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역사를 통해서 본
민주노조의 정체성
유경순 | 역사학 연구소 연구원
1. 왜, ‘노동조합’이 아니고 ‘민주노조’인가 ?
노동조합이란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한 자주적 조직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노동조합’이란 말보다 ‘민주노조’라는 이름으로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을 지칭하고 있다. 이는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자주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1946년 이후 대한노총으로 대체되고, 1960년대 한국노총이 공식적인 노동조합의 대표 조직인 양 행세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노총, 한국노총은 정권이 노동자 통제를 위해 만든 ‘어용’조직일 뿐이다. ‘민주노조’가 등장 한 것은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에 반대하며 독자적 움직임을 만든 1970년대부터였다.
민주노조란 무엇인가? 노동조합의 주인은 노동자임을 분명히 하는 조직이다. 이는 바로 조합원들의 요구에 의해 조합원들이 운영하는 ‘민주성’을 바탕으로 정권과 자본에 타협하지 않는 ‘자주성’을 갖는 것이다. 나아가 사업장의 틀을 넘어 ‘노동자는 하나’임을 실천하는 ‘연대성’을 통해 ‘계급성’을 획득해 가는 조직이다. 1970년대 민주노조가 시작된 이후 1990년대 전노협 시기, 노동운동의 역사는 이러한 민주노조의 성격을 투쟁을 통해 온 몸으로 만들어왔다.
2000년대 조합원 80만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은 어떠한가? 정권에 의해 휘둘리는 사회적 합의문제, 잇단 민주노조간부의 비리 사건으로 민주노조의 ‘자주성’과 ‘민주성’이 실종되어가고 있다. 2006년 현재 전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려는 비정규직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에 지원과 연대는 ‘구호’로만 맴돌고 있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연대성과 계급성이 흔들리고 있다.
이 글은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민주노조운동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으며, 그 성격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려 한다. 역사를 통해 현실 민주노조운동이 바로 세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2.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 ‘자주성’을
노동조합운동의 정신으로 곧추 세우다.
한국전쟁 뒤 1950~60년대 정권과 자본은 한 손에는 반공주의를, 다른 한 손에는 경제성장을 빌미로 노동자의 요구를 철저히 짓밟아, 노동자의 요구를 담은 투쟁과 조직 활동은 4.19시기에 일시 터져 나온 경우를 제외한다면, 산발적이며 개별적 움직임이어서 하나의 흐름과 운동으로 조직되지 못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가 등장하자 군사정권이 만든 한국노총은 ‘유신체제 지지’ 선언을 통해 더욱 정권과 밀착했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저항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이에 정권의 노동자 통제와 한국노총의 ‘어용성’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흐름이 만들어졌다. 그 성격은 노동자들의 이익과 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자주적’인 노조활동을 하려는 것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분신을 통해 결성된 청계피복노조를 시작으로, 동일방직,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YH노조, 반도상사 등 섬유, 전자업종의 노조가 서울,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노조가 없는 곳에서는 노조를 만들고, 어용노조가 있는 곳에서는 노조를 민주화시켰으며, ‘어용’ 한국노총과 달리 스스로 ‘민주노조’라 불렀다.
노동조합의 ‘민주성’과 ‘자주성’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자주성을 확보하려면 무엇보다도 노조가 조합원의 지지에 뿌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에 조합원의 요구와 이해를 반영하는 조합 내 민주주의가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민주노조들은 일상활동 시기 조합원을 참여시키고 그들의 요구를 수렴하기 위한 조직운영체계를 활용했다. 아래의 YH노동조합의 보기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YH노조는 조합원 의견을 늘 듣기 위해 5단계 토의방식체계를 운영했다. 즉 “의장단(4인)논의, 대책마련→상집위원(21인)논의→대의원(41명) 소집하여 그룹토론→대의원과 상집위원 중 그룹 진행위원을 선발(16명)하여 조합원을 16개 소그룹으로 나눈 뒤 모든 그룹에 참가하여 토론을 주도, 나머지 대의원과 상집위원들은 보조역할→모임 뒤 그룹 진행위원이 평가회를 통해 조합원의 반응, 결정사항, 요구내용 등 종합토론”의 방식이다. 이는 조합원들이 차례로 그룹토의에 참가하여 참여의식을 높이며 함께 문제를 발굴하여 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 전YH노조․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YH노동조합사, 형성사, 1984
또한 민주노조는 여러 소그룹활동과 교육을 통해 조합원들의 의식을 높이며 조합활동에 조합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넓히려 했다. 보기를 들면 원풍모방노조의 경우 50~60개 소모임에 400~500명의 조합원이 활동했다. 교육활동 역시 활발했는데 청계피복노조의 경우 ‘노동교실’이라는 교육공간을 따로 만들어 운영했으며, YH노조는 ‘녹지야학’을 활용해 조합원 교육에 힘썼다. 민주노조는 자체 교육 말고도 크리스찬 아카데미 같은 외부교육기관에 간부나 조합원들을 보내 노동자 권리의식과 사회의식을 높이려 했다. 이처럼 민주노조들은 조합원들이 노조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노력을 했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1970년대 후반기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민주노조가 탄압받자 조합원들은 노조를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보기로 조합원들이 온 몸을 던져 노조를 지키려 했던 ‘동일방직 노조 사수투쟁’을 살펴보자.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25년간의 어용노조를 1972년 민주노조로 변화시켰다. 민주 집행부가 등장하자 임금이나 노동조건 등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이 노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노조는 조합원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자본으로부터 ‘자주성’을 지키면서 노동자들의 이해 관철을 위해 힘껏 활동했다.
