해서 국민 또는 그 사회 구성원에게 보험급여를 제공한다. 사회 보험에서 규정하고 있는 자격만 만족하면 적용에 차별을 받지 않고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재보험은 이러한 사회보험의 원칙이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전 승인 절차가 있고 업무 관련성에 대한 입증을 재해 노동자가 직접 해야하는 등 산재보험은 산재환자를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과거 산재보험은 노동자들의 건강할 권리를 박탈해왔던 역사가 있고 이런 문제들이 응축적으로 나타난 것이 삼성백혈병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바뀌어야 하는 것들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오늘 이 토론회에서 입증 책임의 문제, 신청 절차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단계를 거친 구조적인 배제의 과정, 그런 절차들을 바꿔야한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발제하고 덧붙여 산재보험의 개혁과제에 대해 설명한 뒤 마무리하겠다.
산재환자들이 건강보험으로 치료받고 있다. 아픈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산재보험이 그렇게 문제면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으면 되지 않냐고’. 현실을 한 번 살펴보겠다.
현재 사망만인율을 보면 OECD 평균의 세배다. 그런데 사망이 아니라 업무상 사고와 질병 전체를 볼 때는 선진외국에 비해 오히려 낮다. 재해율을 보면 OECD 평균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재해율은 낮은데, 중대재해 또는 사망재해만 높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질병관리본부의 ‘응급실 기반 감시체계 연구’ <일터> 6월호 ‘안전보건연구동향’ 참고
등에서 산재 사망조차도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최소한 사망은 상당부분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는다고 할 때 사망재해가 아닌 일반 재해의 경우는 대부분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재해율이 낮다는 것은 실제 산재발생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산재보험 급여를 받지 못한 채 건강보험의 급여를 받고 있거나, 의료기관에서 일반 환자로 처리가 되어 아예 건강보험이나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절대 다수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양한 인정기준의 문제 때문에 직업성 질환을 앓고 있는 산재 환자들은 더 많은 수가 배제되었을 것이다.
산재환자가 산재보험으로 치료받지 못하여 발생하는 노동자 건강의 문제는 건강보험의 보장성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보장성 측면만 보면 건강보험제도를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보험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간단히 말해 건강보험으로 치료받는 다는 것은 제대로 치료 못 받는다는 것이다. 산재환자가 건강보험으로 치료받는 것은 현행 법률상으로도 불법이다. 그래서 건강보험은 자체 조사를 통해 환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고 있다. 그래서 피해 노동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 자기가 원해서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은 것도 아닌데,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비싸게 치료받고, 휴업급여도 못 받고... 그런데 건강보험에서는 다시 돈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다. 산재보험의 배제가 낳은 결과이다.
현행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휴업급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치료비도 보장해주지 않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한국의 건강보험을 ‘진료비 할인 보험’이라고 놀릴 정도다. 소득보장을 해주지 않는데 건강보험이 소득을 보장해주지 않는 나라는 몇 나라 되지 않는다.
<2009년 건강보험 손상환자의 입원 및 외래 이용 양상>을 보면, 경제활동인구라 할 수 있는 20-40대의 입원일수가 다른 나이대보다 훨씬 짧다. ‘얼마나 손상이 심각한가’에 있어 반드시 노인이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없는데, 20-40대의 입원일수가 왜 더 짧은 걸까. 이것은 보장성이 취약한 구조 때문에 의료이용을 제한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임금 노동자이고 별도의 소득 손실에 대한 보장 규정이 없는 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밥벌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중도에 치료를 포기하고 서둘러 직장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된 치료와 재활 없이 직장으로 복귀하고 상황은 더 악화되는...
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낮은 문제는 노동자의 건강과 무관한 것이 결코 아니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현행 산재보험은 재해 노동자에게 업무관련성의 입증을 요구하고 근로복지공단에 의한 사전승인 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사회보험이라 보기 어려운 제도이다.
산업재해를 당한 후 적절하고 긴급하게 치료와 재활을 받아야할 환자가 공상처리하거나 건강보험으로 처리하는 등의 일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들이 정부와 보험공단 입장에서는 재정이 아껴지고 있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산재보험이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재해노동자의 제대로 치료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데다가 사회 전체적으로 질병 부담을 증가시키고 보험 재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산재보험 청구 및 급여제공 절차를 개선하면 된다.
