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전자투표라고 하면 보통 인터넷이나 핸드폰을 이용해서 투표를 하는 것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대학가 총학생회장 선거가 인터넷을 통해 치러지기도 하고, 지난 해 민주노동당에서 인터넷 투표를 실시하는 등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인 공직선거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된 상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터넷 투표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대해 많은 문제제기가 존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방안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투표 도입의 명분이 아무리 좋더라도, 전자투표의 섣부른 도입은 오히려 그것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킬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낙후된 투표 도구를 개혁하고자 2002년 ‘미국선거지원법(Help America Vote Act : HAVA)'을 제정하고 각 주에 전자투표기를 지원했으나, 전자투표기의 오류 사례들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불신을 오히려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인터넷 투표도 아니었고, 투표소에서 이용하는 전자기록장치(Direct Recoding Electronic)였는데도 말이다.
인터넷 투표, 부정선거의 위험 커져
전자투표에 제기될 수 있는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시스템의 안전성’이다. 즉, 투표 시스템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적인 결함을 최소화하고, 해커나 바이러스 등의 공격으로부터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전자기록장치의 경우에도 기계 오작동, 유권자가 선택하지 않은 후보의 득표, 메모리 부족으로 인한 투표 상실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인터넷 투표의 경우 보안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비밀 투표 등 투표의 기본 원칙에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투표 결과에 대한 신뢰 역시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투표 결과가 해킹 등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일부 보안상 취약점이 투표 결과 전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비밀 투표의 원칙을 훼손하고 제3자에 의해 강요된 투표 혹은 대리 투표의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는 지적도 있다. 홍익대 방석호 법대교수는 원거리 인터넷 선거는 “투표 자체가 감시 기구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는 전혀 새로운 투표 방식”이라며, “투표 행태 자체를 공공적인 성격에서 사적인 성격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편리함이 극대화될 수도 있지만 많은 법적, 기술적 문제를 노출시키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프라이버시 침해이다. 방교수는 덧붙여, “투표 자체가 선거 감시인이 존재하고 유권자가 동시에 참여하는 공적인 민주적 잔치의 일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개인적 일정의 일부로 흡수되어지기 때문에 유권자의 자율적 의사 결정을 위협할 수 있는 부정선거의 위험은 오히려 더 커지게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직장 컴퓨터를 이용해 투표할 경우 고용주의 감시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가족 내에서도 한 가족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의 투표를 대신하거나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선거 브로커 등이 개입하여 표를 매매하는 것도 용이해질 수 있다.
대리 투표, 중복 투표, 위조 투표 등을 막기 위해서는 ‘신원 인증’이 필수적이다. 물론 유권자의 신분 확인 문제는 전통적인 선거에서도 존재하지만, 투표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고 선거 감시인도 없는 전자 투표에서는 더욱 문제가 된다. 인터넷 투표에서뿐만 아니라, 그 전 단계인 선택한 투표소에서의 투표나 무인 투표소에서의 투표의 경우에도 정확한 유권자 확인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와 같은 개인 인증 및 투표 결과의 안전한 전송 등을 위해 공개키 기반의 암호 시스템이 사용될 전망이다. 물론 개인마다 고유한 암호키를 부여하더라도, 유권자가 자의로 타인에게 위임한 경우 대리 투표를 방지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지문, 망막, 음성인식 등 생체 정보를 이용한 신분 확인 시스템도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또 다른 논란을 낳을 수 있다. 생체 인식 장치가 보편화되어야 하는 부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체 정보를 국가가 수집하는데 따른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즉, 현실적으로는 강요에 의한 투표나 대리 투표의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결국 투표 방법 및 정치 세력간의 사회․정치적 신뢰 문제일 수밖에 없다.
소수민족, 빈민층, 낮은 교육 수준의 유권자에 대한 차별 가능성
투표 결과의 검증 가능성, 즉 ‘재검표’ 가능성도 쟁점 중의 하나이다. 기존의 종이 투표에서는 개표 결과에 대한 사회적인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재개표를 하게 된다. 그런데, 전자투표에서는 재검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재검표를 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결과에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다시 투표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재검표가 아니라 사실상 ‘새로운 투표’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번 투표 결과를 본 유권자들이 두 번째 투표를 할 경우에 선택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시민단체인 전자개척자재단(EFF)이 전자기록장치 방식의 전자투표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종이기록 장치의 연동을 주장했다. 일종의 영수증과 비슷한 개념인데, 유권자들이 전자투표기로 투표를 하면 투표 결과가 종이로 프린트되는데, 유권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투표 결과를 확인할 수 있고, 이 종이 기록이 향후에 재검표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인터넷 투표 역시 향후 재검표를 대비해 투표 결과를 암호화된 형태로 저장 서버에 기록해놓는 방법이 제안되고 있다.