그러나 자본가, 한국노총과 섬유노조, 중앙정보부가 노조를 어용화시키기 위해 본격적인 탄압에 나섰다. 1976년 회사 측이 일부 남성노동자를 매수해 대의원대회를 방해하자 이에 여성노동자들이 농성투쟁과 심지어 ‘알몸시위’를 해 노조를 지켜냈다. 이어 1978년 대의원대회에서 회사 측 구사대, 섬유노조 행동대 등이 나서서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퍼부으면서 방해했다. 회사 측은 민주노조를 뿌리 뽑기 위해 핵심적인 노동자 124명을 해고시키고, 섬유노조 위원장은 이들의 명단을 적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전국에 돌렸다.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해 관련 기관 방문투쟁, '동지회보' 발간, 똥물탄압 폭로공연, 한국노총 위원장실 점거 단식농성 등 지속적으로 타협하지 않고 투쟁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은 바로 노조가 정권과 자본에 굴하지 않는 ‘자주성’을 지키면서 조합원들의 요구와 이해를 대변해 온 결과였다.
이처럼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아래로부터 노동자 투쟁에 기반을 두어 ‘자주성’과 ‘민주성’을 노조운동의 정신으로 가꿨으나, 두 가지 수준에서 한계를 보였다. 그 첫 번째가 연대투쟁의 부족이며, 두 번째가 민주노조를 바탕으로 한 노동자계급이 자기 사업장의 노동조건개선에서 나아가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이는 1980년 5월 13~14일 노총민주화투쟁에서 연대를 하러 온 학생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농성을 자진해산 한 일, 1981~82년 신군부정권이 민주노조를 각개 격파하려고 탄압한 것에 대해 자기 노조를 보존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대항하다 강제해산 당하는 모습에서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의 극복은 198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과제로 남겨졌다.
3. 1985년 구로지역 노동자들,
정권의 노조 탄압에 동맹파업으로 맞서다.
“아아 민주노조 동지들이여! 대우노조의 탄압을 남의 일로 받아들일 건가? 6월 22일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이 지난 4월 임금인상 투쟁에서 있었던 한나절의 파업 때문에 구속되었다. … 올해 구로공단 내의 모든 민주노조들은 농성과 시위, 파업을 통하여 임금인상에 큰 성과를 올리지 않았던가? … 저들 마음대로 뜯어고쳐 놓은 노동악법의 올가미에 매여 우리의 정당한 권리행사조차 봉쇄되어 버린다면 노동조합이 무슨 소용인가? 대우노조 탄압은 모든 민주노조탄압의 첫 신호이다. 오늘의 대우노동조합 탄압은 80년의 저 무시무시한 노동조합 탄압을 되새기게 한다. … 우리는 이번 대우노조의 파괴 음모가 모든 민주노조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임금인상조차도 못하는 노동조합으로 비굴하게 살아남을 건가? 가만히 앉아서 민주노조가 차례차례로 깨져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건가?”
- 1985. 6. 24. 「노동조합 결사투쟁 선언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피로 물들이고 등장한 신군부정권은 ‘70년대 민주노조’를 강제 해산시키고, 노동법을 개악해 산별노조체계를 기업별노조체계로 바꾸었으며, 제3자 개입금지조항으로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로막았다. 그에 더해 ‘임금 가이드라인’(임금동결정책) 정책으로 저임금을 강요했다. 신군부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에도 19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은 여러 소모임 형태의 비공개활동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갔다.
