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1년 7월 - 기자회견문] 약속을 지켜라

1. 근로복지공단은 항소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지난 6월 23일, 4년 여에 걸친 고된 투쟁 끝에 마침내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노동자 고 황유미, 고 이숙영 님의 백혈병이 산업재해라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을 들을 수 있었다. 이 판결은 직업성 암과 중증질환 등 업무관련성을 입증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질병들에 대한 입증 책임을 전향적으로 전환하고 인정 기준을 완화하여야 한다는 보편적인 노동자들의 필요를 반영하고 있는 소중한 성과다.
그러나 피해 유가족들의 기쁨과 회한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근로복지공단은 이 판결에 맞서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나섰고, 삼일 간의 농성 끝에 힘겹게 마련된 신영철 이사장과의 면담에서 ‘열린 마음으로 항소여부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던 약속조차 하루만에 손바닥 뒤집듯이 저버리고 말았다.

공단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최선을 노력을 기울였으리라고, 피해 노동자들의 고통을 단 한 순간이라도 생각했으리라고, 그리하여 진정코 어쩔 수 없는 상황일 것이라고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약속 하루 만에 말을 바꾼 그들의 진정성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근로복지공단은 피해자들과의 약속, 이 사회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즉각 항소 결정을 철회하라!

2. 산재보험법의 취지에 따라 신속히 직업병을 인정해야 한다

한편 삼성반도체 공장의 피해 노동자 김은경, 송창호, 그리고 고 황민웅 님의 백혈병과 림프종의 행정소송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각되었다. 이들의 병이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작업환경에 대한 피해 노동자 측의 진술에 대해 삼성 측이 반대되는 주장을 펼쳤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산재로 인정받은 기흥공장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에 비해 엔지니어나 온양공장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알려진 정보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도 고 황유미, 고 이숙영 님과 다를 바 없이 유해화학물질과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음이 분명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제보와 같은 공장에서 발생한 수많은 피해 사례들이 그 증거다.
이에 우리는 오늘 김은경, 송창호, 그리고 고 황민웅 님의 산재불승인에 대해 고등법원에 항소장을 접수하고자 한다. 비록 백혈병 유발물질에 충분한 수준으로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과학적, 의학적으로 분명하게 입증할 수 없더라도 어느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면 산재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 취지는 이들에게도 고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산재보험법의 취지를 살리는 길이며, 비단 이 세 명의 피해 노동자 가족들 뿐 아니라 과거 작업환경에 대해 뾰족한 증거를 제출하기 어려운 수많은 암 피해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산재보상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신속히 직업병을 인정받을 권리, 그것이 산재보험법이 노동자들에게 하고 있는 약속이다.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보험법의 약속을 지켜서 항소심 과정에 전향적으로 임해야 한다!

3. 삼성전자는 최소한이라도 피해자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오는 7월 14일, 드디어 삼성전자가 미국 인바이런사에 의뢰한 자체조사 결과 설명회가 열린다고 한다. 그동안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은 작업환경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랜 시간동안 산재인정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또한 삼성전자의 작업환경에 대한 여러 조사들이 있었지만 피해 노동자들은 단 한번도 이런 조사에 참여나 입회는 커녕, 심지어 조사결과에 대한 열람조차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허락받지 못했다.

이번에 발표될 자체조사에 대해서도 비단 피해자들 뿐 아니라 국내외 노동사회단체들과 해외 투자자들조차 이해당사자들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한 최소한의 신뢰도 얻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며 투명성과 합리성에 대해 오랫동안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러나 삼성은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결과 설명회를 고작 이틀 앞두고서야 언론에 계획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런 삼성의 태도가 부디 피해 노동자들과 그 지지자들의 참여 기회를 최소화하기 위한 얕은 셈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고 비록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이제 마지막 시점에서만이라도 피해 당사자들의 최소한의 권리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일 것을 요구한다.

삼성은 14일 결과 설명회 장소에서 피해 당사자들도 그 내용을 듣고 이해하며 소통할 수 있도록 참석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수십 명의 기자들을 초청하는 설명회 자리에 반도체 작업현장과 환경평가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피해자 추천 전문가와 피해 당사자 등 몇 명의 자리를 더 만드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일 삼성이 이 공개 제안을 거부한다면, 피해 당사자들이 그동안의 실망과 분노를 누르고 백보 양보하여 최소한의 ‘소통’을 위해 합리적인 요구를 마련하느라 기울인 모든 노력들을 부정하고 ‘불통’으로 일관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삼성전자는 최소한의 합리성과 투명성을 갖추어, 이제라도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라!

14일 설명회 자리에 피해 당사자와 추천인의 참석을 보장하라!

2011년 7월 13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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