산재요양을 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사전승인절차를 없애도 별도의 절차없이 재해노동자가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해노동자가 반드시 산재를 신청해야만 급여절차가 시작되는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건강보험은 주민번호만 얘기하면 치료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재보험도 의료기관이 처리를 대행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입증의 책임을 지금과 같이 산재환자가 지는 것이 아니라 제도 개선을 통해 근로복지공단 또는 제3기관에게 반증의 책임을 지우도록 하는 것이다.
<외국의 현황>
외국의 현황을 살펴보면, 복지제도가 발전해있는 유럽의 경우는 건강보장제도가 통합되어 있어서 산재보험으로 별도의 치료를 받을 필요조차 없거나 산재보험의 적용대상을 확대하고 신청절차를 간소화하려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한 나라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북유럽 복지국가의 하나인 스웨덴의 경우는 산재직업병 일반 질병이든 상관없이 국가공영의료체계(National Health Service)에 의하여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회보험청에서 사업주에게 보험료를 거두어들여 치료기간 동안의 소득손실에 대하여 평균임금의 80%에 해당하는 상병수당을 제공한다. 이렇게 건강보장제도가 통합되어 있고 소득손실에 대한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는 국가의 경우 산재보험의 배제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되어 있다고 수 있다.
우리와 같은 사회보험 방식으로 산재보험을 운영하고 있지만, 국가가 단일보험자의 역할을 하는 우리와 달라 노-사 양측에 의해 운영되는 산재보험제도를 운영하는 독일의 경우에도 산재환자가 산재보험으로 양질의 치료를 용이하게 받을 수 있도록 산재전문의사제도를 운영하는 등 산재청구절차를 간소화하고 있다. 산재환자가 휴업급여를 받으며 제대로 치료받아서 원직장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를 마련해두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건강보험과 마찬가지로 모든 의료기관이 산재보험에 지정되는 당연지정제도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주요한 갈등의 원인이었던 현행 자문의제도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제도 등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보편적 복지로서 산재보험이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안한 방향으로 산재보험 제도가 개선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정책효과는 무엇일까. 첫째로 의료 행위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휴업급여가 보장되어 재해노도자의 치료와 재활에 있어 경제적 장벽이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두번째로는 단기적으로는 산재보험 재정 규모가 커지게 되어 사업주 부담이 늘어나긴 하지만, 이는 반대로 사업주 부담이 줄어드는 효과도 가져온다. 그동안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았던 산재 환자들이 산재보험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건강보험 재정이 줄어들면, 사업주 부담이 덜어질 수 있다. 또한 공상처리 등으로 부담을 느껴왔던 사업주의 경우 산재보험으로 치료하면 되니 부담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개별 노동자와 가계에 부담되었던 비용이 전체 노동자의 집합적 방식으로 해결된 것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세번째로 제도의 수용성 측면에서 살펴보면, 노동자의 경우는 산재보험 제도에 대한 수용성이 좋아지고 권리의식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의 지위를 실질적으로 획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업주의 경우 업종과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 그동안 산재보험의 부담이 적었던 대기업과 비제조업 분야의 경우는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에 제도 변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클 수 있고 제조업과 중소사업장의 경우에는 그동안 산재보험료 부담이 컸던 상황에서 부담이 산재보험으로 통합되고 부담의 크기도 상대적으로 줄어들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제도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총자본의 부담이 커진다는 측면에서 제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지배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정부는 사업주 측의 반대와 그동안 통계로 잡히지 않았던 재해가 통계로 잡히게 되어서 사회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정부나 사회가 산재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산재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고 입구만 넓히는 것이 아니라 출구도 넓혀서 건강하게 건강권을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회 전체로 보았을때는 긍정적이다.
산재보험이 보편적 복지로서 바로 설 수 있으려면 이외에도 과제는 많다. 첫째로는 특수고용노동자와 같이 혜택에서 배제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시급히 일하는 모든 사람을 적용 대상으로 확대해야 한다. 두번째로는 현재 휴업급여, 산재보험으로 제대로 치료받고 가계를 꾸려가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실제 소득을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번째로는 재활체계의 구축이 필요하며 마지막으로 근로복지공단이 더 이상 노동자의 반대되는 편에 서서 노동자를 배제하는 기구로 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각 발제문의 양이 방대하여 발제 요약은 토론회자리에서 각 발제자가 구두로 설명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