1983년 말 신군부정권은 통치에 대한 자신감과 1985년 총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유치의 정치적 일정을 무난히 치르기 위해 일시적이며 부분적인 ‘자유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유화조치로 일시 정권의 탄압이 주춤하자 3~4년 간 쌓인 노동자들의 불만이 다시 터져나왔다. 1983년 말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시작으로 1984년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투쟁, 대구택시노동자 투쟁 등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노조결성 자유 등을 요구했다. 그 결과 200여 개의 노조가 결성되었으며, 구로공단에는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에 민주노조가 결성됐다.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계승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민주노조들은 사업장 안의 소그룹활동과 노동조건 개선활동을 바탕으로 다른 사업장들과 일상적인 연대활동을 전개했다. 위원장들 간에, 노조 부서 간에 더 나아가 노조의 행사를 매개로 일반 조합원들 간의 연대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특히 개별 노조의 간부교육, 숙박교육에도 여러 노조 간부들이 같이 참여해 “노동자는 하나”라는 일체감을 높여갔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자 정권은 다시 탄압을 가했다. 1985년 6월 22일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인을 구속을 시작으로 민주노조를 해체시킬 의도를 드러냈다. 1970년대 민주노조가 신군부정권의 탄압에 개별적으로 대응하다 강제해산 당한 역사적 경험을 알고 있던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은 정권의 노조 탄압에 바로 동맹파업과 연대투쟁으로 맞섰다.
구로동맹파업을 살펴보자. 6월 24일에서 6월 29일까지 5개 사업장에서 약 1,4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벌였으며, 다른 5개 사업장에서 지지연대투쟁을 벌여, 모두 2,500여 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가두시위가 벌어졌으며, 구로지역에 선전물이 대량 배포되어 공단 내 노동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다. 또 노동운동단체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위시한 청년, 농민, 여성 운동세력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전라도, 경상도에서도 지지농성, 지지성명서를 발표하여 동맹파업을 중심으로 한 민중연대가 시도됐다.
구로동맹파업은 정권의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을 비타협적 ‘연대투쟁’으로 지켰다. 정권의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들이 ‘의식적 실천’을 통해 기업별 노조의 틀을 뛰어 넘어 정치적 연대투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동맹파업은 사회운동 세력의 적극적 지지투쟁을 이끌어 내어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해를 넘어 사회민주화를 위한 투쟁 주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 1990년, ‘노동해방’,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을 결성하다
구로동맹파업 뒤 노동자들은 1987년 7․8․9월 대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들고 나왔다. 대투쟁은 3,300여 건의 투쟁에 122만 노동자가 참여했다. 노동자계급이 형성된 이래 최초이자 최대 규모였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정권과 자본이 은폐하려 한 노동현장의 모순을 일시에 폭로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노조결성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단결된 힘으로 ‘선파업, 후협상’을 통해 대부분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대투쟁을 통해 정권과 자본에 의해 ‘산업역군’, ‘수출역군’으로 치켜세워지면서 한편으로 ‘공돌이’, ‘공순이’로 비하하며 ‘노동자’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무시당했던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당당하게 ‘노동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노총과는 별도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표방하는 ‘민주노조운동’이 전국에 뿌리내렸다.
민주노조들은 단위 사업장 단위로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는 노조를 지키기도 어렵고, 서로 경험을 공유하며 교류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이에 다른 사업장 노조와 ‘품앗이 연대’를 하거나 지역 내 공동(임금인상)투쟁을 추진하면서, 1987년 말~88년 지역별, 업종별, 그룹 별로 조직의 틀을 넓혀 갔다. 정권과 자본이 추진하는 ‘복수노조 금지, 제3자 개입금지,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등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기 위해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를 구성해 전국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모색했다.
그 결과로 1988년 11월 13일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각 지역에서 달려온 5만 여 노동자들로 가득 찬 노동자대회는 전국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노동해방’을 목소리 높여 외쳤다. 다음 해 1989년 5월 1일 100주년 세계 메이데이를 맞아 민주노조운동은 정권의 탄압을 뚫고 노동자의 힘으로 메이데이 집회를 다시 개최했다. 이러한 투쟁의 경험과 조직 확대를 바탕으로 1989년 두 번째로 열린 전국노동자 대회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으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결성을 대중적으로 결의했다.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이 결성됐다.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 전국적 조직의 결성은 1946년 전국노동조합평의회 결성 이후 처음 시도되었다. 정권은 전노협 결성대회를 원천봉쇄했으나, 이를 뚫고 마침내 수원 성균관대에서 전노협은 역사적 출범을 했다. 14개의 지역노조협의회와 2개의 업종노조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600여 개의 민주노조와 20만여 조합원을 포괄하는 전국조직이 결성됐다. 전노협의 출범선언문을 통해서 그 성격과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전노협 ‘출범 선언문’>
첫째,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 어용적이고 비민주적인 노동 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한다.
둘째, 정권과 소수재벌의 억압과 수탈을 제거한다.
셋째, 노동자의 근본적인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개혁과 변혁 에 앞장선다.
넷째, 조국의 민주화․자주화․평화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재야민주세력과 연대하여 투쟁한다.