전자 투표가 현실화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디지털 격차’의 문제이다. 전자 투표는 컴퓨터나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계급, 계층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인터넷 투표는 노인이나 저학력 계층의 투표율 하락을 야기할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정치적 불평등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연령이나 학력 등 사회집단에 따라 정치적인 경향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지 계층에 따른 정치 세력간의 갈등을 불러올 수도 있다.
지난 2000년에 있었던 미국 애리조나주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불거졌다. 지정 투표소의 인터넷 투표로 치러진 이 선거는 보안상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2명의 유권자들이 1965년 선거권법 위반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는 법적 문제를 야기했다. 인터넷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선거권이 불평등하게 다뤄졌다는 것이 이유이다. 이는 소수민족, 빈민층, 낮은 교육 수준의 유권자에 대한 차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설사 전자 투표와 전통적인 투표 방식이 동시에 제공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한 측면에서 이 문제는 한 사회의 계급, 계층간 정보 격차가 어느 정도 심각한 수준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 유권자들이 전자 투표의 교육과 경험을 얼마나 축적해 가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아무리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디지털 격차의 문제를 한 순간에 해결하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관련 전문가들은 전자 투표가 점진적인 방식으로 도입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자칫하면 위헌 논란으로 이어질 수도...
이와 같은 문제들이 심각하게 인식되는 이유는 선거의 ‘기본 원칙’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와 같은 원칙들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원칙들이다.
선거법(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278조는 전자 투표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2항에서는 “투표의 비밀이 보장되고 선거인의 투표가 용이하여야 하며, 정당 또는 후보자의 참관이 보장되어야 하고, 기표착오의 시정, 무효표의 방지 기타 투표의 정확을 기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투표 비밀의 보장 및 투표 시스템의 정확성․안정성을 요구하고 있다. 3항에서는 “정당 또는 후보자별 득표수의 계산이 정확하고, 투표결과를 검증할 수 있어야 하며, 정당 또는 후보자의 참관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재검표 장치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유권자의 편리성이나 투표율의 상승과 같이 전자 투표를 도입하고자 하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선거 원칙을 바꾸거나 훼손하게 된다면 도입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위법 논란, 혹은 위헌 논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선거의 기본 원칙이 절대적인가는 별개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핀란드, 영국 등 유럽의 일부 나라들에서는 위임 투표를 비롯하여 유연한 투표 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 투표에 대한 제안과 함께 한국의 투표 방식의 경직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선거의 원칙을 바꾸는 문제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최소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토론 과정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또한, 전자 투표를 도입하자는 근거도 검토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전자 투표의 도입을 전자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보는 것에 대해 과도한 주장이라는 의견도 있다.
최근 발표된 중앙선관위의 전자투표 사업 계획을 보면, 이와 같은 문제점을 인식한 듯 상당히 제한적인 형태로 제안하고 있다. 인터넷 투표(온라인 전자투표)는 거소투표자 및 해외부재자투표로 제한되며, 이 경우 기존의 우편투표방식도 병행된다. 주된 전자투표 방식은 투표소에 가서 터치스크린에 의해 투표를 하는 방식이다. 선거인명부확인 시스템과 전자투표기는 상호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전자투표기는 온라인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투표 마감 후에 저장된 데이터를 개표장으로 이송하여 중앙집계시스템에 연결하여 집계한다. 검표를 위해 종이 형태의 투표결과기록지를 병행한다. 그리고, 정보 격차를 고려하여 기존의 종이투표 방식도 병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로서는 언젠가는 전자 투표가 도입될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하는 것도,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성급할 것 같다. 제기되고 있는 제반 문제에 대한 기술적, 제도적 해법들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시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혹은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거나, 소규모의 단체․지역에서는 앞서 제기된 문제점들이 부차화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적인 공직선거에 활용되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어 보인다.
오병일 / 네트워커 :: antiropy@jin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