다섯째, 자주적인 산업별 노동조합을 토대로 하는 전국 중앙조직을 건설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선언문에 표현된 전노협 정신은 1970년대, 198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만들어온 노조의 원칙, 노동자들의 요구와 결의를 바탕으로 운영하는 ‘민주성’과 자본과 정권에 비타협적인 ‘자주성’을 계승했다. 나아가 전노협은 소속 노동자들만이 아닌 전 노동자의 계급적 연대와 단결을 추구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노동자의 ‘계급성’에 기초한 ‘사회변혁’을 지향했다. 이러한 전노협 정신은 전노협 시기 내내 실천되었으며,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으로 노동자의 가슴에 깊이 뿌리내렸다.
전노협은 출범에서부터 집중적 탄압을 받아 ‘건설 전노협’의 구호는 ‘사수 전노협’으로 바뀌었다. 정권과 자본은 전노협을 ‘체제전복세력’으로 규정하며, 파업사업장에 공권력 투입, 전노협 지도부의 대량 구속과 수배, 100여 개가 넘는 민주노조에 대한 업무조사, 무노동무임금 등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그러나 전노협은 조직 사수투쟁을 하면서도 1990년 KBS노동자의 방송민주화투쟁과 뒤이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중앙조직의 지도력을 발휘하여 총파업투쟁을 통해 지원과 연대를 아끼지 않았다. 전국의 민주노조들은 사업장의 조건에 맞게 전면파업, 부분파업, 집단조퇴, 총회투쟁, 성금모금 등을 통해 총파업투쟁에 참여했다. 5월 투쟁으로 전노협은 대공장과의 연대를 강화시켰으며, 이어 업종 노동자들과의 결합이 강화되면서 ‘민주노조 총단결’로 한 발 내딛게 되었다. 그 결과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는 업종연맹과 전노협이 공동 주최해서 개최하기도 했다.
1991년 4월 강경대 학생 살해를 계기로 형성된 ‘폭력살인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민주주의투쟁’ 과정에 터진,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조회의’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옥중살해 사건을 계기로 정권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분노는 다시 터져 나왔다. 연 이은 군부독재정권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살인탄압에 저항하여 전노협은 5월 9일에서 18일까지 정치적 총파업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은 노동자들의 단결뿐만 아니라 반독재민주주의 투쟁에도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노협 활동에서 알 수 있듯이 전노협은 소속 사업장이 아닌 대기업, 업종 노동자들의 투쟁에 총파업투쟁으로 다가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계급적 단결을 높여갔다. 그 결과 전노협은 사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 민주노조운동의 실질적 중앙조직, 지도 구심으로 위치했다.
1993년 정권의 ‘협조적, 생산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한 신노동정책의 하나로 추진된 ‘노․경총 합의’를 반대하는 투쟁과 한국노총 탈퇴투쟁(94년 상반기 31개 노조의 노총 탈퇴, 135개 노조의 의무금 납부 거부), 1994년 공동 임투, 전국 기관사 노동자들의 연대투쟁, 한국통신 노조 민주화 등을 통한 ‘공공부문 노조 대표자회의’ 결성으로 민주노조운동은 확산되었다.
1994년 11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1995년 5월 1일 106주년 메이데이 기념대회에서 11월 민주노총 결성을 공식 선언,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하는 것으로 ‘민주노조 총단결’을 실현시킨 전노협은 그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
5.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지켜 나가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70년 전태일 열사분신 이후 만들어진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은 정권과 자본에 굴복한 한국노총과 달리, 결성과정에서부터 현장 노동자들의 요구로 만들어졌다. 또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적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의 이해와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노조활동을 하기 위해 ‘자주성’을 지키며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였다. ‘자주성’과 ‘민주성’, 이를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성’은 1985년 또 다시 민주노조를 와해시키려는 정권의 탄압에 맞서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정치적 동맹파업으로 발전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기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전국적으로 뿌리내리면서, 전 노동자의 정신으로 발전했다. 사업장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세우고, 단결의 폭을 넓혀 지역, 업종, 그룹 차원의 노조협의회를 세웠으며, 그를 바탕으로 전국적 조직인 전노협을 건설했다. 전국 노동자의 지도 구심인 전노협은 정권과 자본의 총공세에 굴하지 않고 조합원들의 단결된 힘으로 ‘민주노조’를 지켜냈으며, 나아가 업종, 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강화시켰다. 민주노조운동은 전노협을 통해 ‘자주성․민주성․계급성’을 갖는 노동자운동으로 발전했다.
현실 민주노조운동은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노동자 분리정책과 허울 좋은 선진적 노사관계를 디밀어 끊임없이 민주노조의 ‘자주성’을 뒤흔드는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맞서, 다시 한번 앞선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속에서 세워온 ‘민주노조의 정신’을 되새겨 ‘미래’의 '노동자계급 총단결의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